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의적 사유는 대충에서 온다
수신인: 완벽한 등산 장비를 갖추고, 최적의 코스를 짜느라 결국 산에 오르지 못하고 있는 당신에게
대표 문장: “‘대충’은 게으름이 아니라 용기다. 불완전한 상태에서라도 시작하겠다는 결단이다.”
편지 도입부: 북한산 쪽두리봉 바위에 앉아 땀을 식히고 있습니다. 사실 오늘 아침, 준비가 안되었다는 이유와 귀찮음을 핑계로, 침대에서 안 일어나고 꼼지락거렸습니다. 하지만 '에라 모르겠다'는 마음으로 집을 나섰고, 지금 저는 더없이 행복합니다. 때로는 '대충' 시작하는 용기가 가장 완벽한 계획임을 이 바위 위에서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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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아침,
나는 침대에서 한참을 꼼지락거렸다.
전날에 북한산을 가려고 계획했었다,
별다른 준비가 필요하지 않아도 될 수 있는 곳으로 정했다. 가볍게 나서려고 했는데 막상 가려고 하니 귀찮다. 날씨도 애매했다. 구름이 꽤 껴 있었다.
지금 가면 점심 먹기도 애매한데, 그럼 먹을 걸 챙겨야 하나, 아, 점점 더 귀찮아 지고 있다. 이런 상태로 출발하면 중간에 후회하지 않을까. 그렇게 핑계를 만들며 시간을 흘려보냈다.
그러다 문득 '에라 모르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일단 나가자. 부족한게 있으면 그때 가서 생각하자. 집을 나섰고, 걸었고, 땀을 흘렸다. 그리고 지금, 쪽두리봉 바위에 앉았다. 구름 사이로 비치는 햇살이 여유롭고, 등을 식혀주는 바람은 부드럽다. 더없이 편안하고 평안하다.
완벽한 준비를 기다렸다면 나는 여전히 침대에 누워 있었을 것이다. 결국 완벽은 오지 않았을 것이고, 하루는 그냥 지나갔을 것이다. 그러나 대충이라도 시작했기에, 지금 이 순간이 있다. 때로는 '대충' 시작하는 용기가 가장 완벽한 계획임을 이 바위 위에서 깨닫는다.
나는 여기서 '대충'이라는 단어를 꺼내고 싶다. 보통 대충이라 하면 허술하고 게으르고, 무책임하다는 부정적 의미로 읽힌다. 그러나 그 단어에도 다른 층위가 있다. 대충의 '대(大)'는 크다는 뜻이고, '충(充)'은 채운다는 뜻이다. 대략적으로 채워진 상태. 완벽하지 않아도, 준비가 조금 모자라도, 살아가면서 수정하고 보완할 수 있다는 태도로의 전환. 이 대충은 게으름이 아니라 용기다. 불완전한 상태에서라도 시작하겠다는 결단이다.
완벽을 추구하는 사람은 끝없이 준비한다. 그러나 준비가 끝나는 순간은 오지 않는다. 완벽은 늘 어딘가 부족하다. 결핍의 그림자가 뒤따른다. 그래서 완벽은 불안을 데려오고, 두려움을 불러온다. "아직 부족해. 조금만 더 준비하면..." 이 말은 영원히 반복된다. 그사이 시간은 흐르고, 기회는 사라진다. 완벽주의자의 책상 서랍에는 완성되지 못한 원고들이 쌓여간다.
반면 대충은 그 결핍을 끌어안는다. 부족함을 인정한 채 움직인다.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원석으로도 세상과 부딪친다. 그러다 보면 현실의 마찰 속에서 새로운 형태로 다듬어진다. 세상이 교정해주고, 피드백이 방향을 잡아준다. 그러니 대충은 결코 무책임의 언어가 아니다. 오히려 완벽의 허구를 벗겨내는 정직한 태도다.
생각해보면, 창의란 언제나 불완전에서 비롯되었다.
고흐의 붓질은 거칠었고, 피카소의 형태는 일그러졌다.
그들이 완벽한 기법에 집착했다면, 그 독특한 화풍은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학문도 마찬가지다. 새로운 이론은 기존 체계의 빈틈을 발견한 자에게서 나온다. 완벽해 보이는 논리의 균열을 문제 삼고, 그 불완전함 속으로 뛰어든 자에게서 혁신이 태어난다.
물론, 이 '대충'은 아무렇게나의 다른 이름이 아니다.
아무렇게나의 대충은 방임이지만, 내가 말하는 대충은 '충분한 대충'이다. 어느 정도 준비되었다면, 완벽하지 않아도 일단 세상에 던져보는 것. 70%의 완성도로도 시작할 수 있다는 판단. 불안한 채로, 미완인 채로, 그러나 정직하게. 그 불안과 미완이야말로 생동감의 원천이 된다.
나는 이 태도를 삶에 대입해본다.
일터에서, 관계에서, 글쓰기에서. 늘 완벽을 기약하며 멈춘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러나 멈춤은 완벽을 데려오지 않았다. 오히려 대충이라도 쓰기 시작한 문장이 새로운 문단으로 이어지고, 그렇게 완성된 글이 다시 사유를 낳았다. 삶도 마찬가지다. 대충의 발걸음이 쌓여 길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완벽을 포기한다. 대신 대충의 태도를 선택한다.
그 대충은 느슨함이 아니라 용기다.
그 용기가 창의로 이어지고, 창의가 새로운 삶의 길을 연다.
완벽이라는 신화에 갇혀 시작조차 못 하는 것보다, 대충이라도 움직이는 편이 낫다.
어쩌면 그것이, 삶을 살아내는 가장 정직한 방식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