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을 때 가져갈 만년필?

최고의 펜을 넘어, 기억을 품은 펜의 의미

by Concept Varia

가끔 그런 기사를 본다.
"당신 생애 최고의 만년필은 무엇입니까?"
"죽을 때 가져갈 단 하나의 펜은 무엇입니까?"

말은 질문인데, 대개는 교묘한 광고의 탈을 쓴 홍보성 기사인 경우가 많다.
새로 출시된 한정판 모델이거나, 마니아들 사이에서 '레전드'로 불리는 특정 브랜드 펜을 이야기할 때가 많다.
그래도 그 쯤 되면 그 펜에 대해서 궁금해지기 마련이어서 새 위시 리스트에 올려 놓기도 하고,
음~~~ "나라면~~" 이라는 상상을 해보기도 한다.

지금껏 내 손을 거쳐 간 수많은 펜들 중에서
과연 어떤 펜을 '최고'라 부를 수 있을까.
그리고 또, 정말 마지막 순간까지 손에 쥐고 있을 단 하나를 고르라면,
나는 어떤 펜을 떠올리게 될까.



최고의 펜, 과거로 돌아가는 감각


'최고의 펜'을 고른다는 건
지금 이 자리에서 과거를 꺼내는 일이다.
내 서랍 속, 그리고 내 기억 속에 잠들어 있는 수많은 펜들 중에서
단 하나를 꼽아야 하니까.


어떤 펜은 필감이 유독 좋았다.
영화 속의 검객이 허공에서 검을 가르듯, 종이 위에 잉크를 뿌려내는 묘한 감각.
그 촉감은 손끝에서 시작해 눈으로 번졌고,
귀로는 들리지 않지만, 어딘가 묵직한 소리가 나는 듯했다.
속도와 압력을 다르게 해도 선은 흐트러지지 않았고,
조금 기울여 써도 펜촉은 무리 없이 따라왔다.
마치 손이 아니라, 마음이 먼저 움직인 것처럼.

그 펜으로 글을 쓸 때면
단어가 아니라 리듬이 먼저 떠올랐다.
생각은 따라오고, 손은 그걸 조용히 베껴 쓰는 느낌.
잉크는 마르기 전에 이미 문장이 되어 있었다.


어떤 펜은 디자인이 너무 예뻐서 보고 있는 자체를 즐기게 한다.
무언가를 쓰기도 전에, 그 곡선과 비례, 무게 중심 같은 것들이 먼저 시선을 사로잡는다.
빛을 반사하지 않고, 스스로 빛나는 쪽을 택한 재질.
광택보다는 깊이가 느껴지는 결.
겹겹의 레이어가 시간을 머금은 듯, 바라보는 각도마다 색의 인상이 달라진다.

공작처럼 눈부시고, 팔색조처럼 다채로운 셀룰로이드 소재의 이탈리아 펜,
원목에 우루시와 마키에 공법을 더해 전통을 살려낸 일본 펜,
절제된 아름다움과 실용적인 디자인의 독일 펜,
금세기 최고의 판매량이라는 파카 51,

역사 속으로 사라진 전설 같은 브랜드인 오마스, 그리고 그 후계자 ASC 만년필.


세월의 깊이를 더해가는 펜은 소유하는 것만으로도 만족감을 주고,
구하기 힘든 펜을 손에 넣었을 때의 짜릿함은
마치 미슐랭 스타 셰프의 숨겨진 레시피를 손에 넣은 듯한 기분이었다.

이 중 어떤 펜이 '최고'의 자리를 차지해야 할까?
고심하게 된다.
마치 수많은 아이디어 속에서 가장 선명하고 아름다운 컨셉 하나를 끌어올려야 하는 것처럼
선택에는 늘 망설임과 아쉬움, 그리고 깊은 여운이 따라붙는다.


죽을 때 가져갈 펜, 아직 미래의 이야기


그러나 죽을 때 갖고 갈 단 하나의 펜이라고 한다면,
현재에서 미래로 가고 있는,
도달하지 않은 과정의 이야기이다.


최고의 펜이 기능과 디자인적인 측면에 집중되어 있는 뉘앙스라면,
죽을 때 가져갈 단 하나의 펜이라는 것은 추억이라는 감성도 포함시켜야 한다.
그래서 이 질문엔 단순히 '기능'이나 '디자인'만으로는 답할 수 없다.


누군가에게는 중요한 유산으로 기억되는 물건일 수도,
혹은 결혼기념일에 받은 선물이거나,
입학이나 졸업, 승진처럼 인생의 전환점마다 곁에 있었던 펜일지도 모른다.
새로운 시작의 설렘과 성공의 환희를 함께 했던 펜은
단순한 필기구를 넘어, 그 삶의 중요한 이정표가 된다.

그동안 살아왔고, 앞으로 살아갈 동안,
각자의 소중하고 아름답고 의미 있는 개별적인 기억, 관계와 풍경이 생겨날 것이기에,
우리가 어떤 감정을 간직하며 살아가고 싶은지를 묻는 일이기도 하다.

'죽을 때 가져갈 펜'은
기억과 추억의 총합이고,
기능이 아닌 서사의 응축인 셈이다.


하나만 고를 수는 없다: 모든 펜을 사랑하는 이유


그런데,
아무리 신중하게 고르려 해도
세상엔 너무나 많은 펜이 있고,
나는 그 모든 펜을 다 써보지 못했다.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런데 감히 '최고의 펜'을 뽑는다는 건
'어딘가 이상'하게 만드는 말 중 하나다.

더구나 '단 하나'를 고르라니.
마치 서른 몇 가지의 맛이 나는 아이스크림 중에서
평생 단 하나만 먹으라고 한다면,
'어딘가 이상'한 말 아닌가?


펜도 마찬가지다.
그 많은 만년필들 중에서 어떻게 하나만 선택하란 말인가?
그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아니, 애초에 그렇게 할 생각도 없다.
세상에 그 많은 만년필 중에 하나만이라니.


손가락 깨물 듯이, 모든 펜을 데리고 간다


어떤 사람은 내가 물욕이 많다고,
욕심을 버리지 못한다고 말한다.

내가 가진 만년필은
잘났던 못났던 모두 내 애첩이고 내 자식들이다.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듯이,
내게는 모두 소중하다.

그래서 고르지 않겠다.
그냥 다 데리고 갈 것이다.

물욕이 많다고 욕하지 말고, 손가락질하지 말라.
이 정도 물욕은 기꺼이 감수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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