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은 밤 11시 47분에 일어났다.
남편과 아이들이 잠든 거실. 나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넷플릭스를 켰다. 명탐정 코난 극장판 '할로윈의 신부'. 이어폰을 꽂고, 볼륨을 올리고, 세상과 단절했다. 완벽한 덕질 환경.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아무로 토오루가 뭔가 결정적인 대사를 내뱉었다. 범인을 추리하는 핵심 장면. 자막이 휙 지나갔다. 뭐라고? 되감기. 다시 재생. 자막이 또 휙 지나갔다.
"아니, 잠깐만!"
나도 모르게 소리가 나왔다. 옆방에서 남편이 뒤척이는 소리가 들렸다. 입을 막았다. 다시 되감기. 이번엔 일시정지까지 눌러가며 자막을 읽었다.
읽었다. 이해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분명 아무로의 입에서는 훨씬 긴 대사가 나온 것 같은데, 자막은 고작 두 줄이었다. 게다가 그의 목소리 톤에 담긴 뭔가가—그 미묘한 긴장감과 확신이 뒤섞인 뉘앙스가—자막에는 없었다.
그날 밤, 나는 같은 장면을 일곱 번 돌려봤다.
"엄마, 뭐 해?"
다음 날 아침, 식탁에서 딸아이가 물었다. 나는 휴대폰을 재빨리 뒤집었다.
"아무것도."
"거짓말. 방금 뭐 보고 있었잖아."
이 녀석의 관찰력은 대체 누구를 닮은 건지. 나는 마지못해 화면을 보여줬다. 히라가나 표.
"あ, い, う, え, お..."
딸아이의 눈이 동그래졌다.
"엄마, 이거 일본어잖아. 갑자기 왜?"
"그냥. 취미로."
"취미로 일본어를?"
마흔일곱 먹은 엄마가 식탁에서 히라가나를 외우고 있으니 이상해 보일 만도 했다. 하지만 나는 당당하게 대답했다.
"응. 자막 없이 애니 보려고."
딸아이가 푸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옆에서 밥을 먹던 아들도 킥킥거렸다. 남편만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당신, 그거 진심이야?"
"내가 언제 뭘 대충 해봤어?"
25년간 대치동에서 학습 코칭컨설턴트로 수천 명의 학생들에게 공부법을 가르쳤다. '동기 부여가 핵심이다', '목표를 구체적으로 세워라', '매일 조금씩이라도 꾸준히 하라'. 그 모든 말들이 이제 내 자신에게로 부메랑처럼 돌아왔다.
자, 김소연. 네 동기는 뭐지?
자막 없이 코난의 추리를 알아듣고 싶다. 렌고쿠 쿄쥬로의 "心を燃やせ!"를 원어로 느끼고 싶다. 아무로 토오루가 중얼거리는 그 미묘한 대사들을 흘려듣지 않고 싶다.
이보다 순수한 동기가 어디 있겠는가.
문제는 현실이었다.
히라가나 46자를 외우는 데 2주. 여기까지는 좋았다. 꽤 뿌듯했다. 나 아직 머리 돌아가네. 그렇게 자만하는 순간, 가타카나가 등장했다.
'어, 이거 히라가나랑 발음이 같네? 쉽겠다!'
쉽긴 개뿔.
'あ'는 쓱쓱 써지는데 'ア'는 손에 안 익었다. 'シ'와 'ツ'는 대체 뭐가 다른 건지. 'ソ'와 'ン'을 구분하는 데만 사흘이 걸렸다.
그리고 진짜 보스가 등장했다.
한자.
일본어의 한자는 읽는 법이 한 개가 아니었다. '人'이 '히토'가 되기도 하고, '닌'이 되기도 하고, '진'이 되기도 했다. '日'은 '히', '니치', '카', '비' 등등 읽는 법이 대여섯 개가 넘었다.
대여섯 개가 넘는다고요?
나는 학습 앱을 덮고 천장을 바라봤다. 갑자기 대치동에서 "수학 싫어요, 영어 어려워요" 하던 아이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때 나는 뭐라고 했더라?
"어렵다고 느끼는 건 당연해. 쉬우면 이미 아는 거지, 배우는 게 아니잖아."
... 선생님, 그 말 진짜 너무 쉽게 했네요.
그래도 덕심은 어지간한 장벽을 뚫는 법이다.
출퇴근 시간 좀 더 일찍 그리고 늦게 시간짬내어 차안에서 단어장을 봤다. 점심시간에 문법 영상을 들었다. 밤에는 애니메이션을 '학습 자료'로 포장해서 봤다. 남편이 "또 애니 봐?" 하면 "아니, 이건 일본어 공부야"라고 당당하게 대답했다. 실제로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일시정지하고 사전을 찾았다. 물론 스토리가 재미있어서 멈추기 싫은 건 함정이었지만.
그러던 어느 날, 기적 같은 순간이 찾아왔다.
하이큐를 보고 있었다. 카게야마 토비오가 히나타에게 소리쳤다. 자막이 나오기 전에, 내 귀가 먼저 알아들었다.
"토베!"
뛰어.
단 두 음절. 내가 알아들은 첫 번째 자막 없는 이해. 그 순간의 쾌감은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마치 외국에서 처음으로 원어민의 말을 알아들었을 때 같은, 세상이 조금 더 넓어지는 그 느낌.
나는 새벽 2시에 혼자 거실에서 주먹을 불끈 쥐었다.
"요시!"
이것도 애니에서 배운 일본어였다.
그로부터 2년.
작년, 나는 JLPT N3에 합격했다. 시험장에서 나보다 나이 많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수험생들 사이에서 나는 완전히 '이모' 포지션이었다. 감독관이 신분증을 확인하며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 나이에 웬 일본어 시험이지?' 하는 눈빛.
그 눈빛이 오히려 자극이 됐다.
합격 통지를 받던 날, 나는 가족 단체 카톡방에 인증샷을 올렸다.
"N3 합격! 다음 목표 N2!"
아들이 답장했다. "ㅋㅋㅋㅋ 엄마 찐이네"
딸아이가 이어서 썼다. "엄마 멋있어�"
남편의 답장은 짧았다. "ㄷㄷ"
그 짧은 자음 두 개가 어떤 장문의 칭찬보다 좋았다.
올해 목표는 N2다.
솔직히 N3과 N2 사이의 벽은 높다. 한자도 급격히 많아지고, 문법도 복잡해지고, 무엇보다 읽기 지문의 길이가 미쳐 돌아간다. 하지만 이상하게 두렵지 않다.
가끔 생각한다. 마흔일곱에 히라가나부터 시작해서 여기까지 온 내가 꽤 대견하다고. 자막이 거슬린다는 그 유치한 이유 하나로, 새로운 언어의 문을 두드린 내가 꽤 멋지다고.
요즘 나는 애니메이션을 볼 때 자막을 가끔 끈다. 아직 100%는 안 들린다. 한 70% 정도? 하지만 그 70%가 주는 희열은 자막과 함께한 100%와는 차원이 다르다. 내 귀로 직접 듣고, 내 머리로 직접 이해하는 그 감각.
그리고 그 일본어 공부가 단순한 언어 학습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갈 줄은, 그때의 나는 아직 몰랐다.
무나카타라는 일본의 작은 도시에서 사물놀이 공연을 하게 될 줄은.
그것도 두 해 연속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