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플래그십'을 찾아가는 변주곡
플래그십이라는 단어는 언제부턴가 스스로의 가치를 외치는 마케팅의 문장이 되었다.
최고가 아니라도, 최다 판매가 아니라도, '플래그십'이라는 이름은 붙는다.
그렇게 선언된 ‘얼굴’은 종종 소비자의 시선에 맞춘 포즈일 뿐이다.
정말 그 이름에 걸맞은가? 최고는 누가 정하는가?
만년필을 쓰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펜촉에서 흐르는 잉크의 감촉이 손에 익어가고, 감각이 손을 통해 뇌에까지 올라올 무렵,
더 좋은, 더 특별한, 더, 더, 더에 대해 시선을 돌리게 되었다.
브랜드의 유래, 닙의 종류, 잉크의 성질을 하나씩 탐험하다 보면, 한번 쯤 거쳐가는 지점이 있다.
바로 각 제조사의 플래그십 모델.
사전적으로 플래그십은 대장선, 지휘선에서 유래한 말이다.
오늘날에는 각 회사가 보유한 가장 대표적이고 상징적인 제품을 지칭한다.
가장 비싸거나, 가장 인기가 많거나, 가장 오랜 역사를 가졌거나. 그 기준은 제각각이다.
결국 플래그십이라는 말은 기업의 정체성을 '전시'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그 전시는 소비자 개인의 기준과는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
나는 만년필을 수집하지 않는다. 사용한다.
그리고 그 사용에는 명확한 목적이 있다.
사유의 깊이를 담아내고, 나의 체온이 깃든 문장을 남기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나에게 있어 플래그십이란 가장 고가의 모델도, 가장 유명한 모델도 아니다.
나의 손에서 가장 잘 살아 숨 쉬는 펜, 나의 내면과 가장 긴밀하게 연결되는 도구, 그것이 나만의 플래그십이다.
그 여정의 기록을 아래에 담는다.
흔히 회자되는 모델들이지만, 이들을 단지 리스트로 늘어놓기보다는, 그 안에서 드러나는 나만의 기준과 응시를 함께 기록해 두고 싶었다.
브랜드의 플래그십을 고르기보다, 나의 플래그십을 발견하는 탐험으로.
모두가 인정하는 명작. 그러나 명성보다 중요한 것은 손에 쥐었을 때의 감각이다. 나는 149가 크다. 손에 맞지 않는다. 그래서 146을 썼다. 나에게는 이 차이가 중요하다. '누구나 인정하는 최고'가 아닌, '내가 가장 오래 쥘 수 있는 펜'. 그것이 기준이 된다면, 146도 플래그 쉽이라 할 수 있다.
이 펜은 몽블랑 149 보다 더 대형기다.
그리고 플래그 쉽으로는 M800과 늘 논쟁거리다.
하지만 잉크의 흐름과 닙의 탄성이 나의 문장 리듬과 맞아떨어지는가, 이것이 오히려 중요하다.
이 펜은 낭창거린다. 낭창거림은 연성닙 또는 플렉스닙이라고도 한다.
유연하게 휘어지는 느낌과 감성을 지닌 이 펜의 성격은 변주와 파격으로 사유 하는 내 방식과 닮아 있다.
많은 이들이 파카51을 이야기한다. 지구상에서 가장 많이 팔린 펜이기도 하다.
역시 편하고 술술 씌어지고 언제나 변함없는 명품이다.
듀오폴드의 정직한 존재감도 좋지만 역시 파카 51은 명불허전이다. 전천후다.
문장이 길어지지 않을 때 그냥, 그저 슬쩍 슬쩍 써본다.
이런 편안함이 문장을 견인한다.
나에게 이 펜은 무의식을 의식으로 복원하는 장치다.
다만 복각품보다는 빈티지가 제 맛이다.
사각의 바디는 손에 불편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불편함이 오히려 각을 만들어준다.
문장을 정제하고, 긴장을 부여한다.
워터맨 100의 정통성을 잇는다는 의미보다, 이 펜이 갖는 구조적 낯섦이 나에게는 더 중요하다.
낯선 도구는 새로운 언어를 부른다
.
오로라의 필감은 연필같은 사각거림을 주요한 특성으로 유명하다.
사용해 보면 역시 그렇다.
오로라는 옵티마, 오탄도트, 데몬스트레이터 세 개의 펜을 갖고 있었다.
유리 배럴이라는 명성답게 한 때 배신을 주었다.
이탈리아 특유의 감성과 물성의 섬세함이 잉크와 어우러져, 단단한 밀도로 문장을 만들어낸다.
어쩌면 지나치게 아름답다 또는 장식적일 수도 있다.
그러나 때로는 사유도 장식이 필요하다.
이 펜은 사용하지 못했다.
다만 몬테그라파 다른 펜을 갖고 있다.
'닙의 중간 측면 부분을 절개해서 필기시 인장응력으로부터 자유롭게하고 탄성으로 휘어짐을
느끼게 할 수 있다' 고 제조사는 설명한다.
세필닙의 낭창은 태필닙의 낭창과는 사뭇 다르다.
그럼에도 아름답다.
아름다움 너머의 기술적 시도와 그 속에서 발현될 사유의 가능성을 상상하게 만든다.
가장 실용적인 디자인.
지나치게 유명해서 오히려 특별함이 없는 것 같지만, 디자인 하나 만으로 모든 펜의 전설이 될 수 있다.
그만큼 펜의 디자인은 특별하고 전투용으로 사용하기도 좋고, 경제적이기도 하고,
언제 어디서든 편안하고, 믿음직스럽고, 우직하고, 듬직해서 독일 병정 같은 만년필이다.
변하지 않는 친밀감, 가장 오래된 우정을 준다.
목재의 질감은 펜을 손에 쥐는 감각을 완전히 다르게 만든다.
차가운 금속성의 재질과 따스하고 부드러운 느낌의 목재가 결합되어 우아한 품격을 준다.
침묵처럼, 그러나 강하게 말을 건넨다.
‘쓰기’가 단순히 뇌의 활동이 아닌, 손끝의 정교한 감각이라는 것을 다시금 깨닫는다.
세일러 KOP는 부드럽다. 지나치게 부드러워서, 때론 문장이 미끄러진다.
아직 더 깊은 사유의 리듬을 맞춰야 한다.
아직도 관찰 중이고, 나의 문장이 이 펜들과 조응할 수 있는 때를 기다린다.
이 리스트는 완결된 것이 아니다.
나의 손이 달라지면, 나의 언어가 달라지면, 리스트도 달라질 것이다.
플래그십은 외부의 기준이 아니다.
나의 손에서, 나의 마음에서 가장 잘 살아나는 펜. 그것이 진정한 플래그십이다.
그러므로 이 글은 펜에 대한 기록이기도 하지만, 결국은 나 자신의 사유 리듬을 찾아가는 여정이기도 하다.
최고의 펜이 아니라, 나에게 가장 깊은 문장을 선물해줄 단 하나의 도구를 찾아가는 고백.
변주와 파격은 언제나 그 가장 사적인 곳에서부터 시작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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