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의 기준을 누가 정했는가?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by Concept Varia

후쿠오카는 돈코츠 라멘의 성지다.
그곳에서 나는 라멘을 네 번이나 먹었다.
라멘을 좋아해서는 아니다.
음식점을 운영하는 사람으로서, 이곳에서의 구조와 리듬을 체험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맛은 짰다. 그것도 꽤 많이.
대체로 그랬다.
이것이 일본 라멘의 정석인지, 아니면 내 혀가 다르게 기억하는 것인지.
그 경계에서 문득, '맛'이라는 감각의 본질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우리는 하루 세 끼를 먹는다.


때론 배가 고파서,
때론 시간이 되었으니까,
그리고 또 정말 ‘맛있는 무언가’를 만나기 위해.

누구는 술 먹은 다음 날,

속을 달래기위해,

또 누군가는 뜨거운 여름 낮에 시원한 냉면을 찾아 나선다.

뜨거운 국물 한 숟갈이 목을 지나가고,
차가운 육수의 냉기가 얼굴을 스치며 올라올 때.
우리는 단순한 포만을 넘어, 설명되지 않는 안도감 같은 것을 느낀다.

그 감정은 어디서 오는 걸까.

단순히 허기를 채우는 행위를 넘어,

때로는 간절한 열망으로,

때로는 누군가에게 이끌려.

미식은 이제 단순한 생존의 문제가 아니라, 경험이자 문화가 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한 끼를 위해 줄을 서기도 하고,

미리 예약을 걸고,
비행기를 타고 다른 나라의 맛을 찾아 떠나기도 한다.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기분이 좋아진다고 한다.

그 말은 틀리지 않다.
하지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 맛’은 도대체 누가 정한 걸까?


음식 앞에서 우리는 아주 쉽게 ‘맛있다’, ‘별로다’라는 판단을 내린다.
그 감각은 언제나 본능적이고, 개인적이며, 주관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판단에는 많은 타인의 입김이 얹혀 있다.

유명 셰프가 추천한 맛집,
별 다섯 개를 받은 식당,
SNS에서 수천 개의 ‘좋아요’를 받은 메뉴.

우리는 이미 수많은 사람의 경험과 리뷰,
정해진 점수와 기준들 위에 내 감각을 포개고 있는 것은 아닐까.

마치 ‘맛’에도 정답이 존재하는 것처럼.


고대 그리스의 신화에 프로크루스테스라는 인물의 이야기가 있다.
그는 지나가는 여행자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와 ‘자기 침대에 딱 맞는 사람’인지 확인했다.

만약 침대보다 키가 크면 다리를 잘라냈고, 작으면 몸을 억지로 늘려 죽였다.

그 침대는 기준이었고, 그 기준은 곧 폭력이었다.

이 이야기는 그저 기이한 신화 이야기가 아니다.

지금의 음식 문화에 대한 이야기이다.

지금 우리가 따르는 ‘맛의 기준’ 역시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에 눕히고 있는 음식의 맛에 관한 이야기일지 모른다.


더 짜게, 더 달게, 더 기름지게.

자극이 강할수록, 소문은 빠르고, 반응은 크다.
매운맛은 ‘도전’이 되고, 설탕은 ‘중독’이 된다.
적당한 감칠맛이나 재료 본연의 담백함은 너무도 쉽게
‘심심하다’, ‘특색이 없다’는 말로 잘려나간다.

요즘의 맛은 ‘더 자극적인가’를 겨루는 전장이 되었다.
마치 혀를 잡아채는 듯한 강렬한 자극만이
‘맛있다’는 이름을 얻는 세상.

우리의 미각은 점점 더 둔해지고,
더 많이, 더 세게 자극을 줘야만 반응하는 구조가 되었다.

프로크루스테스는 어쩌면 칼이 아니라 설탕과 조미료,
불맛과 기름의 형태로 여전히 우리 안에 살아 있는 건 아닐까.


