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비딕』, 끝없는 질문의 항해

에이해브, 고래,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세계에 관한 독해

by 콩코드


프롤로그

“나를 이슈메일이라 부르라”

- 바다로 떠나는 고전 읽기

허먼 멜빌의 《모비딕》은 단순한 항해담을 넘어선다. 이 소설은 인간 존재의 한계와 욕망, 그리고 신의 침묵 속에서 부딪히는 철학적 여정을 그린다. 이 작품에서 바다는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이해할 수 없는 질서와 무한한 심연을 상징하는 공간을 상징한다. 멜빌은 그 바다 위에 인간을 띄워, 우주적 존재*와의 충돌을 통해 인간 내면의 균열과 존재론적 위기를 드러낸다.


젊은 미국의 야망과 불안을 배경으로 삼은 이 책은, 인간 존재의 본질을 향해 날카로운 질문을 던진다. 모비딕, 하얀 고래는 단순한 동물이 아니다. 그것은 미지의 진실을 감춘 상징이자, 우주의 침묵을 응시하게 하는 존재다. 에이해브 선장이 고래를 뒤쫓는 이유도 복수에 그치지 않는다. 그의 집착은 이해할 수 없는 질서와 무의미에 맞서려는, 인간 정신의 고독한 저항에 비견된다.


《모비딕》은 단지 과거의 사건을 묘사한 작품이 아니다. 멜빌이 그려낸 고래 사냥의 이야기는 시대를 초월해 인간 본성과 세계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는 여전히 그 질문들 속을 항해하고 있다. 우리가 처한 세상은 불확실성과 격변 속에 있으며, 그 안에서 우리는 에이해브와 닮은 얼굴들을 마주친다. 권력에 대한 집착, 신념의 광기, 이해할 수 없는 세계 앞에서의 분노와 통제 욕망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중요한 문제다.


에이해브의 항해는 단순한 모험담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내면을 향한 탐색이자, 지식과 신념의 경계를 시험하는 심리적·철학적 여정이다. 그는 고래를 쫓는 과정에서 점차 자신을 신격화하며, 인간 존재의 가장 근원적인 욕망과 두려움을 드러낸다. 그의 집착은 단지 한 생물에 대한 복수가 아니라, 이해할 수 없는 세계를 향한 인간 의지의 절박한 몸부림이다. 그 서사는 오늘날의 사회적·정치적 갈등과도 깊게 연결된다. 에이해브 안에서 우리는 자아의 붕괴, 통제 불가능한 세계 앞에서 느끼는 무력감, 그리고 그것을 폭력적으로 돌파하려는 현대인의 그림자를 발견한다.


《모비딕》을 지금 다시 읽어야 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이 책은 고래를 쫓는 이야기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가 존재의 의미를 묻고, 끝없이 변하는 세상 속에서 느끼는 공허와 갈망을 응시하게 한다. 이 소설이 던지는 질문은 특정한 시대의 문제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유효한 인간 보편의 질문이다. 에이해브의 항해는 단순히 파멸로 끝나는 비극이 아니라, 끝없이 되묻고 다시 돌아오는, 인간 존재의 서사다.


《모비딕》은 끝나지 않았다. 그 이야기는 우리에게 다시 질문을 던지며, 매번 다른 방향으로 우리를 이끌어간다.


1장. 집착의 항해 – 에이해브라는 인간

허먼 멜빌의 《모비딕》에서 에이해브는 단순히 복수심에 사로잡힌 인물이 아니다. 그는 고래라는 구체적 대상을 넘어,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질서-형이상학적 불가해성-에 도전하는 상징적 존재로 기능한다. 그의 항해는 외적 전투가 아니라 내면적 전복의 과정이며, 그 중심에는 인간 주체의 한계와 오만이 놓여 있다.


에이해브는 모비딕에게 다리를 잃은 이후, 고래를 단순한 자연 현상이 아닌 의지와 의도를 지닌 절대적 타자로 인식한다. 그는 고래를 “악의 구현” 혹은 “우주적 침묵의 상징”으로 해석하고, 이를 이해하고 정복하려 한다. 이 인식은 인간 이성이 세계를 완전히 포착할 수 있다고 믿는 계몽적 세계관과, 그 한계를 인식하는 실존주의적 사유 사이의 긴장으로 읽을 수 있다.


