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에 남는 감각, 배럴이라는 세계

만년필의 배럴에 대해서

by Concept Varia

만년필을 오래 쓰다 보면,
어떤 펜은 이유 없이 편안하고
어떤 펜은 이유 없이 불편하다.

그 차이를 설명하려다,
‘배럴’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펜의 몸통.
우리가 가장 오래, 깊게, 반복해서 마주하는 부분.
그곳에 펜의 본질, 그리고 나의 감각이 숨 쉬고 있었다.


굵기, 길이, 손끝의 긴장

나는 굵은 펜을 오래 쥐고 있을 수 없다.
몽블랑 149나 세일러 KOP(1.5cm) 같은 대형기들은
마치 손에 힘을 주어야만 겨우 잡히는 무언가처럼 느껴졌다.

과유불급이라 했던가.
펜이 손을 지배하는 듯한 역설적인 감각.

반면 몽블랑 145, 그라폰 파버카스텔, 몬테그라파처럼
얇은 펜은 지나치게 가벼워 손에서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잡히지 않아서 불편했고,
그래서 집중이 흐트러졌다.

손이 펜을 쫓는 동안, 사유는 길을 잃었다.

적당함이 있다면,
몽블랑 146(1.3cm)과 오로라 88 오탄도트,
그리고 그보다 조금 더 굵직한 오로라 옵티마(펠리칸 M800과 같은 1.35cm) 정도였다.

이 펜들은 손 안에서 유순하게 놓였다.
각자의 이유로,
하지만 모두 불필요한 긴장을 만들지 않았다.

손끝의 긴장이 풀리는 순간,
비로소 펜은 나의 일부가 된다.


길이도 중요하다

나는 캡을 뒤에 꽂지 않고 쓰는 편이다.
그래서 바디가 짧으면 불편하다.

손이 펜을 놓칠까 봐 자꾸 의식하게 되고,
그 의식이 손끝에 힘을 만든다.

세일러 프로기어 21K는 참 좋았지만,
그 짧음이 아쉬웠다.
글을 쓰는 내내 약간의 불안감이 맴돌았다.

펜의 길이는
어쩌면 나의 내면적 안정감의 척도일지도 모른다.


형태, 곡선이 만드는 관계의 변주

형태는 시가형이 가장 안정적이었다.
몽블랑 146, 오로라 88 오탄도트.
손에 감기는 느낌이 유독 부드러웠다.

확실히 손안에 꼬옥 쥐어지고
안정감이 훨씬 높았다.

반면 옵티마나 펠리칸 M800처럼 통통한 바디는
쓰는 맛은 있지만
오래 쥐고 있으면 살짝 버겁다.

참 이상하다.
펠리칸 M640은 같은 회사인데 시가형이어서인지
오히려 편했다.

이 작은 곡선 하나가
손과 펜의 관계를 바꿔놓는다.

형태는 단순한 디자인을 넘어,
감각의 지형을 재구성하는 변주다.


각진 배럴의 낯선 친밀감

워터맨 익셉션처럼 각진 배럴도 있다.
배럴은 네모나지만 그립은 둥글다.
그래서 놀랍게도 쥘 때 어색함은 없다.

오히려 시각적인 개성이
손에 전해지는 느낌이 있다.

펜이 아니라
하나의 조형물처럼 느껴진다.

손끝에서 시작된 시각적 파격은,
펜을 단순한 도구에서
예술적 대상으로 승화시킨다.


재질, 아날로그적 감성의 온도

재질은 대부분 레진이다.
무난하고 예쁘고, 손에 잘 감긴다.

하지만 셀룰로이드나 에보나이트, 원목이 주는 질감은 다르다.
특히 원목.

겨울날, 펜을 쥐었을 때 차갑지 않다는 감각.
손에서 덜 미끄러지는 느낌.
그리고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아날로그적인 감정.

손에 쥐어지는 아날로그적 감성이
만년필의 감성과 하나로 매치된다고나 할까.

재질은 단순한 물성이 아니라,
펜이 가진 온기와 역사를
손끝으로 전이시키는 매개다.


무게, 사유를 누르는 중력

무게는 또 다른 이야기다.

계속 글을 쓸 땐
다소 가벼운 만년필이 편하다.

하지만 생각 없이 낙서를 하거나,
메모를 남길 땐
묵직한 펜이 좋다.

그 무게가 오히려 나를 눌러주고,
그 눌림 속에서
어떤 사유가 피어나기도 한다.

만년필의 무게감이
내 생각과 사유도 깊어지는 것 같기도 했다.

펜의 무게는 단순한 물리량이 아니다.
그것은 사유를 응축하고,
내면의 중력을 조절하는 파격적인 도구다.


배럴, 감각의 중심이자 존재의 선택

결국 배럴은 기술적 완성도가 아니다.
쥐었을 때 내 안에서 일어나는 감각.
그 감각이 오늘의 나와 얼마나 잘 어울리는가.

만년필은 하루에 한 자루를 고르는 일이 아니다.
지금의 나,
이 순간의 기분,
쓰려는 문장에 따라 달라지는 손끝의 선택이다.

배럴은 펜의 몸통이지만
때로는 내 감각의 중심이 되기도 한다.

펜을 쥐는 행위는,
결국 나 자신을 쥐는 행위다.

배럴은 그 감각의 경계에서,
나의 존재를 끊임없이 변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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