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이 대안학교에 다녔다 8년전 큰아이가 먼저 중1로 들어갔을 떄..학교에서 열린 한 학부모 모임에서 처음 퍼실리테이션이라는 대화 방식을 접했다. 누군가 앞에 서서 설명하기보다, 둥글게 앉아 서로의 생각을 묻고 듣는 그 방식이 낯설면서도 묘하게 편안했다.
모임이 끝난 뒤 몇몇 학부모들이 발걸음을 떼지 못하고 서서 이런 말을 나누었다.
“오늘 회의… 이상하게 좋지 않았어요?”
“맞아요. 끝나고 나니까 괜히 마음이 정리된 느낌이에요.”
그 ‘이상하게 좋았던’ 경험이 계기가 되어 우리는 따로 모이기 시작했다. 마침 선배 학부모 한 분이 퍼실리테이션 관련 일을 하고 계셨고, 우리는 그분의 도움을 받아 퍼실리테이션을 조금 더 체계적으로 배우게 되었다.
처음에는 단순한 호기심이었다. 그런데 질문 하나로 사람들의 표정이 바뀌, 말이 없던 사람이 조심스럽게 입을 여는 순간을 여러 번 보게 되면서 나 역시 이 방식을 제대로 배우고 싶어졌다.
그 경험은 결국 나를 퍼실리테이터 민간 자격증 과정까지 이끌었다.
그렇게 함께 배우던 부모들은 아이들이 졸업한 뒤에도 흩어지지 않았다. 어느 날 누군가 장난처럼 말했다.
“우리 이름 하나 만들까요? 계속 모일 거면.”
퍼실리테이션과 사피엔스를 합쳐 만든 말, 퍼피엔스. 가볍게 지은 이름이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 이름은 우리를 가장 잘 설명하는 말이 되었다.
아이들은 각자의 길을 가고 있지만 우리는 여전히 같은 단톡방 안에 남아 있다. 누가 나가자고 한 적도 없고, 나가야 할 이유도 딱히 없었다.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단톡방은 더 자주 울린다.
아이들이 졸업한 뒤에도 우리는 해마다 한 번씩 그 학교 학부모들을 위한 퍼실리테이션 자리를 마련한다. 또 다른 학교나 단체에서 교사나 학생, 학부모 모임을 위해 퍼실리테이션을 요청해 오면, 우리는 몇 명씩 짝을 지어 현장에 나간다.
처음 만나는 사람들 앞에 설 때면 여전히 약간의 긴장이 돈다. 하지만 원형으로 자리를 잡고 질문이 오가기 시작하면, 금세 분위기가 부드러워진다.
“이렇게 이야기해 보니까 서로 생각을 처음 알게 되네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우리는 서로를 한 번씩 바라보며 웃는다. 우리가 처음 그 자리에 앉아 느꼈던 그 경험이, 이제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해지고 있다는 걸 확인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며칠 전에도 다다음 주 학부모 퍼실리테이션 교육과정을 준비하기 위해 늦은 밤 온라인으로 모였다.
“이번엔 처음 오시는 분들이 많을 것 같아요.”
“그럼 시작 질문을 조금 더 가볍게 가는 게 좋겠네요.”
회의가 끝난 뒤에도 단톡방은 쉽게 조용해지지 않는다. 새벽 한 시가 넘은 시간에도 누군가는 문득 떠오른 생각을 남긴다.
“아까 회의하다가 생각났는데요, 첫 질문을 ‘요즘 가장 자주 드는 고민’ 정도로 하면 어떨까요?”
“좋다. 그러면 말문 트이기 훨씬 편하겠네요.”
우리는 이렇게, 생각이 나면 말을 꺼내고, 그 말을 누군가는 받아 적고, 또 다른 누군가는 거기에 생각을 보탠다. 정해진 회의 시간도, 반드시 참여해야 한다는 규칙도 없지만, 이 대화는 이상하리만큼 끊어지지 않고 이어져 왔다.
퍼피엔스 안에서는 서로의 말을 중간에 끊는 사람이 거의 없다. 의견이 부딪힐 때가 있어도 우리는 먼저 이렇게 묻는다.
“그렇게 생각한 이유를 조금만 더 들려줄래요?”
그 질문 하나가 분위기를 바꾼다. 누가 맞고 틀렸는지를 가르기보다, 왜 그런 생각이 나왔는지를 이해하려는 태도가 이 모임 안에서는 자연스럽게 자리 잡았다.
가끔 주변에서 묻는다.
“그거 해서 뭐가 남아요? 돈이 되는 일도 아니잖아요.”
그럴 때 우리는 서로를 보며 웃는다.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분명히 남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새벽까지 아젠다를 짜고 나면 몸은 피곤한데 마음은 묘하게 가벼워진다. ‘오늘도 같이 뭔가를 만들어 냈다’는 느낌이 오래 남는다.
그래서 나는 가끔 이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서로를 깎아내리지 않고 끝까지 들어 주는 사람들이라서 참 좋다. 그래서 이 모임이 나는 참 자랑스럽다.”
퍼피엔스는 거창한 조직도, 대단한 성과를 내세우는 단체도 아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우리는 서로를 안전하게 말하게 해 주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 분위기를 지키기 위해 기꺼이 시간을 내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그래서 아마 앞으로도 단톡방에는 이런 메시지가 올라올 것이다.
“갑자기 생각났는데, 다음에 이 주제로 한 번 얘기해 볼래요?”
그러면 또 누군가는 아무렇지 않게 답할 것이다.
“좋죠. 우리 그거 해 봐요.”
그리고 우리는, 늘 그랬듯이 다시 이야기를 시작할 것이다.
.여전히 누군가 우리에게 퍼실리테이션을 부탁하면 우리는 여전히 예전처럼 모여서 아젠다를 짠다. 재능기부라는 말로 정리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우리가 이 과정을 좋아해서 계속하는 것에 더 가깝다.
배우는 즐거움, 같이 성장하는 감각, 그리고 무엇보다 이 모임 안에 들어오면 말이 편해진다는 느낌. 아마 그게 우리가 8년 넘게 모임을 이어 오게 만든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큰아이가 중1로 들어가서 고3으로 작은아이가 중1에서 중3까지...그 8년은...나에게 나의 의견을 이야기하고 다른사람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나를 변화시킬 수 있는 너무 좋은 ..나 라는 나무가 자라는데 엄청 난 영양분이 되어주고 있다.
우리는 대단한 성과를 자랑할 건 없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서로를 끊지 않고 끝까지 들어주는 문화 속에서 함께 자라 온 사람들이다.
그리고 아마 그 문화만큼은 앞으로도 가장 오래 지켜 가고 싶은 우리의 자랑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