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건축학도가 되돌아본 20대
20대가 끝나기 전에 그동안 어떤 고민들과 선택들을 해왔는지 써보고 싶었습니다. 지나간 생각들을 되돌아보기 위한 것도 있겠지만, 저와 비슷한 고민을 했었거나 하고 있는 건축 전공 친구들과 생각을 나눠볼 수 있다는 게 더 큰 이유입니다. 글을 시작하면서 조심스러운 점도 있습니다. 서툴었던 20대의 선택과 고민들에는 '제가 정말 하고 싶은 일'만이 아닌 주변의 시선, 현실적인 문제도 작용했습니다. 때문에 이 글이 조언이나 유익한 정보 전달로서는 무리가 있어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구나..' 정도로 읽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__)
결론부터 말하면 난 건축설계를 전공하고 UX분석 기획 디자인 분야에서 커리어를 시작했다. UX는 사용자경험이란 뜻인데 어떤 제품이나 서비스를 사용하는 유저가 느끼는 총체적인 경험을 설계한다고 보면 된다. 따지고 보면 건축가도 건축물UX디자이너라고 할 수 있지 않나? 그래서 흔히들 말하는 '탈-건'까지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전공을 무지 좋아했는데 그 안에서 내가 가진 강점을 열심히 찾던 중 여기까지 오게 된 것 같다. 말이 길어졌다. 더 장황해지기 전에 시간의 흐름 순으로 목차를 적어봤다. 내용이 많아지면 서너 편으로 연재할 생각이다.
01. 건축 잘 배우기(내가 얻은 것과 놓친 것들 그리고 경계할 것들)
02. 꼭 건축일 필요 있을까?
03. 건축 말고 뭘 할 수 있을까 (건축과 접점이 있는 분야들)
04. 새로운 출발 (조급해서 실패했던 경험들, 건축을 떠나고 새롭게 알게 된 것들)
01. 건축 잘 배우기
스무살, 건축학과에 입학하자마자 별다른 고민 없이 전공에 매료되었다. 디자인적 사고 능력을 기르기 위한 목적으로 1학년 때 재밌는 프로젝트가 많기 때문이다. A4용지로 2kg 버티기, 몸에 장착하는 구조물 만들기, 프라모델을 분해해서 새로운 형태로 만들기, 변형되는 가구 만들기 등의 프로젝트들은 교수님들의 '건축은 종합 예술이다. 모든 공학과 디자인의 시초는 건축이다.'라는 말들을 대변해주는 것처럼 느꼈다. 그러다 보니 밤샘 작업으로 행색은 초라해도 건축을 배운다는 것에 자부심이 생겼었다. 당시 난 학부과정이 5년 제인 것도 멋있다고 생각했다(...)
아무튼 난 저학년 때 밑도 끝도 없이 건축에 취하는 것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편이다. 일학년 때부터 '전공 선택을 잘한 걸까? 내 적성에 정말 맞는 걸까?'라고 고민하면서 결단 내리지 못했던 친구들은, 계속 남아 끝까지 고민하고 방황했다. 반면에 금방 건축에 푹 빠져서 열정적으로 달려들었던 친구들은 현재 건축을 하든 다른 분야로 나갔든 간에 자기가 구체적으로 세운 플랜을 실행해가고 있다. 왜 그럴까 생각해보면 학부 커리큘럼 안에 건축 전문 지식보다 더 중요한 게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내 생각에 그걸 잘 빼먹고 자기 것으로 소화했다면 나중에 선택할 분야는 건축, 제품, 영상, 자동차, IT 무엇이 되든 늦지 않다고 본다.
건축 배경 지식 외에 내가 얻은 첫 번째는 디자인을 할 때 컨셉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메타포를 반영한다고도 하는데, 외형적으로는 닮지 않은 두 개의 오브제 사이에 기능적 유사성이나 내적 성질의 연관성을 발견하고 디자인에 반영하는 것이다. 그 과정이 논리적일 때 혹은 예상치 못한 형태를 만들어낼 때 좋은 작업물이 나왔다.
여기서 내가 아쉬웠던 것이 있다면 '이미지 위주의 리서치'였다. 좋은 컨셉을 찾는 과정은 고되고 언제 끝날지 몰랐다. 그래서 마음이 급해지면 마음에 드는 형태부터 찾게 됐다. 어차피 적절한 컨셉을 발견해도 그것을 건축 형태로 발전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거꾸로 컨셉을 형태에 끼워 맞추게 되고 특정 오브제의 외형적 특징만 가져온 상태에 머물게 된다. 이렇게 이미지 검색과 스크랩에 익숙해지다 보니 나중에 아무리 좋은 컨셉을 발견해도 과거에 꽂혔던 형태를 벗어나기 힘들었다.
경험상 애착이 가고 많이 배웠던 프로젝트들은 이미지에서 영감을 얻은 게 아니라 우연히 읽었던 텍스트에서 온 경우가 많았다. 만약 다시 학부 시절로 돌아간다면 이미지 검색에 쏟은 열정과 시간을 사회과학, 심리 분야의 책 한 줄 더 읽는데 쓸 것 같다.