누군가 어떤 국을 맛보고 말했다.
“맛은 괜찮은데, 좀 심심하네요.”

이때 말하는 ‘심심하다’는
정말 맛이 없는 걸까, 아니면 익숙한 자극이 없어서일까?

나는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무언가 소중한 것이 쉽게 판단되고 있는 듯한 안타까움을 느낀다.

어떤 이의 기준에서는 그 ‘심심함’이야말로
오히려 오래 끓여낸 깊은 국물 맛일 수도 있다.

하지만 기준이 외부에 있을 때,
우리는 자신의 감각을 쉽게 의심한다.

다른 사람들은 ‘맛있다’고 하는데,
나만 별로인 건 아닌지.
혹은 내가 ‘맛있다’고 느꼈던 그 감각이
유행에 뒤처진 건 아닌지.

우리는 점점 스스로의 미각을 믿지 않게 된다.

지금의 음식 문화는
맛을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맛을 소비하는 방향으로 변질되어가고 있다.

맛은 원래 시간을 들여 배우는 것이다.
어린 시절엔 싫었던 음식이 어느 순간 입에 맞아오는 경험,
한 입 베어 물었을 때 입안에서 재료가 천천히 해석되는 감각.

그건 천천히 익히고, 천천히 감지하며,
내 안에서 새로운 미각을 탐험하는 여정과 같다.

어린 시절 먹던 멸치 칼국수가 그랬다.

맛은 비릿했고 어딘가 모르게 탁하고 쿰쿰했다.

국물 먹다 중간에 숟가락을 내려 놓기도 했다.

그런데 어느날은 달랐다.

비린 맛은 사라지고, 멸치의 느낌이 제대로 우러나서 속이 확 풀리는 느낌이었다.

아마 해장의 맛이었나 보다.

담백함이 오히려 여운을 주고 감칠맛을 주었다.

그날 이후, 그 멸치칼국수는 ‘맛’이라는 감각보다

내 안의 어떤 기억으로 자리하게 되었다.


하지만 지금은 너무 빠르다.
맛을 느끼기 전에, 이미 평점이 따라붙고
‘맛있다’는 단어가 소비되기 시작한다.

맛은 사라지고, 반응만 남는다.

이제는 생각해봐야 한다.
맛은 정말 그 자체로 살아있는 감각인가?
아니면 어떤 기준에 길들여진 하나의 반사 작용인가?

우리는 지금도 무의식적으로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위에 누워 있다.
길들여진 혀는, 자극 없는 음식 앞에서
‘덜하다’, ‘부족하다’는 말을 내뱉는다.

하지만 정작 부족한 것은
그 음식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잃어버린 감각일지 모른다.



침대에서 내려올 시간이다.

자극에 중독된 미각이 아니라,
느림과 균형, 그리고 나만의 기준을 회복할 수 있다면
우리는 다시 ‘맛있다’는 말의 의미를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거창한 선언이 아니라,
멸치칼국수 한 그릇에서 시작되는 일일지도 모른다.
한때는 너무 비릿하다고 느꼈던 그 맛이
이제는 조용히 나를 감싸고, 머무는 감각이 된다면.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정한 기준으로 음식을 느끼는 삶.

맛을, 다시 살아있는 감각으로 되돌리는 일.

이제는 그 침대에서 과감히 내려와,
나의 미각을 다시 깨우고, 나의 기준을 스스로 세우는 용기가 필요하다.











#맛의기준을누가정했는가

#프로크루스테스의침대

#외식업에세이

#미각의철학

#기준의폭력

#맛있는것과좋은것

#미식문화비평

#자극의시대

#느림의미각

#멸치칼국수의기억

#맛의기억

#감각의회복

#음식과문화

#식사의철학

#진짜맛이란무엇인가

#외식업브랜딩

#트렌드보다본질

#맛의자율성

#기록하는맛









작가의 이전글나는 왜 이 글을 쓰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