처음엔 숨겼다.
지인이 "요즘 뭐 하며 지내?" 물으면 "집에서 쉬었지" 얼버무렸다. 실제로는 『다이아몬드 에이스 ACT2』 52화를 몰아보느라 주말 내내 소파에서 일어나지 못했는데. 고등학생 야구부 이야기에 눈물 콧물 쏟으며 "사와무라 에이준 파이팅!" 외친 걸 어떻게 말해. 마흔 중반 먹은 입으로.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도 조심했다. 코난 극장판 포스터로 바꾸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학부모들이 보면 뭐라 생각할까. 25년 넘게 아이들 공부를 봐온 사람이 애니메이션 캐릭터를 프로필에? "저 선생님 괜찮은 거야?" 수군거리는 게 눈에 보이는 것 같았다.
핸드폰 케이스도 문제였다. 일본 아마존에서 하이큐 케이스를 발견했을 때 심장이 뛰었다. 카라스노 고교 배구부 까마귀 로고가 선명하게 박힌 블랙 케이스. 장바구니에 넣었다가 뺐다가를 열 번은 반복했다. 결국 샀다. 그리고 집에서만 꼈다. 밖에선 무난한 투명 케이스로 갈아끼웠다.
숨기면서 사는 게 은근히 피곤했다.
네이버 검색 기록은 수시로 지웠다. "귀멸의 칼날 렌고쿠 피규어", "하이큐 4기 다시보기", "명탐정 코난 극장판 순서". 만약 누가 내 폰을 보면? 상상만 해도 얼굴이 화끈거렸다.
유튜브 알고리즘은 더 무서웠다. 집에서 혼자 애니 리뷰 영상을 보다 보면 추천 영상이 전부 애니 관련으로 도배됐다. 그러다 남편이 "유튜브 좀 틀어봐" 하면 식은땀이 났다. 급하게 검색 기록 지우고 "음악" 탭으로 전환하는 나. 무슨 비밀 연애도 아니고.
전환점은 뜻밖의 자리에서 왔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의 저녁 자리였다. 비슷한 또래, 아이 키우는 엄마들. 와인 한 잔 기울이며 수다를 떨다가 한 친구가 물었다. "요즘 뭐 보고 지내? 드라마?" 순간 머릿속에서 『최애의 아이』 오프닝이 울렸다. 아이돌 산업의 어두운 이면을 다룬 그 애니를 정주행하느라 지난주 내내 새벽 2시에 잤는데.
"어... 드라마 좀."
거짓말이 입에서 튀어나왔다. 그런데 맞은편에 앉은 친구가 핸드폰을 꺼내다가 케이스가 보였다. 『주술회전』 고조 사토루. 하얀 머리카락에 검은 안대, 그 일러스트.
"어, 그거......"
내 입에서 저도 모르게 말이 튀어나왔다. 친구가 멈칫했다.
"어...... 혹시 너도 봐?"
찰나의 선택이었다. 여기서 "아니, 그냥 캐릭터가 예쁘길래" 하고 넘어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순간, 뭔가 탁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응, 나 애니 좋아해. 주술회전도 보고, 귀멸의 칼날도 보고......"
말을 꺼내자 줄줄이 나왔다. 코난 극장판 스물여덟 편 다 봤다. 하이큐는 원작 만화까지 전권 샀다. 최애의 아이 때문에 요즘 잠을 못 잔다. 친구 눈이 점점 커졌다.
"야, 너...... 덕후야?"
덕후.
그 단어가 귀에 꽂혔다. 예전 같으면 펄쩍 뛰며 "무슨 소리야, 그냥 좀 보는 거지"라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날 밤, 와인 기운 탓인지 그냥 웃으면서 말했다.
"응, 나 덕후야."
테이블이 잠깐 조용해졌다. 그리고 맞은편 친구가 말했다.
"나도......"
알고 보니 그 자리에 나 말고도 두 명이 더 애니를 보고 있었다. 한 명은 『스파이 패밀리』에 빠져 있었고, 다른 한 명은 『진격의 거인』을 세 번이나 정주행했단다. 마흔 넘은 아줌마 넷이 고깃집에서 애니 이야기로 밤새 떠들었다. 남편 이야기, 아이 이야기보다 훨씬 신났다.
그날 이후로 숨기지 않기로 했다.
카톡 프로필 사진을 코난으로 바꿨다. 닉네임도 '코난'으로. 핸드폰 케이스도 하이큐 케이스를 당당히 들고 다녔다. 상담 오는 학부모들이 보면 어쩌나 살짝 긴장했는데, 의외로 반응이 왔다. 상담 끝나고 한 어머니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선생님, 혹시...... 하이큐 좋아하세요? 저희 아들이 그거 보고 배구부 들어갔거든요."
그 어머니와 나는 10분 동안 하이큐 이야기를 했다. 히나타 쇼요의 점프, 카게야마 토비오의 토스, 카라스노와 네코마의 쓰레기장 대결. 아이 성적 이야기보다 더 열정적으로.
마흔 중반에 깨달았다. 숨길 필요가 없었다는 걸. 좋아하는 걸 좋아한다고 말하는 게 왜 창피한 일이어야 하지? 애니를 보면 유치한 걸까? 피규어를 모으면 철없는 걸까?
아니다. 좋아하는 게 있다는 건 삶의 활력이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소파에 앉아 "오늘은 뭘 볼까" 고민하는 그 시간이 얼마나 행복한데. 캐릭터 생일에 SNS가 축하 글로 도배되는 걸 보며 혼자 흐뭇해하는 그 기분이 얼마나 충만한데.
지금 내 책상 위에는 렌고쿠 피규어가 서 있다. 누가 물으면 당당하게 말한다.
"네, 제 최애예요."
마흔 넘어 덕후가 된 게 부끄러웠던 적이 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부끄러운 건 좋아하는 걸 숨기느라 쩔쩔매던 그때의 나였다.
나는 덕후다. 닉네임은 코난. 숨기지 않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