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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의 정의와 노동의 위치 ③

국부론,자본론,그리고 21세기 자본: 자본주의를 관통한 사상의 지도

by 콩코드


2부. 비교와 교차: 세 권의 저작 속 핵심 개념들

4장. ‘자본’의 정의: 축적의 방식과 목적

생산수단으로써의 자본 vs. 부의 개념

자본주의를 해석한 세 명의 사상가 - 아담 스미스, 칼 마르크스, 토마 피케티 - 는 서로 다른 시대에 살았고, 각기 다른 문제의식 속에서 자본을 바라보았다. 그럼에도 그들이 공통으로 주목한 점은 ‘자본’이 단순한 경제적 대상이 아니라, 사회 구조를 형성하고 인간의 삶을 조직하는 핵심 축이라는 사실이다.


‘자본’이라는 단어 하나에도 시대에 따라 그 쓰임과 의미는 크게 달라진다. 이 장에서는 세 권의 저작 속에 등장하는 자본 개념을 비교하며, 각 사상가의 이론이 어떻게 이 개념을 출발점 삼아 전개되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1. 아담 스미스: 자본은 생산을 위해 축적된 노동

《국부론》에서 아담 스미스는 자본을 “생산적 노동에 고용될 수 있는 축적된 재화”로 정의한다. 그는 자본을 단순한 ‘재물’로 보지 않고, 시장 안에서 작동하는 생산적 요소로 해석했다.


여기서 핵심은 두 가지다.

첫째, 자본은 단순히 유휴 상태에 놓인 재화가 아니라, 생산에 투입되어 가치를 창출하는 자산이다.

둘째, 자본은 노동과 결합함으로써 부를 만들어내는 도구다.


스미스에게 자본은 상인, 제조업자, 농장주가 활용하는 유효한 수단이며, 이를 통해 자본은 개인의 축적을 넘어 사회 전체의 부를 증대시키는 역할을 할 수 있다. 또한 그는 자유시장 체제 안에서 자본이 가장 효율적으로 배분될 것이라 믿으며, 자본의 증대가 곧 국부의 성장으로 이어진다는 낙관적 관점을 견지한다.


다만 스미스가 살았던 시대에는 금융자본이나 대규모 상속자산의 개념이 아직 본격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자본은 여전히 ‘생산에 봉사하는 가치’로 한정되어 있었다. 그의 자본 개념은 ‘활용되는 가치’이지, 오늘날처럼 ‘그 자체로 증식하는 자산’은 아니었던 것이다.


2. 칼 마르크스: 자본은 착취의 구조, 축적되는 권력

《자본론》에서 칼 마르크스는 자본을 훨씬 더 급진적으로 해석한다. 그의 정의는 간결하면서도 본질을 찌른다. “자본은 자기 자신을 증식시키는 가치이며, 그 과정은 노동력의 착취를 통해 가능하다.”


즉, 마르크스에게 자본은 단순한 생산수단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가 응축된 결과물이다. 자본은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비대칭적 관계를 전제로 하며, 노동력을 구매하고 그로부터 잉여가치를 추출하는 구조 위에 성립한다.


그에게 자본의 축적은 단순히 부를 늘리는 과정이 아니라, 사회적 권력이 집중되는 과정이며, 계급 간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를 고착화시키는 장치이다. 자본은 경제적 개념을 넘어, 권력과 통제를 위한 구조적 기제로 기능한다.


특히 주목할 점은 자본의 축적이 단순히 양적인 증가에 그치지 않고,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 자체를 변형시키는 동력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자본이 스스로를 재생산하는 과정 속에 불평등과 위기를 필연적으로 내포하고 있다고 보았다.


스미스가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을 신뢰했다면, 마르크스는 자본 축적 과정에 작동하는 ‘보이지 않는 지배의 손’을 포착했다. 자본은 더 이상 중립적인 도구가 아니라, 구조화된 권력 그 자체이며, 혁명 없이는 해체될 수 없는 체제의 핵심으로 기능한다.


3. 토마 피케티: 자본은 자산이며, 세습되는 힘

21세기에 들어 자본은 다시 한번 그 성격을 바꾸었다. 피케티는 자본을 “소득을 창출하는 모든 자산”으로 정의한다. 이에는 전통적인 생산수단뿐 아니라, 금융자산, 부동산, 상속재산, 특허권 등 무형자산까지 포함된다.