에이해브는 신적 질서에 관한 질문-“왜 나인가?”-를 던지지만, 소설은 그 질문에 대한 신적 응답을 제공하지 않는다. 고래는 끝내 말하지 않으며, 이 침묵은 우주가 인간에게 무관심하다는 실존적 자각으로 귀결된다. 이 침묵은 파스칼이 말한 '무한한 공간의 영원한 침묵'을 연상시키며, 에이해브의 분노는 바로 이 우주의 무관심에 대한 인간적 반응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의 항해는 결국 자기 파괴적이다. 그는 세계를 이해하거나 통제할 수 있다는 전제를 버리지 못한다. 그런 그의 확신은 피쿼드호 전체를 파멸로 이끈다. 이 지점에서 멜빌은 에이해브를 전능을 추구하는 인간 주체의 반어적 형상으로 제시한다. 그는 신을 대체하고자 했으나, 결국 고래(세계)와 함께 침몰한다. 이는 현대 사회에서 종종 목격되는 기술적 통제, 이념적 확신, 권위주의적 리더십의 그림자와 연결된다.


어떤 의미에서 에이해브는 개별 인물이 아니라, 근대적 인간 주체의 극단적 초상이다. 그는 불확실한 세계 앞에서 질서를 추구하지만, 그 방식은 폭력적이고 자기 파괴적이다. 멜빌은 ‘통제할 수 없는 세계’와 ‘그 세계를 해석하려는 인간 정신’ 사이의 비극적 간극을 통해 인간 존재의 한계를 탐구하고 있다.


이 분석을 통해 우리는 질문할 수 있다. 에이해브는 왜 멈추지 못했는가? 그는 어떤 진실에 도달하고자 했으며, 그 과정에서 무엇을 잃었는가? 그리고 오늘날 우리는 여전히 그와 유사한 방식으로 세계에 접근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모비딕》은 단순히 고래 사냥의 서사에 그치지 않고, 인간 인식의 한계와 오만, 그리고 그로 인한 문명의 파국까지 사유하게 만든다.


2장. 하얀 고래의 은유 – 모비딕이라는 신화

《모비딕》에서 가장 압도적인 상징은 단연코 "하얀 고래"이다. 이름 없는 자연물이어야 할 존재는, 작가 멜빌의 서술을 통해 철학적 질문과 인간 존재의 불안을 담아내는 신화적 대상으로 부상한다. 고래는 단순히 동물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공포, 신성, 무의미의 응축이며,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세계의 심연을 상징하는 형상이다.


가장 먼저 주목할 점은 ‘하얗다’는 색의 상징성이다. 흔히 백색은 순수, 무구, 신성함의 이미지를 내포한다. 그러나 멜빌은 고래의 하얀색을 역설적으로 활용한다. 책 속에서 고래의 흰색은 시각적으로 감당할 수 없는 공허함, 의미의 부재, 심지어 죽음의 얼굴로 다가온다. 이는 기존 상징에 대한 전복이며, 고래는 그 자체로 의미를 거부하는 존재, 혹은 모든 의미를 흡수해 버리는 ‘의미의 블랙홀’처럼 기능한다. 에이해브가 고래에게 투사하는 증오와 분노는 결국 그 무의미에 대한 두려움이기도 하다.


또한 모비딕은 각 인물의 정신을 반사하는 거울과 같은 존재다. 에이해브에게는 운명을 좌우하는 악의 존재이며, 스타벅에게는 신의 섭리에 대한 모독이다. 이슈메일에게는 설명되지 않는 신비이자 종국에는 세계 그 자체가 된다. 이러한 다의성은 멜빌이 고래를 하나의 해석으로 단정 짓지 않도록 끊임없이 경계하며,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남기도록 구성했음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고래는 해석의 대상이 아니라 해석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존재 그 자체다.


철학적으로 보자면, 모비딕은 실재(the Real)의 상징이기도 하다. 라캉적 의미에서 실재란 상징화될 수 없는, 언어로는 붙잡히지 않는 그 무엇이다. 에이해브가 끊임없이 고래를 향해 망치를 두드리고 창을 던지지만, 그는 그 본질에 다가가지 못한다. 오히려 그런 식의 접근 시도가 자기를 파괴하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고래는 침묵으로 응대하고, 그 침묵은 인간의 언어와 이성이 얼마나 무력한지를 드러낸다.


현대 독자에게 이 고래는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가 이해하려 애쓰지만 도달할 수 없는 것, 예컨대 존재의 이유, 우주의 법칙, 혹은 인간 조건 자체일 수 있다. 기술과 데이터로 설명 가능한 세상에 살면서도,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질문들-삶의 목적, 죽음의 의미, 존재의 불확실성-은 하얀 고래처럼 우리의 의식을 맴돈다.


