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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imco Oct 29. 2017

업무 공간에서 UX가 중요한 이유

업무 공간에서 벌어지는 사람들의 행동과 심리에 대한 이야기

설계자의 의도대로 움직이지 않는 사람들

현재 근무하고 있는 업무 환경에 어느 정도 만족하는 편이다. 일단 완공된 지 5년밖에 안 된 새 것이기도 했고 개인적으로 '비트윈'으로 불리는 공용 공간이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동료에게 들은 얘기는 나에게 적잖은 충격을 주었다. “비트윈 도대체 뭐하는 공간이야? 아무도 거기서 미팅 갖지 않고 잠만 자는 곳이잖아.”

'비트윈'으로 불리는 공용공간


다른 직원들이 비트윈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그들이 실제로 이용하는 비트윈은 다음과 같았다.


마음 놓고 쉬거나 수면을 취하기엔 층계를 오르내리는 사람들의 발소리나 시선이 불편하다.

휴식을 취할 수 있는 부스가 너무 부족하다.(그렇다고 소파에서 자기엔 누가 볼까 봐 신경 쓰인다.)

여기서 한 번도 미팅을 갖거나 협업의 장소로 이용한 적 없다.

여러 층을 한 번에 내려가고 싶은데 한 층을 더 내려가려면 반대쪽 비트윈으로 건너가야 해 너무 불편하다.


비트윈은 층마다 남측과 북측에 하나씩 있다. 사옥의 연면적 중에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경영자는 공용 공간 대신 업무 공간으로 가득 채워 수용 인원과 임대 수익을 높일 수도 있었다. 아마 공용 공간을 두었을 때 직원들에게 어떤 변화를 기대했고 결과적으로 생산성을 높인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어떤 변화를 이끄는 행동은 '우연적 만남' '휴식'이었을 것이다. 서로 다른 부서의 사람들이 우연히 마주쳐 시너지가 생기고 아이디어가 샘솓는 오피스.
하지만 실제 사용 패턴을 들여다보면 커다란 회의 테이블과 길어진 계단 동선이 제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휴식하기에도 마땅치 않다는 것을 보면 설계자의 의도와 사용자 사이에 분명한 간극이 있었다.

왜 이 같은 일들이 벌어질까?




영역을 구분 짓는 기준 '시선'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자신만의 독립된 공간을 갖길 원한다. 하지만 물리적으로 분리된 공간을 갖지 못할 때는 ‘시선’으로 공간을 구분 짓기도 한다. 타인의 시선이 차단되면 공간은 개인 영역의 성격을 띤다. 반대로 여러 시선이 존재하는 공간은 공유 영역으로 인식된다.


사람들이 공간을 점유해가는 과정

대학생 때 개인 과제로 간단한 실험을 했었다. 50여 명의 학생들이 한정된 칸막이 개수를 가지고 210㎡의 공간을 점유하는 과정을 관찰하고 촬영했다. 새 학기가 되면 강의실 안의 모든 것을 드러내 청소를 한 후, 새로운 인원들이 한 학기 동안 작업할 자리를 확보하는 식이었다. 다른 복합적인 요인들이 작용했겠지만 '시선'을 주제로 점유 과정을 다이어그램화 했다.
(1) 우선권이 있는 학생들은 입구에서 먼 구석과 기둥 주위 영역을 선점한다.
(2) 먼저 점유된 영역의 칸막이를 활용해 개인 영역을 확보해간다.
(3) 구석과 변두리는 모두 채워지고 점점 중앙 부분까지 확장된다.

학생들이 작업 공간을 점유해가는 과정 (2013)


마치 바둑의 집 형성 과정과 흡사했다. 같은 6집을 짓는데 A는 5개의 돌만 필요하고 B는 7개 C는 10개의 돌이 필요하다. 그래서 보통 공수가 덜 들어가는  A → B → C 순으로 집을 짓게 된다.

'자기 영역(집)을 만들기 쉬운 곳부터 점유'


칸막이의 개수가 한정적이다 보니 가운데 학생들은 자신마다 허용할 수 있는 시선침해량(threshold) 내에서 타협해갔다. 만약 두 명이 등을 맞댄 상태로 앉는다면 사이에 칸막이가 없어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또 안정감을 위해서는 상대방과 일정 거리를 필요로 하지만 칸막이의 높이(시선의 차단율)에 따라 그 거리는 줄어들었다.

