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일러 KOP 데몬스트레이터 만년필
감히, '펜의 왕'이라 칭하는 만년필이 있다.
세일러의 플래그십 모델, 프로기어 KOP.
그러나 첫 만남은 그리 매끄럽지 않았다.
대형기의 대명사 몽블랑 149보다 배럴은 더 굵은 듯하다.
그러나 뭔가 어색하고 불편하다.
세일러 프로기어 라인은 플랫탑 스타일이라 길이가 약간 짧다.
그 짧음이 손에 쥐었을 때 불편함을 느끼게 한다.
혹시 몰라 인터넷으로 제원을 찾아봤다.
세일러 KOP의 배럴은 몽블랑 149보다 약 1mm 더 굵다.
하지만 몽블랑 149의 제원은 펜샵마다 미묘하게 달라진다.
내 손의 감각만으로 판단하자면, KOP는 분명히 배럴이 더 굵고, 길이는 짧다.
나에게는 이런 형태가 약간 불편하게 느껴진다.
이러한 미세한 차이가 손에 미치는 영향은 생각보다 크다.
아마도 같은 제조사인 오로라를 비교해보면 알 수 있다.
내 손의 감각으로는, 시거형인 오로라 88 오탄도트가
플랫탑 형태인 오로라 옵티마보다 훨씬 더 손에 잘 감긴다.
완벽한 제원보다 중요한 건 손이 기억하는 감각이다.
익숙함은 그 어떤 논리보다 강한 기준이 된다.
손에 쥔 감각은 다소 불편하지만,
펜의 닙에서 흘러나오는 부드러움은 환상적이다.
비단신을 신고 구름 위를 걷는다면 이런 느낌일까.
지면을 닿을 듯 말 듯 스치며 지나가는 잉크는
파란빛의 문장으로 나타난다.
그 순간만큼은 손의 불편함은 잊히고,
오직 펜과 종이, 잉크가 만들어내는 마법 같은 접점에 몰입하게 된다.
몸통 크기가 큰 대형기인 만큼, 대형 닙을 장착했다.
보통 대형 닙은 낭창하고 푹신한 맛이 있지만,
KOP는 그렇지 않다.
세일러 슬림 21k가 ‘텁텁한 부드러움’이라면,
KOP 은장 모델은 부드러움 속에서도 사각사각거리는 청량함이 있다.
그 미묘한 차이는 나의 감각을 더욱 날카롭게 만든다.
데몬스트레이터 모델이라 잉크 색을 고르는 데 시간이 걸렸다.
세일러(Sailor)라는 이름에서 바다가 자연스럽게 연상됐다.
그 이미지를 펜 안에 담고 싶었다.
푸른빛이 선명한 워터맨 세레니테 블루를 주입했다.
투명한 배럴 속으로 파란 잉크가 흐르고,
그 순간, 작은 바다가 펜 속에 들어앉는다.
잉크 착색을 고려해 한 가지 색상만 사용하는 것도 좋은 전략이다.
다만 아쉬움도 있다.
펠리칸이나 오로라 데몬과 달리,
세일러의 데몬은 컨버터 방식이다.
잉크를 주입해도 푸른 잉크는 그립 부위에만 머물고
배럴에는 은색 컨버터만 보인다.
데몬 모델로선 옥에 티다.
컨버터 용량도 작고, B닙이라 잉크 소모가 많아
자주 충전해야 하는 번거로움도 있다.
그러나 그 불편함이 오히려 사유를 자극한다.
완벽하지 않음은 때로 더 깊은 여백이 된다.
컨버터 방식은 착색을 줄이고, 배럴 내부를 깔끔히 유지할 수 있다.
그 ‘단점’은 새로운 장점으로 변주된다.
나는 쓸 말이 있어서 펜을 꺼내지 않는다.
이 펜을 쓰기 위해 말을 만든다.
이 문장은 내가 펜과 맺는 관계의 본질을 가장 잘 드러낸다.
펜은 단순한 도구가 아니다.
그것은 사고를 촉발하고, 언어를 확장시키는 작은 엔진이다.
종이를 가리지 않고 부드럽게 나아가는 닙의 움직임 속에서,
나는 펜이 아닌 나 자신의 흐름을 느낀다.
그리고 그 흐름은, 오늘도 나를 쓰게 만든다.
‘펜의 왕’이라 부르기엔 망설여지지만,
글 쓰는 맛 하나만큼은 왕관을 씌워줄 만하다.
왕관의 무게를 품은 이 펜은
오늘도 내 손에서 나만의 감각으로,
새로운 언어의 경계를 넓혀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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