결국 모비딕은 물리적 고래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이해할 수 없거나 이해하려 하지 않았던 세계 전체의 은유다. 우리는 이 고래를 피해 도망치거나 무시하거나, 아니면 에이해브처럼 맞서 싸우려 한다. 그러나 어떤 선택을 하든, 고래는 그 자리에 남아 있다. 침묵하며, 거대하게, 인간을 비추는 하얀 얼굴로.


3장. 배 위의 세계 – 피쿼드호는 축소된 우주다

《모비딕》의 주요 무대인 피쿼드호는 단순한 포경선이 아니다. 이 배는 멜빌이 의도적으로 설계한 축소된 세계, 다시 말해 인류 사회의 축약 모델이다. 항해는 시간적 연속성을 가진 사건이고, 배는 닫힌 공간이다. 이 닫힌 공간 안에서 다양한 인종, 종교, 계급, 언어가 충돌하고 협력하며, 바다라는 외부 세계와 마주친다. 피쿼드호는 움직이는 하나의 세계이며, 그 안에서 우리는 인간 사회의 응축된 모습을 목격하게 된다.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다양한 출신의 선원들이다. 백인, 흑인, 아메리카 원주민, 남태평양 출신, 아시아계 등, 피쿼드호는 19세기 당시 세계 체계의 축소판이다. 이들은 ‘고래를 잡는다’는 공동 목표 아래 모였지만, 이들의 지위, 말투, 역할은 철저하게 계급화되어 있다. 선장은 신에 가까운 위치에 있고, 일등 항해사 스타벅은 도덕적 중심을 상징하며, 선원들은 기능적 역할로 배에 존재한다. 이 배의 구조는 자본주의적 노동 구조, 국가 내 권력 체계, 식민주의적 위계를 은유한다.


흥미로운 점은 이 배가 종교적 다원주의와 충돌의 공간이라는 점이다. 스타벅은 엄격한 기독교 신자이고, 퀴퀘그는 남태평양 원시 신앙을 따르며, 이슈메일은 불확실성과 유연함 속에서 사유한다. 서로 다른 신념 체계가 협력하는 가운데, 때로는 충돌하고, 때로는 타협한다. 이러한 구성은 멜빌이 19세기 미국 사회, 나아가 근대 세계가 안고 있던 다문화적 갈등과 가능성을 실험적으로 보여주고 있음을 시사한다.


그러나 피쿼드호는 결국 침몰한다. 그 침몰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처럼 다가온다. 그 이유는 단순히 고래가 강해서가 아니라, 이 배가 오로지 하나의 의지, 하나의 목적(에이해브의 복수)에 휘둘렸기 때문이다. 다양성과 공동체적 지혜가 묵살당하고, 선장이 모든 방향을 결정하는 순간, 배는 더 이상 공동체가 아닌 독단의 도구가 된다. 피쿼드호의 붕괴는 바로 이 다양성의 억압과 권력의 집중이 초래한 결과다.


현대 사회에 적용하면, 피쿼드호는 우리가 구성하는 국가, 조직, 세계질서를 떠올리게 한다. 다원적 구성, 제한된 공간, 위기의 항해. 이 공간이 건강하게 작동하려면, 집단 내부의 균형, 경청, 협력이 필수다. 하지만 오늘날에도 에이해브처럼 하나의 절대 목적(이념, 이익, 민족주의 등)이 공동체 전체를 압도할 때, 사회는 피쿼드호의 운명을 되풀이할 가능성이 높다.


피쿼드호의 침몰은 단순히 에이해브 개인의 비극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다양한 인간들이 이루는 사회가 어떻게 파국을 맞을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모델이다. 고래는 그저 촉발점일 뿐, 실제로 재앙은 배 안에서 이미 시작되었음을 암시한다.


4장. 이야기의 다층성 – 고래학에서 형이상학까지

《모비딕》은 단순한 서사 구조를 따르지 않는다. 전통적인 기승전결의 이야기 방식에서 벗어나, 멜빌은 백과사전, 여행기, 신학서, 철학적 독백, 자연과학적 설명 등 다양한 장르를 혼합한다. 이 다층적 구성은 독자를 혼란스럽게 만들기도 하지만, 그것은 멜빌이 의도한 방식이다. 그는 독자가 단순히 줄거리를 따라가기를 원하지 않는다. 대신, 독자가 ‘고래’라는 상징을 중심으로 복잡한 세계의 층위를 통과하기를 요구한다.


