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ceptzine vol.37
글&사진 이혜인
어렸을 때부터 식물과 가깝지 못했다. 식물보다는 동물을 사랑하는 마음이 컸고, 사실상 자라온 환경을 봤을 때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오직 아파트에서만 자랐기 때문이다. 한 아파트에서만 산 건 아니었지만 이사를 가도 꼭 고만고만한 곳으로 갔다. 딱 한 번 집이 크게 기울었을 때, 열악한 환경의 아파트로 이사를 갔는데 그곳은 지하도 아니었는데 단 한 줄기의 빛도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그 이후로 사정이 나아져서 그보다 괜찮은 곳으로 옮겨갔지만 여전히 빛이 풍부한 곳은 아니었다. 지금의 집에서도 빛이라곤 이른 오전에 잠시 들어왔다가 얼마 안 있어 도로 나가버리는 자식새끼 같은 존재다. 그래서 꽃을 사거나 선물을 받으면 화병을 강아지 산책시키듯, 혹은 빨래를 널듯 볕이 있는 베란다에 놓곤 한다. 딱 그 정도의 애정. 하지만 모순적이게도 나는 식물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고 싶다. 누군가와 함께 궁이나 숲을 걸을 때 자꾸만 나무에 대해 아는 척하고 싶다. 그래서 찾아보게 된 책이 《원예도감》이다. 흡사 바른생활 교과서를 보는 듯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그림과 디자인. 무엇보다 이 책이 좋은 건 인문학적인 접근을 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뜰을 잘 가꾸는 법에 대해 말하기 전에 《한밤중 톰의 정원에서》, 《비밀의 화원》 등 문학 속에 등장한 정원 이야기로 첫 장을 연다. 또한 꼼꼼하지 못한 사람을 위한 식물을 추천해주고, 누구나 꽃이나 채소를 키울 때 실패하지 않기를 바라지만 사실은 그 실패가 식물을 이해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된다고 말한다. 어느 날 글쓴이의 할아버지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누구나, 어디에 살거나 정원사가 될 수 있어. 일단 시작하면 누구나 될 수 있는 거야.” 두 달 전인가, 편집장님이 어디선가 틸란드시아를 가져와서 내게 안겨주었다. 나는 책상 옆 벽면에 그것을 매달았다가 때가 되면 분무기로 물을 줬다. 회사 사람들은 그런 나를 보며 웃었다. 또 언젠가 한 번은 편집장님이 사무실을 제주도로 만들어주겠다며 책상 앞 창가에 야자수 잎을 붙였다. 바람을 이기지 못하고 금세 떨어졌지만 그 짧은 시간 동안 모니터 너머로 살랑거리는 잎을 보며 괜스레 웃었던 것 같다. 그런 것들을 생각하면 사실 우리는 각자의 정원을 만들고 있었던 게 아닐까 싶다.
이 앨범을 듣고 있으면 저녁 바다에 등을 대고 누워있는 기분이다. 그저 평화롭고, 몽롱하고, 아름답다. 수영은 고사하고 수면 위에 제대로 떠 있지도 못하면서 막연히 그런 기분이 드는 것은 이 앨범 자체가 바다와 깊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Thicker Than Water>는 앨범이기 전에 서핑 관련 영화다. 재밌는 사실은 감독인 잭 존슨이 주연으로 출연했고, 사운드 트랙도 담당했다는 것이다. 그 이전엔 하와이 프로서퍼로도 활동을 했다. 안타깝게도 그 이력은 사고로 인해 멈추게 되지만 이른 나이에 다양한 음악을 접한 덕분에 그는 새로운 파도를 타게 되었다. 2001년엔 <Brushfire Fairytales>를 발표하여 뮤지션으로 정식 데뷔를 했다. 그의 다양한 재능은 하와이라는 풍부한 자연에서 비롯되어 하나의 선처럼 이어져 있다. 그렇기에 그의 지난 발자취는 저마다 다른 보폭이지만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다. 한결같이 다정하고 온화한 느낌. 나는 그의 노래 중 ‘Moonshine’과 ‘Rainbow’를 자주 듣는다. 