피케티는 자본을 단순한 경제적 재화가 아니라, 법적·제도적으로 보호받는 권리로 바라본다. 그리고 이러한 권리가 자산의 세습을 통해 불평등을 심화시킨다는 점에 주목한다.


그에게 자본은 더 이상 생산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세습되는 특권이며, 경제성장의 동력이기보다는 불평등을 구조화하는 장치로 기능한다.


여기서 중요한 대립축이 나타난다.


구분 스미스 / 마르크스 / 피케티

자본의 본질 생산수단/ 착취 구조/자산과 권리

자본의 기능 부의 창출/잉여가치 착취/불평등 재생산

목적 국부 증대/체제 비판/제도 개혁


피케티는 자본을 정치적·제도적 개입 없이 방치할 경우, r > g라는 불균형에 따라 자본이 기하급수적으로 축적되며, 결국 민주주의의 기반 자체를 위협하게 된다고 경고한다. 그에게 자본은 곧 과거의 축적이 미래의 가능성을 잠식하는 구조인 셈이다.


4. 자본의 목적: 축적 그 자체인가, 사회적 가치를 위한 수단인가

자본을 정의하는 일은 곧 우리가 자본주의를 어떻게 이해하고, 그것이 어디를 향하길 바라는지를 묻는 일이기도 하다. 스미스에게 자본은 부를 창출하는 도덕적이고 합리적인 수단이었다. 마르크스에게 자본은 인간을 소외시키고 지배하는 비인간적 관계였다. 피케티에게 자본은 제도적 통제를 요구하는 잠재적 위험 요소였다.


세 사상가는 자본의 ‘기원’과 ‘귀속’을 각기 다르게 보았지만, 결국 자본이 누구의 이익을 위해 작동하는가라는 질문으로 귀결된다.


오늘날 우리는 자본을 단지 경제학의 개념으로만 다룰 수 없다. 자본은 곧 소유의 문제이며, 계층의 문제이고, 나아가 민주주의의 지속 가능성과 직결된 정치적 문제다.


5. 다시 묻는 자본: 세 시선의 교차로에서

오늘날 우리는 여전히 ‘자본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생산수단이 아니라 자산으로서의 자본이 삶의 모든 영역에 깊숙이 침투하며, 축적에서 배제된 이들을 사회 밖으로 밀어내고 있다.


세 명의 사상가는 각자의 시대에서 자본을 정의하고, 서로 다른 방식으로 그것을 분석했다. 하지만 그들 모두에게 공통된 질문이 있다. “자본은 누구의 것이며, 그것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이 질문에 어떻게 답하느냐에 따라, 우리가 살아가는 자본주의의 향방이 결정된다.


5장. 노동의 위치: 자율적 개인, 피착취 계급, 그리고 계량적 지표

자본을 논할 때 우리는 반드시 노동을 함께 이야기해야 한다. 자본은 고립된 실체가 아니라, 노동과의 관계 속에서만 그 의미를 가진다. 자본주의 체제는 언제나 이 두 요소의 긴장과 상호작용 위에 세워져 있다.


아담 스미스, 칼 마르크스, 토마 피케티 세 사상가는 각자의 시대적 배경과 문제의식에 따라 노동을 서로 다르게 정의했다. 이 장에서는 그 차이를 통해 노동의 지위와 의미가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1. 아담 스미스: 노동은 교환 가능한 자율적 주체의 활동

스미스에게 노동은 가치의 근원이며, 자율적인 개인이 교환을 통해 부를 창출하는 행위다. 《국부론》에서 그는 “노동은 모든 재화의 진정한 가격이며, 노동의 양이 진정한 부의 척도”라고 말한다. 이때 노동자는 단순한 생산 도구가 아니라, 합리적인 선택을 하는 시장의 주체로서 인정받는다.


스미스의 세계에서 노동자는 다음과 같은 특징을 지닌다.

자율적 존재: 자신의 노동을 자유롭게 제공하며, 그 대가로 시장에서 소득을 얻는다.

교환의 능동자: 노동은 화폐처럼 가치가 있으며, 타인과의 교환을 통해 사회적 부를 증대시킨다.

분업의 핵심: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노동이 세분화되어야 하며, 이는 효율적인 분업 체계로 이어진다.


