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란 누나!"
코난이 란을 부르는 장면을 몇 번이나 봤을까. 1,100화가 넘는 에피소드를 정주행하면서 셀 수 없이 들은 대사였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궁금해졌다.
이 목소리, 누가 내는 거지?
검색창에 '명탐정 코난 성우'를 쳤다. 에도가와 코난 역, 타카야마 미나미. 1996년부터 지금까지 30년 가까이 같은 캐릭터를 연기하고 있다고 했다. 유튜브에서 인터뷰 영상을 찾았다. 중년 여성의 차분한 목소리로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에도가와 코난, 탄테이사!"
소름이 돋았다. 저 입에서 코난이 나왔다.
그날 밤, 코난을 다시 틀고 귀만 기울였다. "란 누나!" 두 글자. 그 안에 담긴 게 들렸다. 연인을 부르고 싶지만 '누나'라고 불러야 하는 안타까움. 어린아이인 척해야 하는 답답함. 자막에는 그냥 '란 누나!'라고만 적혀 있었다. 느낌표 하나. 그게 다였다.
그때부터 성우 검색이 습관이 됐다.
다이아몬드 에이스를 보다가 미유키 카즈야에게 완전히 빠졌다. 고글 쓴 포수. 처음엔 '뭐야 저 고글, 촌스럽다' 했는데, 어느새 화면에 미유키만 나오면 눈을 못 뗐다. 투수를 마운드에서 빛나게 할 수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한다는 그 대사. 성우가 궁금해졌다. 사쿠라이 타카히로. 검색해 보니 일본에서 최다 배역을 맡은 베테랑 성우라고 했다. 미유키가 특유의 능글맞은 웃음을 지으며 "하여간 투수라는 놈들은 하나 같이 다 에고이스트들이라니까"라고 할 때, 그 목소리의 온도가 느껴졌다. 짓궂으면서도 애정 어린. 자막으로는 절대 전달되지 않는 뉘앙스.
하이큐의 히나타 쇼요, 무라세 아유무. 목소리가 너무 귀여워서 처음엔 여자 성우인 줄 알았다는 일화를 읽으며 웃었다. 히나타가 "켄마 씨! 배구 재밌어?"라고 외칠 때, 그 목소리엔 단순한 질문이 아닌 확신이 담겨 있었다. '너 지금 신나지? 나랑 붙는 거 재밌지?' 자막에는 물음표 하나였는데.
귀멸의 칼날 무한열차편. 렌고쿠 쿄쥬로, 히노 사토시. "우마이!" 도시락 먹으며 외치는 그 한 마디에 캐릭터의 모든 게 담겨 있었다. 호탕하고, 순수하고, 삶을 온몸으로 즐기는 사람. "心を燃やせ!" 마음을 불태워라. 새벽 두 시에 혼자 거실에서 펑펑 울었다.
목록은 계속 늘어났다.
겁쟁이 페달의 오노다 사카미치를 보면서 야마시타 다이키의 목소리에 빠졌다. 주술회전의 고죠 사토루, 나카무라 유이치. "대장, 괜찮아~"라고 말하는 그 여유로운 톤. 약사의 혼잣말 마오마오의 차분하면서도 영리한 목소리, 유우키 아오이. 나의 행복한 결혼의 미요, 우에다 레이나. 팅덤의 캐릭터들까지.
새 애니를 보기 시작하면 먼저 캐스팅을 확인했다. 이름을 외웠다. 다른 작품에서 같은 성우가 나오면 반가웠다. '아, 이 목소리 알아!' 하는 순간이 점점 늘어났다.
스파이 패밀리의 아냐를 보다가 "와쿠와쿠!"라는 대사에서 타네자키 아츠미의 연기력에 감탄했다. 저 짧은 감탄사 하나에 어떻게 저렇게 많은 감정을 담을 수 있지? 설렘, 기대, 천진함, 약간의 장난기까지.
어느 순간 깨달았다.
나는 단순히 스토리를 좋아하는 게 아니었다. 캐릭터에 생명을 불어넣는 목소리를 좋아하고 있었다. 성우들의 연기를, 숨결을, 감정의 결을.
문제는 그걸 제대로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거였다.
자막은 의미만 전달했다. '맛있어!', '마음을 불태워라!', '배구 재밌어?', '두근두근!' 문장의 뜻은 알겠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목소리의 떨림, 호흡의 길이, 감정의 온도는 내 귀로 직접 알아들어야 느낄 수 있는 것이었다.
성우가 한 글자 한 글자에 담아낸 정성. 수십 번의 리테이크 끝에 완성된 그 한 마디. 나는 그것의 반도 못 느끼고 있었다.
자막 뒤에 숨은 목소리.
그게 듣고 싶었다.
그 마음이 어디로 향할지, 그때의 나는 아직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