특히 중반부에 등장하는 고래의 생물학적 묘사 장면들은 서사적 긴장을 일시적으로 멈추게 한다. 작중 화자인 이슈메일은 고래의 길이, 종, 골격 구조, 포경법 등을 장황하게 설명하며, 소설은 잠시 ‘소설’이기를 멈춘다. 이 서술의 목적은 단순한 정보 제공이 아니다. 오히려 이는 인간 지식의 불완전성을 드러내는 장치로 기능한다. 고래를 설명하려 할수록, 독자는 ‘고래가 무엇인지’보다 ‘우리가 고래를 얼마나 모르고 있는가’를 인식하게 된다. 지식은 중심에 도달하지 못하고, 주변을 맴돈다. 이는 결국 세계의 본질이 결코 도달할 수 없는 대상이라는 인식을 심화시킨다.


이러한 서술 전략은 형이상학적 물음을 불러일으킨다. 우리는 고래가 단순한 동물이 아니라, 세계의 질서, 우주의 법칙, 혹은 신의 침묵일 수 있다는 암시에 점차 익숙해진다. 고래의 ‘하얀색’은 순수함, 죽음, 신성, 공허를 동시에 품은 상징으로, 그 상반된 의미들이 충돌하면서 고정된 해석을 허락하지 않는다. 이처럼 불안정한 상징은 정보가 넘쳐나는 디지털 시대에도 진실에 다가가는 것이 점점 더 어렵게 느껴지는 사대의 현실과 자연스럽게 맞물린다. 멜빌은 이 감각을, 이미 19세기 근대 초입에서 포착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이 작품은 장르에 대한 실험이기도 하다. 고래학은 하나의 형식을 지우고, 철학은 다른 장르를 침범한다. 결과적으로 《모비딕》은 ‘소설’이라는 장르의 경계를 확장시키며, 문학이 얼마나 유연한 사유의 공간이 될 수 있는지를 증명한다. 이는 단순히 문학 형식의 실험에 그치지 않고, 인간 인식 자체의 경계를 밀어붙이는 시도이기도 하다.


따라서 《모비딕》은 이야기 안에 또 다른 이야기, 의미 안에 겹쳐진 또 다른 의미를 층층이 쌓아 올린 의식의 미로라 할 수 있다. 독자는 그 복잡한 구조 속을 항해하는 이슈메일의 또 다른 모습처럼, 다양한 장르와 사유, 설명과 서정, 논리와 신비 사이를 끊임없이 오가게 된다. 멜빌은 독자에게 명확한 길을 제시하지 않지만, 그 혼란 속에서 스스로 길을 찾아 나서는 행위 자체가 곧 독서의 본질임을 일깨운다.


5장. 서술자인 이슈메일 – 바깥에서 안을 바라보는 자

《모비딕》의 시작은 익숙하고도 독특한 문장으로 열린다. “나를 이슈메일이라 부르라.” 이 서술은 단순한 이름 소개가 아니라, 이야기의 입구에서 독자에게 내미는 초대장이다. 동시에 그것은, 이 이야기의 모든 사건이 하나의 ‘생존자의 회고’라는 프레임 안에서 전개된다는 선언이기도 하다. 《모비딕》은 서사적으로 고래를 쫓는 이야기이지만, 서술 구조상 살아남은 자의 복기이며, 이슈메일이라는 인물의 해석이자 성찰의 과정이다.


이슈메일은 이 작품의 구성 원리이자 해석의 주체다. 그는 관찰자이며 기록자이고, 대부분의 사건에서 중심에서 약간 비켜나 있다. 하지만 바로 그 거리감이, 독자에게 전체 항해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게 만든다. 그는 선장의 광기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면서도, 일정한 연민과 이해의 시선을 유지한다. 또한 고래학과 신학, 철학과 풍자적 장면들이 병렬적으로 제시되는 데에도 큰 역할을 한다. 이슈메일은 단지 인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복수극과 백과사전, 비극과 풍자의 중간 지대에서 균형을 잡는 기획자다.


그는 특별한 주체이기도 하다. 배의 모든 이들이 죽은 가운데, 유일하게 살아남은 자다. 이 생존은 우연일 수도 있고, 상징일 수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가 살아남아 이 이야기를 ‘기록했다’는 사실이다. 파국 이후에 남겨진 증언자로서 그는 하나의 윤리적 역할을 떠안는다. 그 윤리는 단지 생존의 의미를 넘어서, 기억하고, 전달하고, 반복해서 질문하는 태도로 이어진다.