느낀 것들을 요약하자면 밀도가 높은 사무 공간일수록 영역의 성격이 결정되는데 '시선'이 중요하겠다는 것과 개인마다 정도가 다를 뿐 최소한의 프라이빗 영역 확보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넓은 책상과 편안한 의자여도 자신만의 영역으로 규정짓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고 불안감을 느끼지 않을까.

모든 학생들이 각자의 영역을 확보한 모습 (2013)



칸막이 없는 업무공간이 실패한 이유

고층 빌딩의 등장과 업무 공간의 변화

엘리베이터와 철골 구조 기술의 발전으로 고층 오피스 빌딩들이 등장했다. 초기의 업무 공간은 행과 열을 맞춘 책상들로 가득 차 있었다. 사무직 노동자들은 점점 수가 늘어났고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오피스 빌딩 안에서 보냈다. 일부 디자이너와 공학자들은 과거의 단순 노동이 아닌 '지식' 노동의 생산성을 높이려면 업무 공간이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빌딩에 둘러싸여 고민하는 중.. [출처]Rob Gonsalves


기능주의적 사고방식이 가져온 실패

20세기 중반 미국에서 기존의 획일적인 업무 공간을 바꾼 시도들이 있었다. 오픈 오피스(넓은 공간에 칸막이 없는 책상이 자유롭게 배치된 계획)와 액션 오피스(이동식 칸막이와 조립형 책상)가 대표적이다. 하지만 새로운 시도들은 정착하지 못했고 다시 칸막이형으로 돌아갔다. 난 당시 설계자들 사이에 팽배했던 기능주의적 사고방식이 실패 원인 중 하나였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고안한 업무 공간이 사람들의 행동을 바꿀 수 있다고 맹신했고, 사용자들의 의견을 듣기보다 자신들의 이론에 집중했다. 사람의 신체와 행동 범위를 고려한 설계였지만 감시당하기 싫고 프라이빗한 영역을 원하는 사람의 감정적 욕구를 간과했다.


공간의 형태만큼 중요한 프로그램의 중요성

현재로 돌아와 보자. 신경 건축학이란 학문이 등장한 것처럼 공간이 사람의 행동과 심리에 영향을 주는 요인인 것은 과학적으로 입증된 사실이다. 하지만 다른 요인들과 비교하면 어떨까? 직원들 간에 우연한 만남을 촉진하고 관계 형성에 효과가 있었던 것은 사무실 동선 계획이 아니라 강아지를 데려와도 된다는 정책이었다는 구글 직원의 말처럼 사람들의 행동에 결정적인 변화를 주는 것은 공간 계획보다는 소프트웨어적인 요인이 더 클지도 모른다.



UX를 고려한 업무 공간은 어때야 할까?

사람들은 그날 그날 감정과 컨디션에 따라 집중력과 업무 효율성이 다르다. 또 같은 부서 안에서도 업무 시간과 업무 형태는 점점 다양해지고 있다. 이런 유연성을 수용하려면 집중할 수 있는 프라이빗한 공간과 협업을 위한 공간이 공존해야 한다.

또 지정된 영역에 오래 묶여 있으면 집중력이 떨어지거나 심리적 부담을 느끼는 사람들을 위해 어디든지 자유롭게 앉아서 일할 수 있는 공간도 필요하다. 어느 날은 독서실을 갔다가 어느 날은 북적이는 카페를 찾게 되는 것과 비슷하다.
마지막으로 업무 공간은 직원들의 '오피스 라이프'를 규정하고 강제하기 보다 다양한 프로그램들이 생겨날 수 있게 열려 있어야 한다. 이렇게 사용자의 감정적 욕구가 반영된 디자인에 한해서 형태는 제 역할을 할 수 다.


사람들이 공간을 점유하는 과정에 대한 내용은 설계된 실험 보다는 개인적인 관찰에 가깝습니다.
업무 공간의 역사와 관련된 내용은 Nikil Saval의 저서 '칸막이 사무실의 은밀한 역사'를 참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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