펜에게 말을 걸다

만년필 관리에 대해.

by Concept Varia

만년필을 쓰는 것.

한두 자루일 때는 특별할 것도 없었다.
잉크가 떨어지면 채우고,

잉크를 주입한 상태로 쓰지않고 오래 두지 말라는 말에
그저 자주 사용하려 했을 뿐.

그런데 펜이 어느 정도 늘어나자, 이야기는 달라졌다.
새로 들여온 펜에 밀려 예전 펜이 묵혀 있기도 하고,
애정도가 떨어지는 느낌도 들었다.

그때부터 나만의 관리 원칙을 세우기 시작했다.
그것은 펜을 다루는 방식이자,
어쩌면 나 자신을 다루는 방식이었다.


애정이라는 관리, 세척이라는 의식


애정을 담아 매일 사용하기.


단 한 줄의 글을 쓰더라도, 모든 펜을 최대한 매일 사용하려 한다.

“펜 관리의 가장 좋은 방법은 매일 사용하는 것”이라는 말은
단순한 조언을 넘어선, 어떤 관계의 본질처럼 들렸다.
살아 있는 존재에게 관심을 기울이듯,
펜에게도 나만의 호흡을 불어넣는 일.


잉크를 바꿀 때는 무조건 세척하기.


닙과 피드는 따로 물에 담가두고,
컨버터도 세척 툴을 사용한다.

캡 내부도 꽤 많은 잉크가 묻어 나고,
그 상태로 오래되면 잉크가 굳어버리기도 하기에
때때로 캡도 물로 간단히 세척하고 24시간 말린다.
(이럴 때는 펜이 많은 게 확실히 도움이 되긴 한다.)


세척은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니다.
잉크마다 점성도 다르고 화학 성분도 달라 잔여물이 남으면 좋지 않단다.

제조사가 같거나 비슷한 색이라면 세척하지 않고 사용해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유혹도 있었다.

그러나 이 모든 의문과 귀찮음을 넘어서기로 한다.
세척을 펜에게 바치는 나의 의식으로 만들었다.


장시간 사용하지 않을 때도 세척해서 보관해야 한다.

이 또한 미루기 쉬운 일이다.
그러나 이 또한 펜을 위한 최소한의 배려이자 약속이다.


펜의 외출, 그리고 인간의 불안


허약한 녀석들은 외출 금지.
특히 오로라 만년필.

화려하거나 특이한 녀석들도 외출을 자제시킨다.
몬테그라파, 데몬 스트레이터 같은 펜들이다.

이 원칙은 펜의 물리적 보호를 넘어선다.
소중한 것을 타인의 시선에서 숨기고 싶은 원초적인 감정이다.


아주 오래전 미팅 시,
주변에 필기구가 없어 몽블랑 145를 빌려준 적이 있었다.

“만년필이네요...” 하며
모나미 153 쓰듯이 아주 꾹꾹 눌러 쓴다.
그리고,

본인 옆에 놔두고 돌려주지를 않는다.
불안, 초조, 안절부절로 대화는 집중되지 못한다.


비슷한 경우가 최근에 또 한 번 있었다.


인터넷 등에서는 다른 사람이 한 번 써보자고 해서
빌려줬다 닙이 망가진 경우도 있고,

떨어뜨려서 망가진 경우도 있었다고들 한다.

그런 일은 아예 원인 제공 자체를 하지 말아야 한다.
펜이 망가질까 봐서가 아니다.
소중한 것이 타인의 무지나 무신경으로 인해 훼손될까 봐 느끼는 인간 본연의 불안감이다.


잉크의 선택, 그리고 존재의 조화


만년필에 맞는 잉크를 사용하는 것은 기본이다.
간혹 펄 잉크가 예쁘다고 해서 주입했다가 난처한 경우가 있다는 말을 들었다.

만년필에 적합지 않은 잉크는 피하는 편이 좋다.


프린터 잉크에 화학 약품을 첨가해 나만의 잉크를 만들 수 있다는 글을 본 적도 있고,
묽은 잉크나 가독성이 떨어지는 색상의 잉크에는

검은색 잉크를 한두방울 혼합해 특별한 색을 만드는 시도도 있다.

호기심은 생기지만, 내 펜의 생명을 위해 감히 엄두를 내지 못한다.


잉크는 펜의 피이자, 글의 영혼이다.

잉크의 선택은 단순히 색을 고르는 행위가 아니다.

펜의 본질을 이해하고,
그 펜이 가진 고유의 흐름에 맞춰 가장 조화로운 피를 찾아주는 일이다.

그것은 펜과의 깊은 대화이며, 균형을 이루려는 노력이다.


관리, 결국 나 자신을 다루는 일


이렇듯 별것 아닌 관리들이지만, 내게는 모두 같은 무게로 다가온다.

비싸고 쌈을 가리지 않고,

새 펜과 오래된 펜 사이에 선을 긋지 않는다.

펜을 오래 쓰고 싶다.

그 말 안에는,

오래 기억하고 싶다는 마음도 함께 있다.


관리는 결국 기록의 방식이다.

어떤 것을 어떻게 대했는지가 기억의 방향을 결정한다.

만년필을 관리하는 건 펜을 아끼는 일이면서,

그 펜을 쥐고 있는 나 자신을 돌보는 방식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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