이슈메일은 때때로 자기반성과 회의에 빠진다. 그의 서술은 전지적이거나 절대적이지 않다. 그는 끊임없이 "이것이 진실인가?", "나는 다 이해한 것인가?"라고 묻는다. 이런 불확실성과 불완전성의 인정은, 이 작품 전체가 단단한 결론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끝없이 해석되고 응시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다시 말해, 이슈메일은 독자 자신일 수 있다. 절대적 신념을 따라 파국으로 나아간 에이해브와 달리, 이슈메일은 거리 두기와 사유, 관찰과 질문, 응시와 증언을 선택한 자이다.


현대 사회에서도 ‘이슈메일’적 위치는 유효하다. 급진적인 신념과 집단주의가 각자의 에이해브를 생산하는 시대에, 우리는 얼마나 자주 ‘바깥에서 안을 바라보는’ 태도를 유지할 수 있는가? 이슈메일은 도망자도, 영웅도, 냉소주의자도 아니다. 그는 단지, 남은 자의 책임을 묵묵히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그렇기에 이 장은 독자에게 질문을 던진다. 파국 이후에도, 우리는 어떻게 살아남고, 무엇을 기록하며, 어떤 시선으로 세계를 다시 바라볼 것인가?


6장. 무너진 배, 남겨진 이야기

파국 이후, 무엇이 남는가? 생존과 기록의 윤리

《모비딕》의 마지막은 극적이고도 잔혹하다. 피쿼드호는 침몰하고, 선원들은 전멸하며, 에이해브는 바닷속으로 사라진다. 이 거대한 항해의 끝에는 파국만이 남는다. 그러나 멜빌은 그 파국의 잔해 위에 단 한 사람, 이슈메일을 남긴다. 그 생존은 우연의 결과일 수 있지만, 문학적으로는 이야기를 전할 자, 곧 기록의 주체로서 필연적이다.


이 장에서 중요한 질문은 하나다. 모든 것이 무너졌을 때, 무엇이 남는가? 에이해브의 확신도, 피쿼드호의 질서도, 공동체의 유대도 사라졌다. 남은 것은 단지 이야기다. 이슈메일의 서술, 그의 기억, 그의 응시. 그리고 그 이야기의 전달이 없다면, 이 항해는 존재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멜빌은 여기서 한 가지 문학적 전환을 시도한다. 그는 《모비딕》을 단지 허구의 세계가 아니라, 파국 이후에 가능한 유일한 진실의 전달로 만든다. 이슈메일은 생존자이기 이전에, 기록자이며, 증언자이고, 윤리적 목격자다. 피쿼드호의 침몰은 단순한 이야기의 결말이 아니라, 문명의 메타포이가. 에이해브의 실패는 지속 불가능한 세계관의 붕괴를 상징한다.


이슈메일의 생존은 우리에게 묻는다. 파괴된 이후에도,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살아남는 것 자체가 윤리일 수 있을까? 혹은 남겨진 자의 말하기는 어떤 책임을 수반하는가? 그는 고래에 대한 백과사전적 지식을 기록하고, 에이해브의 광기를 관찰하며, 선원들의 이름을 기억에 담는다. 이는 단지 문학적 장식이 아니라, 기억이라는 윤리의 실천이다.


오늘날에도 우리는 수많은 ‘파국’의 순간을 목격한다. 기후 위기, 정치적 붕괴, 전쟁, 그리고 일상의 균열. 그때마다 우리는 이슈메일처럼 무너진 세계의 일부를 끌어안은 채, 다시 말하고, 다시 써야 한다. 그 말하기는 과거를 정당화하거나 비판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잊히지 않기 위한 서술, 곧 존재의 증명이다.


《모비딕》은 단순히 파국으로 끝나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 끝에는 질문이 남는다. 어떻게 이 모든 이야기를 계속 이어갈 것인가? 남겨진 자는 어떤 목소리로 그것을 말할 것인가?


