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의 태도에 대하여 — 만년필을 꺼내며

by Concept Varia

오래전부터 짧은 생각들을 적어왔다.
어떤 글은 여러 플랫폼에 내보내기도 했고, 어떤 글은 나 홀로 온전히 지니고 있었다.
시간이 흘러, 그중 몇 편을 다시 꺼내 다듬었다.

이제 그런 글들과 더불어, 최근에 손에 익은 소품들에 대한 단상들을
순서 없이, 내 뜻대로, 기분 따라 세상에 드러내려 한다.

그러니 이 공간에 오를 글들은
때로는 지난 시절의 문장이 될 수도 있고,
오래된 기억처럼 읽힐 수도 있을 거다.
하지만 그런 글일수록, 내 안에 더 깊이 남아 있던 것들이었다.

서랍 안에 잠들어 있던 만년필 하나를 꺼낸 것이 시작이었다.
잊었던 감각이 고요히 되살아났고, 거기서부터 다시 활기가 돌았다.

지금 내 곁에는
방출과 새로 들임을 거듭한 끝에
꽤 많은 수의 만년필이 남아 있다.

처음엔 닙이었다. 스틸에서 14k, 다시 18k와 21k로.
촉의 강도, 유연함, 종이 위에서의 미세한 떨림.
그 섬세한 차이가 내 손의 감각을 조금씩 바꾸었다.

그다음은 외관이었다. 플래그십 모델, 대형기, 한정판,
옻칠과 나전, 그리고 마끼에.
빛보다 느리게 반사되는 표면을 오래 들여다보는 일이 잦아졌고,
말없이 그 곁에 앉아 있는 시간이 길어졌다.

욕망은 집요했고, 욕심은 끝이 없었다.
새로운 것에 대한 갈증, 미지의 것에 대한 설렘.

그러나 이제는 수집을 멈췄다.
언젠가 또 마음이 바뀔 수도 있겠지만,
욕심이 덧없음을, 욕망이 끝이 없음을
어느 정도는 깨달은 나이.
그래서 지금은 멈췄다고 말할 수 있다.

이제는 자주 쓰는 것,
애정이 남은 것들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려 한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내 시선이 달라지자
그 물건들도 다르게 보였다.
어디에도 내세우지 않았던 품위, 손에 익은 균형감.

그것들은 처음부터 거기에 있었지만,
내가 조급할 때는 보이지 않았다.
멈추자, 중심이 보였다.

기록은 습관보다 태도에 가까웠다.
어떤 노트에는 특정 펜이 어울렸고,
어떤 종이는 잉크를 다른 흐름으로 받아들였다.
촉감, 소리, 여백의 밀도.

잉크가 스미는 결을 따라
생각도 함께 흘렀다.

그렇게 나는 '기록'이란 말 안에
'도구'와 '태도'와 '풍경'을 함께 품게 되었다.

나는 앞으로 만년필만을 말하려 하지 않는다.
잉크, 노트, 메모지, 가죽 파우치, 안경,
그리고 마 소재의 셔츠, 여름 바지, 오래 입은 청바지,
늘 어깨에 걸쳐 두는 재킷 하나까지.

결국 내 삶에 오래 머무는 것들은
모두 같은 결을 지녔다.

잘 쓰이고, 오래 쓰이고,
나를 닮아야 한다는 것.

무언가를 사는 일이 아니라,
삶의 태도를 고르는 일처럼.

이 공간에서는 그런 것들을 하나씩 꺼내 보이려 한다.
필기구든, 옷이든, 가방이든—
내가 그것을 어떻게 보고, 어떻게 손에 쥐고,
어떻게 오래 곁에 두는지를 말하려 한다.

그것이 패션이든, 사물 철학이든, 기록에 대한 사유든,
결국 중요한 건 하나다.

‘내가 고른 것’이 아니라
‘나를 만들어온 것’에 대한 이야기.

지금 이 글은 그 첫 문장이다.
서랍을 여는 첫 동작, 펜을 닦아내는 손끝,
페이지를 넘기는 조용한 움직임.
그리고 그 위에 써 내려가는 것들.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된다.
천천히, 그러나 단단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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