두 번째는 프로토타입을 활용한 디자인 프로세스이다. 어떤 분야든지 창의적인 일에 프로토타이핑의 중요성은 날로 부각되고 있기 때문이다. 건축 설계 수업은 매주 두 번씩 모형과 도면을 가져가야 했기 때문에 '손으로 하는 사고방식'에 점차 익숙해질 수 있었다. 가져간 모형과 도면으로 피드백을 얻고 다음 모형을 가져가는 사이클이 십 여번 반복되다 보면 프로젝트 마감일이 금방 다가왔었다.
경계해야 할 것은 매번 독립된 프로토타입을 가져와 튜터가 원하는 게 나올 때까지 던져보는 방식이다. 튜터는 단지 한정된 크리틱 시간 동안 프로젝트 방향만 잡아주는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튜터의 선호에 의존하다 보면 나중에 일관성 없이 독립된 모형들만 쌓이고 최종 결과물은 프로토타입 수준에 그치는 경우가 생겼다. 마음에 안들어해도 최악만 아니면 계속해서 발전시켰어야 했다. 튜터도 지나온 프로세스가 눈에 보이니 뒤엎거나 안 좋은 평가를 주진 않았을 거다.
한 가지 더, 3D모델링 툴 공부를 소홀히 했던 게 아쉽다. 생각을 손이 아니라 3D모델링으로도 빠르게 구현할 수 있었다면 형태를 비정형으로 발전시키는데 제약이 없었을 거다. 빠른 손만 믿고 여유 부리다가 나중에 크게 후회했다. 손이 못하는 생각을 3D툴로 구현하는 능력은 정말 중요하다.
세 번째는 디자인 경쟁에서 이기는 전략이다. 난 크고 작은 공모전에 많이 참가하는 편이었는데 건축 설계의 독특한 공모 과정에서 배운 것이 있었다. 내 기억에 학생 공모전의 대부분은 커다란 패널에 디자인 프로세스와 일부 도면 그리고 CG를 넣어서 제출했다(물론 온라인 제출, 모형 제작, PT가 있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심사위원들이 한 장소에 모여 한정된 시간 안에 몇 백장의 패널들을 걸러낸다. 그러다 보니 눈에 띄기 위한 시각화에 힘을 쏟을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하면 내 제안이 돋보일까?' '어떻게 하면 설득력 있어 보이고 읽어보고 싶게 할까?'에 신경 썼다. 각자 전략이 달랐겠지만 나의 경우 의도적으로 투시도, CG에 힘을 주지 않았다. 대신 도면의 도식화나 컨셉의 도식화를 투시도처럼 크게 넣으니까 효과가 좋았다. 너도 나도 투시도를 강조하다 보니 그중 이상하게 눈에 띄었나 보다. 몇 백점을 심사해야 하는 평가자 입장에서는 큰 개념이 몇 초안에 파악되는 제출물에 한해서 세부 내용들을 들여다볼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 아쉬웠던 점은 공모전 수상이 목적이다 보니 독특한 컨셉과 시각화에만 힘을 쏟게 되었다. 그래서 현실 적용성을 고려하지 못했고 논리 비약이 심했다. 프로토타이핑 과정을 많이 거치지도 않기 때문에 운 좋게 큰 상을 받은 프로젝트도 깊이가 없었다. 확실히, 공모전 수상에 집착해서 지나친 시간과 에너지를 쏟은 것은 낭비였다.
네 번째는 다수의 팀 프로젝트 경험이다. 회사는 일반적으로 혼자 잘하는 사람보다 커뮤니케이션과 협업을 잘하는 사람을 선호한다. 건축 설계 수업이나 공모전 특성상 2인 혹은 3인으로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미리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퍼포먼스를 올려주는 팀원이 되어갈 수 있다.
나의 경우 팀플레이 경험이 쌓이면서 그나마 나아지긴 했지만 가장 어려웠던 것 중 하나였다. 아쉬웠던 것은 대부분 성향이 맞는 사람이나 이미 서로 강점을 잘 아는 사람과 팀을 해와서, 팀 빌딩과 리딩 그리고 상황 대처 능력을 배우는 데는 부족했던 것 같다.
앞에서 난 '저학년 때 밑도 끝도 없이 건축에 심취하는 것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편'이라고 썼다. 따지고 보면 01. 건축 잘 배우기에서 얻은 것들은 그 약빨이 한 몫했다. 그 과정에서 내가 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것을 찾았었다. 하지만 학년이 올라가면서 다른 분야 책에 손이 가기 시작하더니 3학년을 마칠 때쯤 건축에 대한 생각이 달라진 것 같다. 그래서 다음 연재에는 내가 찾은 강점을 살려 정말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그리고 당시에 어떤 고민들을 했었는지 써 볼 예정이다.
<다음 글 목차>
02. 꼭 건축일 필요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