이 장은 말한다. 무너진 배 위에서조차, 인간은 이야기를 통해 다시 세계를 엮는다. 그리고 그 엮임은, 문학이 존재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에필로그: 《모비딕》은 끝나지 않는다

이 고래는 다시 돌아온다: 문화 속 모비딕


멜빌의 《모비딕》은 단순히 문학적인 작품에 그치지 않는다. 이 소설은 문화적 신화로 자리 잡았으며, 시대를 초월하는 보편적 의미를 지닌다. 고래라는 상징적 존재는 모든 인간의 심연을 들여다보려는 욕망을 드러낸다. 고래는 그저 바다에 존재하는 한 마리의 동물이 아니며, 진리의 불완전함, 인간 존재의 불가해함, 그리고 무한히 변화하는 운명의 상징이 된다. 따라서 모비딕은 "끝나지 않는다". 그 이야기는 끝없이 반복되고, 재구성되며,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는다. 에필로그에서, 우리는 고래의 은유가 단순히 소설의 결말에 그치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 고래는 이미 문학, 철학, 사회, 정치, 심리학 등 다양한 영역에서 인간의 끝없는 탐색을 상징하는 문화적 아이콘이 되었다. 이슈메일의 이야기는 그의 시간 속에서 끝을 맞이하지만, 그의 이야기에서 파생된 물음들은 여전히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되묻는다.


멜빌의 고래는 지금 여기에서 여전히 존재한다. 그것은 문화를 지배하는 상징적 요소로서,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의 본질을 계속해서 되새기게 만든다. 우리가 경험하는 현대 사회의 갈등, 충돌,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사건들 속에서 모비딕은 계속해서 우리를 향해 그 커다란 몸을 내민다. 이 고래는 결코 사라지지 않으며, 인간이 추구하는 진리의 한계를 뛰어넘는 존재로 계속해서 떠오른다.


독자로서의 ‘에이해브’와 ‘이슈메일’ 사이

모비딕을 읽는 것은 단지 소설을 넘어서, 두 명의 중요한 인물—에이해브와 이슈메일—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인간의 본질을 탐구하는 일이다. 우리는 때때로 에이해브처럼 집착하고, 통제하려 하며, 세계를 자신의 방식으로 해석하고자 하는 욕망을 품는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슈메일처럼 생존자이며, 기록자로서 세계를 바라보고, 그 모든 것을 서술할 책임을 지는 입장에도 서게 된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독자가 자신을 어느 한쪽에만 몰두하는 것이 아니라, 두 가지 관점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것이다. 에이해브처럼 복수와 이해할 수 없는 세계를 직시하며 살아가려는 인간의 욕망을 이해할 수 있고, 이슈메일처럼 그 복잡한 이야기를 기록하고 해석하려는 존재론적 책임도 짊어질 수 있다. 결국, 독자는 에이해브와 이슈메일 사이를 오가며, 끊임없이 자신을 반성하고, 새롭게 깨닫게 된다.


톺아본다는 것의 의미: 해석과 응시

"톺아본다"는 단순히 겉으로 드러난 사실을 탐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내면 깊은 곳까지 파고들어, 숨겨진 의미와 진실을 끄집어내려는 노력이다. 《모비딕》을 읽는다는 것은 해석과 응시의 반복적 행위를 요구한다. 에이해브와 이슈메일, 고래, 바다—이 모든 상징은 단순한 기호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들은 인간 존재의 심연을 끊임없이 탐색하도록 유도하는 신호인 동시에, 모든 해석이 무한히 재구성될 수 있음을 시사하는 열린 공간이다.


멜빌의 작품은 해석의 끝을 두지 않는다. 그 자체로 문학적 미로이며, 독자는 그 미로를 탐험하면서 끊임없이 새로운 의미와 질문을 발견하게 된다. 이처럼, 《모비딕》은 단순히 한 번 읽고 마는 책이 아니며, 시간이 흐를수록 새로운 해석과 문화적 반향을 일으키는 지속적인 흐름이다. 이는 문학의 진정한 가치이자, ‘읽을수록 새롭게 열리는 지혜의 창"이라고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모비딕》은 끝나지 않는다. 그 고래는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계속해서 돌아오며, 우리는 그 고래를 마주하며 여전히 존재의 의미와 한계를 탐구한다. 고래는 언제나 바닷속에서, 그리고 인간의 내면에서, 우리가 그 의미를 끊임없이 되물으며 응시해야 할 존재로 남는다.




'우주적 존재'란 인간을 넘어선 절대적이고 설명 불가능한 힘의 총체로, 《모비딕》 전반을 지배하는 철학적 상징이자 존재론적 질문의 대상이다. 작품에선 모비딕(하얀 고래), 바다, 신의 침묵으로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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