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리고 나서야 보였다

by 코난의 서재

그날 나는 딸 방에서 시작했다.

기숙사 간 지 석 달. 방은 딸이 두고 간 냄새로 가득했다. 샴푸인지 향수인지, 모르겠지만 딸 냄새.

청소하러 들어갔다가 한참 서 있었다.


고1 아들이 학교 간 사이, 조용한 집에서 나 혼자였다.

딸 방 먼지를 닦다가, 책상 서랍을 열었다가, 안 쓰는 노트들을 봉투에 담다가.


어쩌다 내 방까지 왔다.

그냥 좀 치우자, 싶었다. 먼지 쌓인 책장 한 칸만. 그게 다였는데.

옷장을 열었더니 한 번도 안 입은 옷들이 걸려 있었다.

입을 것 같아서 산 옷. 언젠간 맞겠지, 하고 산 옷. 세일해서 그냥 집어든 옷.

다 이유가 있었다. 버리지 못한 것들엔.


나는 꽤 오랫동안 뭔가를 쌓아두며 살았다.

물건뿐이 아니었다.

"그냥 넘어가자." "내가 참으면 되지." "어차피 말해봤자."

이것도 쌓아뒀다. 마음속 제일 안쪽 서랍에. 꾹꾹 눌러 담고, 닫아두고, 잊은 척했다.

근데 서랍은 정직하다. 넣은 만큼 찬다. 언젠간 안 닫힌다.

쓰레기봉투가 두 개, 세 개.

버릴수록 방이 넓어졌다. 숨이 트였다.


근데 이상하게 슬펐다.

버려진 것들이 불쌍한 게 아니었다. 저걸 쥐고 있던 내가 불쌍했다.

비워지는 게 무서웠던 것 같다. 꽉 채워야 괜찮은 사람인 것 같았던 거다. 어딘가.


눈물이 난 건 10년 전 다이어리를 열었을 때였다.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해야 할 일. 되어야 할 모습. 갖춰야 할 것들.

마흔의 나는 이래야 한다. 이쯤은 이뤄야 한다. 이 정도는 돼있어야 한다.

열 살 어린 내가 정해놓은 기준들.

그 기준들 중에서 내가 맞춘 게 얼마나 되나. 세어봤다.

다이어리를 봉투에 넣었다.


잠깐 딸 방 문을 열어봤다.

아까보다 더 조용했다. 비운 내 방이랑 비어있는 딸 방이랑. 집이 한꺼번에 텅 빈 것 같았다.

근데 이상하게, 그 텅 빔이 무섭지 않았다.

딸은 대학생활을 잘 하고 있고. 아들은 학교에서 제 삶을 살고 있고. 나는 여기, 이 방 한가운데에 있었다.

아무것도 없이도 — 있었다.


그때 알았다.

내가 물건을 못 버렸던 이유가 미련이 아니었다는 걸. 두려움이었다는 걸.

비워지면 초라해질 것 같은. 없어지면 아무것도 아닐 것 같은.

근데 막상 버리고 나니까, 사라진 건 물건뿐이었다. 나는 여기 있었다.


그 뒤로 가끔 서랍을 열어본다.


마음속 거기.

오래된 서운함, 못다 한 말, 참았던 것들. 아직 있다. 다.

근데 이제는 조금씩 꺼낼 수 있을 것 같다.


정리정돈이 원래 그런 거 아닐까. 한 번에 다 끝내는 게 아니라, 조금씩, 자꾸, 들여다보는 것.


오늘도 서랍 하나를 열었다.

비울 수 있을 것들을 찾아보려고. 아직 무거운 것들은 그냥 좀 더 두려고.


조금 덜 무거운 오늘이면 충분하니까.

버리고 나서야 보였다. 채우는 데 급급해서 못 봤던 것들이. 비워진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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