기타 선율과 나지막한 목소리가 평화로운 해변을 떠올리게 한다. 괜찮은 그늘을 찾은 뒤 그의 음악을 배경 삼아 잠들고 싶달까? 반면에 9번 트랙 ‘Dark Water & Stars’는 해변보다는 우주를 상상하게 한다. 아니다. 바다에 밤이 찾아오면 그것이 바로 우주일 것이다. 음악 중간중간에 나오는 신비로운 효과음은 마치 우주에서 보내오는 메시지 같다. 얼마 전 세상을 떠난 데이빗 보위의 ‘Space Oddity’가 떠오른다. 데이빗 보위의 노래는 우주에 혼자 남겨진 자의 쓸쓸함이 느껴진다면 ‘Dark Water & Stars’는 별과 행성에게 둘러싸인 듯한 포근함이 느껴진다. 확신할 순 없지만 잭 존슨이라는 사람 또한 그럴 것 같다. 그는 오래전부터 환경에 관한 자선활동을 하며 부인과 함께 비영리 자선단체를 설립했다. 아이들을 위한 미술, 환경, 음악에 대한 교육도 꾸준히 지원하고 있다고. 음악 작업 또한 태양광 스튜디오에서 하고, 재생용지와 콩기름으로 앨범을 만든다고 하니 얼마나 자연을 사랑하는지 짐작할 수 있겠다. 아마 그 모든 베풂은 그가 서퍼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 아니었을까? 바다의 도움을 받아 항해했고 노래를 만들었다. 이제 바다를 위한 일을 할 차례였던 것이다.
나는 진짜 자연을 체험해보지 못했다. 체험은커녕 본 적도 없다. 앞서 말한 자연은 백두산 천지나 용머리 해안 같은 것이 아니다. 자연보다는 야생이라고 표현하는 게 좋겠다. 하지만 평생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에 갈 일이 있을까 싶다. 사실 딱히 그러고 싶지도 않다. 잠시 그곳에 놓인 나를 상상하니 황홀함보다는 두려운 마음이 지대하다. 차라리 동물 중에서도 가장 무섭다는 사람에게 둘러싸여 있는 것이 낫다.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도망치고 싶은 서울 한복판에서 한평생 사는 것이 나을 정도다. 이미 너무 많은 문명과 복잡한 환경에 익숙해진 것이다. 그렇지만 야생 한가운데 있다고 해서 환경이 단순해지는 건 아니다. 오히려 더 많은 고난과 죽음의 고비가 부비트랩처럼 숨어 있다. 그저 삶이 단순해지는 것이다. 야생에선 살거나 혹은 죽거나 이 극단적인 상황이 전부다. 그냥 살아가는 것은 없다. 성난 들소처럼 치열해야지만 오늘 하루를 겨우 살아 낼 수 있다. 그 순간 인간은 우주에서 내려다본 지구의, 나라의, 도시의, 한 아파트의 물탱크 이끼 정도가 된 기분을 맛보게 될 것이다. 영화 <인투 더 와일드>는 그런 과정을 한 청년의 여정을 통해 보여준다. 주인공 크리스토퍼는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자신의 전 재산을 빈민구호단체에 기부한 뒤 알래스카로 향한다. 부모님을 포함한 인간사회에 어떤 미련도 없었기 때문에 모든 걸 버리고 훌쩍 떠날 수 있었다. 커다란 배낭을 메고 산을 오르고 강을 가로질러 자신의 목표를 향해 먼 옛날 고행길을 나선 순례자처럼 묵묵히 걸었다. 인간과 행복의 가치를 찾기 위한 긴 여정. 그러나 크리스토퍼는 그렇게 원하던 알래스카를 찾지 못하고 버려진 버스 안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지도 한 장만 있었다면 바로 옆에 있는 도보를 찾았을 테고 어쩌면 살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온전치 못한 준비를 탓하며 그의 죽음을 무의미하다고 할 수 있을까? 크리스토퍼는 인간사회에 질려 자연으로 건너왔다. 아이러니하게도 눈을 감기 직전에 그는 이런 말을 했다. “행복은 나눌 때 진정한 가치가 있다.” 너무 늦게 깨달은 게 아닐까 싶지만 두 손에 무언가를 꼭 쥔 채로 그 무엇도 버리지 못할 나를 생각하니 그의 죽음이 숭고하게 느껴진다. 어쩌면 영원히 알지 못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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