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뒷모습

by 검은빛

<그의 뒷모습>


오후 7시가 가까워지자 중앙 창가 자리에 앉아 있던 그는 주섬주섬 가방을 챙겨 들고 일어섰다. 아무 말없이 사라지는 반쯤 벗겨진 그의 뒤통수를 바라보며


'오늘은 웬일로 땡퇴근을 안 했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들어 더욱 거세어지는 4층의 '실적 압박'에 그 역시 만만한 개발자들 불러다 '빨리 건 수를 올려'라고 내리 압박을 하고 있다. 하지만 '답정남' 빵시기(갑 공무원. 이름을 비틀어 부름)를 당해내는 게 과연 그가 수시로 공언하고 입에 달고 살던 '그거 쉽잖아'처럼 돌아갈지는 야탑광장의 개미가 봐도 뻔한 일이 아닐까 싶다.


7월 기록뷰어 담당자가 아직 떠나기 전 4층 회의실에서 빵시기는


"내가 기필코 도장 안 찍어 줄 거고, 반드시 페널티 물리겠다"라고 했다고 한다. 어느 정황에서 나온 발언인지까지는 확인하지 않았다. 하지만, 평소 본인이 책임질 법한 사항을 빼고는 일관성 있게 2층을 공략해 온 그의 언행으로 볼 때, 12월 말 1월 중에 그의 발언대로 될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추정해 본다.


아마도...

전임 사또였다면


"야.. 야... 야... 밥 먹고 해! C. 먹고살자고 하는 짓인데.. 먹고 해 먹고. 밥 먹으러 가자" 했을 법한 오후 7시 무렵이지만... 신관 사또인 것도, 신관 사또가 아닌 것도 아닌 그는 슬그머니 가방을 챙겨 문을 나섰다.


7시를 조금 넘긴 시간에 남아있던 대여섯 명은 저녁을 먹기 위해 김밥집으로 향했다. 몇은 먹고 퇴근을 하려고, 또 몇은 먹고 다시 들어가려고...


김밥집에 들어서는 순간 제일 안쪽자리에 반쯤 벗겨진 낯익은 뒤통수가 눈에 띄었다. 2십 분 전쯤 나가더니 혼자 김가네에서 식사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참... 기가 막힌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본인 배는 고프고 그 시간까지 남아있는 팀원들은 배고프지 않을 거라 생각한 건지... 아니면 '니들이 지금 밥이 넘어가냐?' 심정으로 본인 배만 채우는 건지. 저것이 정말 프로젝트 최고 연장자이자 책임자인 그의 모습이라니!


한 달쯤 전에 그는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그의 바로 앞자리 앉은 나는 듣기 싫지만 그의 미주알고주알 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법카를 갖고 있는데요..."

"이거 교통카드 기능은 없나요"

"아 그래요?! 교통카드 기능 넣어서 재발급할 수 없나요?"


이 무슨 귀신씻나락 까먹는 소리인가?

최고액 급여수급자에 최고 권력자이며, P사의 망해가는 프로젝트를 구원하고자 나타났다는 그가 전철값 버스값을 법카로 긋겠다는 말씀?? ㅋ......


한참 전 오피스텔 도어록 건전지값을 본인이 샀다고 청구하려던 K모양이 떠올랐다. 한 푼 내지 않고 오피스텔을 숙소로 쓰면서 건전지값 천 몇백 원 내놓으라던 K. 어째 그 K와 그리 닮았는지. 같은 성씨라 그런가? 아... K성씨께는 죄송.


식사하면서 프로젝트 돌아가는 얘기며 이런저런 대화가 오고 갔는데, 그는 돌아보지 않고 묵묵히 밥을 오래도록 먹었다. 그리고는 일어나 걸어 나오면서 이제야 발견했다는 듯


"어이쿠 식사들 하러 왔는가? 몰랐네"

라는 말을 남기고 서둘러 어둠 속으로 몸을 숨겼다.


보통의 약아빠진 능구렁이 같은 자들은 빈말이라도 '고생한다', '수고한다'류의 말을 입에 달고 살지만... 그는 그러하지 않았다. 아마 그 점에 있어서는 4층의 빵시기와 닮은 점이 아닐까 싶다. 아니... 빵시기는 가끔 수고한다는 말을 하긴 한다. 후후.


'개발자 80프로는 놀고 있을 거'라고 신임 팀장들에게 아무렇지 않게 뒷담화를 해대는 최고책임자. 정작 본인은 언제나 빠져나간 인력 채우기 위해 사실상 '면접 보는 게 다'인 상황에.


어둠 속 퇴근길에 러시아의 위대한 음악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의 5번을 플레이 시켰다. 러시아의 대지휘자 키릴 콘드라신의 연주로.


'역시 쇼스타코비치는 러시아 지휘자 연주로 들어야 제맛이야!' 하는 생각이 먼저 떠올랐다. 러시아에서는 베토벤 정도로 추앙받는 쇼스타코비치는 스탈린과 그의 똘마니들로부터 모진 사상비판을 받은 탓에 어떤 곡은 말랑말랑 부르주아적으로 어떤 곡은 사회주의 및 전제주의적 냄새가 물씬 풍기는 곡으로 왔다 갔다 하는 작풍을 보여줬다.


차 안에 울려 퍼지는 5번도 스탈린과 추종자들의 모진 비판 후에 사회주의적 냄새(?)가 물씬 풍겨 나오는 걸작이다. 많은 서방의 지휘자들이 도전했지만 그다지 주목할만한 성적을 낸 지휘자는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1악장에서의 뭔가 암울한 봉건사회를 그리는 듯한 느낌. 그리고 이어지는 2,3악장에서의 혁명전야를 암시하는 듯한 전개. 마지막 피날레에서 금관과 팀파니, 심벌즈 등 온갖 관현악기들이 포효하며 마무리 짓는 연주를 듣자면... 스탈린이 좋아했든지 말든지(^^) 후련한 감동을 맛볼 수 있다. (제 수준이 연주를 제대로 평할 수준이 아님은 양해를... ㅠ ^^)


쇼스타코비치 5번 피날레의 혁명적 전개처럼... 곧 연말 개발의 피날레가 되면 적들의 심장에도 포효하는 금관이, 세상을 찢어대는 팀파니가,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 심벌즈의 파열음이 내려칠 것이라 위안해 보며, 감가네에서 그의 불쾌한 뒤통수의 기억을 지워내보려 한다.


하여간 파이팅~^^.


2024.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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