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점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외국어 코너. 영어 교재 수백 권 사이에 일본어 코너가 있었다. JLPT N5부터 N1까지, 히라가나 쓰기 노트부터 비즈니스 일본어까지 빼곡하게 꽂혀 있었다. 나는 그 앞에서 멍하니 선반을 바라봤다.
마흔여섯. 2023년 가을.
겁쟁이 페달의 오노다 사카미치가 아키바에서 자전거를 타듯, 다이아몬드 에이스의 사와무라 에이준이 세이도 고교에 뛰어들듯, 나도 뭔가를 시작하려 하고 있었다. 다만 그들은 열일곱이었고, 나는 마흔여섯이었다.
히라가나 쓰기 노트를 집어 들었다. 표지에 커다랗게 'あいうえお'가 적혀 있었다. 초등학생용인 건지 일러스트가 귀여웠다. 옆에 있던 20대쯤 되어 보이는 여자가 힐끗 나를 봤다. '이 아줌마가 이걸 왜 사지?' 하는 눈빛은 아니었길 바란다.
계산대에서 지갑을 열며 생각했다. 이 노트 한 권이 나를 어디까지 데려갈까. 코난의 추리를 알아듣는 데까지? 미유키 카즈야의 능글맞은 한마디를 자막 없이 느끼는 데까지? 아니면 그냥 첫 페이지에서 멈추고 책장 어딘가에 먼지가 쌓이는 것까지?
솔직히, 반반이었다.
첫날 밤, 식탁에 노트를 펼쳤다.
あ.
볼펜을 쥐고 한 획을 그었다. 삐뚤어졌다. 지우개로 밀고 다시 썼다. 또 삐뚤어졌다. 세 번째에야 겨우 그럴듯한 'あ'가 나왔다.
옆에서 숙제하던 딸아이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엄마, 뭐 해?"
"일본어 공부."
"헐. 진짜로?"
"응. 진짜로."
딸이 내 노트를 들여다봤다. 한 줄 가득 'あ'만 빼곡히 적힌 노트를.
"엄마, 이거 완전 초등학교 1학년 때 'ㄱ' 쓰기 연습하는 거 같은데?"
맞았다. 정확히 그거였다. 아이가 처음 한글을 배울 때 나는 옆에서 "잘했어, 한 번만 더" 하며 손을 잡아줬다.
그런데 지금은 내가 'ㄱ'을 배우는 입장이 됐다. 차이가 있다면, 옆에서 손 잡아주는 사람이 없다는 것. 아니, 옆에서 킥킥거리며 구경하는 딸이 있긴 했다.
"엄마 화이팅!"
딸이 진심인지 놀리는 건지 모를 응원을 던지고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あ행부터 시작했다. あ, い, う, え, お.
다섯 글자. 쉬워 보였다. 하루면 되겠지.
이틀 걸렸다.
문제는 쓰는 게 아니었다. 쓰는 건 어찌어찌 됐다. 문제는 읽는 것. 'あ'를 보면 'a'가 떠오르는 데 시간이 걸렸다. 머리가 한글 회로에 너무 익숙해져 있었다. 낯선 곡선들이 눈에 들어오면, 뇌가 "이건 뭐지?" 하고 한 박자 멈칫했다.
か행으로 넘어갔을 때 속도가 더 느려졌다. か, き, く, け, こ. 'き'와 'さ'가 자꾸 헷갈렸다. 'ぬ'와 'め'도 헷갈렸다. 'わ'와 'れ'와 'ね'는 세 글자가 다 비슷하게 생겨서 한참을 노려봐야 구분이 됐다.
약사의 혼잣말에서 마오마오가 약초 이름을 줄줄 외우듯, 나도 히라가나를 줄줄 외우고 싶었다. 하지만 마오마오는 천재고 나는 마흔여섯 먹은 보통 아줌마였다.
출퇴근 지하철에서 히라가나 표를 꺼내 들었다. 옆자리 사람이 슬쩍 쳐다봤다. 신경 안 썼다. 주술회전의 이타도리 유지도 처음 저주를 배울 때 뭣도 모르고 시작했다. 나도 뭣도 모르고 시작하는 거다.
점심시간, 학원 쉬는 시간 10분, 자기 전 30분. 자투리 시간이란 시간은 다 일본어에 쏟았다. 다이아몬드 에이스의 사와무라가 타이어를 굴리며 체력 훈련을 하듯, 나는 히라가나 표를 굴리고 또 굴렸다.
2주가 지나자, 46자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히라가나를 떼고 나니, 세상이 달라 보였다.
정확히 말하면, 애니메이션 오프닝이 달라 보였다. 전에는 그냥 예쁜 일본어 글씨에 불과하던 타이틀이, 이제는 읽혔다. 더듬더듬이었지만.
나의 행복한 결혼. 'わたしの しあわせな けっこん'. 한 글자 한 글자 짚어가며 읽었다. 와타시노... 시아와세나... 켓콘. 읽었다. 내가 읽었다!
그날 밤 거실에서 혼자 조용히 주먹을 쥐었다.
겨우 히라가나를 뗀 것뿐이었다. 아직 가타카나도 못 시작했고, 한자는 산 너머 또 산이고, 문법은 이름도 모르는 상태였다. JLPT로 치면 N5에도 한참 못 미치는 수준이었다. 객관적으로 보면 아무것도 아닌 수준이었다.
그런데 그게, 그 아무것도 아닌 게, 나한테는 엄청난 거였다.
마흔여섯 해를 살면서 새로운 문자 체계를 배운 적이 언제 있었나. 초등학교 때 한글 배운 이후로 한 번도 없었다. 영어 알파벳은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눈에 들어왔으니 '배웠다'는 감각이 별로 없었다. 하지만 히라가나는 달랐다. 완전히 낯선 기호가 내 머릿속에 하나씩 새겨지는 느낌. 뉴런이 새로 연결되는 그 짜릿한 감각.
이게 배움이구나.
25년 동안 아이들한테 "공부하면 성장한다"고 말하면서, 정작 나 자신은 그 성장의 쾌감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팅덤을 보다가 'ありがとう'가 들렸을 때. 다이아몬드 에이스에서 미유키가 'いいよ(좋아)'라고 할 때. 주술회전에서 이타도리가 '行くよ(가자)'라고 외칠 때.
예전에는 자막으로 먼저 의미를 봤다. 이제는 소리가 먼저 들어왔다. 아직 몇 개 안 되는, 아주 기초적인 단어들이었지만. 'ありがとう'가 '고마워'라는 뜻이 아니라 '아리가토우'라는 소리로 먼저 귀에 꽂히는 그 순간.
겁쟁이 페달의 마키시마 유스케가 정상을 향해 페달을 밟듯, 나도 밟고 있었다. 히라가나라는 아주 낮은 언덕의 첫 번째 오르막을. 정상은 아직 안 보였다. 안 보여도 괜찮았다.
어차피 덕후한테 포기란 없다.
미유키 카즈야가 사와무라한테 캐칭하면서 웃으며 "야, 점점 좋아지고 있어"라고 했듯이, 나도 나한테 말하고 싶었다.
점점 좋아지고 있어.
가타카나가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한자가 그 뒤에 버티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무섭기보다 설렜다. 좋아하는 것들의 목소리를 내 귀로 직접 듣는 날이 올 거라는 걸 알았으니까.
3년 전, 2023년 가을.
그렇게 나의 일본어는 시작됐다.
'あ' 한 글자에서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