여기서 노동은 착취가 아니라 상호 이익을 위한 교환 행위이며, 자유로운 시장이야말로 그 가치를 최적으로 실현하는 공간이다. 스미스는 인간 본성을 ‘거래하는 존재’로 보았고, 노동은 그런 인간성을 드러내는 행위로 이해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전제는 노동시장이 공정하고 계약이 대등하게 이루어진다는 가정에 기반한다. 현대 자본주의 현실에서 이 가정이 얼마나 이상적인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2. 칼 마르크스: 노동은 착취당하는 계급적 위치

마르크스는 스미스의 전제를 정면으로 비판했다. 《자본론》에서 노동은 결코 자유로운 개인의 교환 행위가 아니다. 오히려 노동자는 생계를 위해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야 하는 계급적 존재이며, 그 노동은 자본가가 잉여가치를 착취하는 원천이다.


노동력의 상품화: 마르크스는 ‘노동’이 아니라 ‘노동력’이 상품화되었다고 보았다. 즉, 인간의 능력이 교환 대상이 되면서, 인간 자체가 대상화된다.

잉여가치의 근원: 자본가는 노동자가 생산한 가치보다 적은 임금을 지급하고, 그 차액인 잉여가치를 착취한다.

소외된 노동: 마르크스가 중요하게 다룬 개념 중 하나는 소외(alienation)다. 노동자는 자신이 만든 생산물로부터 소외되며, 이 과정에서 자아 또한 파편화된다.


마르크스에게 노동자는 생산의 주체임과 동시에, 생산 결과로부터 철저히 배제되는 이중적 존재다. 노동은 인간 해방의 수단이 아니라,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억압과 재생산의 도구가 된다.


스미스가 노동을 인간의 자율성과 도덕 감정의 표현으로 보았다면, 마르크스는 그것을 지배 구조 속 피착취 계급의 조건으로 분석했다.


3. 토마 피케티: 노동은 계량 가능한 소득의 단위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에서 노동은 구체적 경험이나 실체적 삶보다는 통계적 범주로 다뤄진다. 그에게 노동은 ‘소득’의 한 종류이며, 자본소득과 대비되는 개념으로 불평등을 분석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노동소득은 경제성장의 한 축이지만, 자본소득에 비해 축적 속도와 규모에서 뒤처진다. 노동소득 증가율(g)이 자본수익률(r)을 따라잡지 못하는 한, 사회는 점점 자본 중심으로 재편된다. 이로 인해 상위 1%의 자산소득자와 하위 50% 노동소득자의 격차가 심화되고, 노동이 갖는 ‘생계의 의미’마저 위협받는다.


피케티에게 노동은 형태나 조건, 주체성보다는 ‘소득’이라는 통계적 항목으로서 의미가 크다. 노동소득이 자산소득에 비해 불리하다는 사실은 정치적 개입의 정당성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된다.


피케티의 통계적 접근은 노동의 감정이나 갈등, 정체성은 배제하지만, 노동이 중심이 아닌 시대 현실을 냉정하게 보여준다.


4. 노동의 변화와 위치의 이동

스미스, 마르크스, 피케티가 바라본 노동관은 단순한 이론적 차이가 아니라, 각자 시대의 역사적 현실에 어떻게 반응하고 해석했는지를 보여준다. 다음의 대비를 통해 그 차이와 변화를 명확히 정리할 수 있다.


아담 스미스: 노동의 본질(자율적 개인의 합리적 행위), 노동자의 지위(자유로운 교환의 주체), 노동과 자본(상호이익을 위한 교환관계), 노동의 의미(부를 창출하는 도덕적 활동), 시대적 배경(초기 자본주의와 자유시장)

칼 마르크스: 노동의 본질(착취당하는 계급의 위치), 노동자의 지위(자본가에게 착취당하는 피착취자), 노동과 자본(착취를 통한 권력관계), 노동의 의미(인간 소외와 억압의 도구), 시대적 배경(산업자본주의와 계급투쟁)

토마 피케티: 노동의 본질(계량 가능한 소득의 단위), 노동자의 지위(통계 속 소득 항목), 노동과 자본(자본소득 대비 열위의 소득), 노동의 의미(불평등 통계 속 수치), 시대적 배경(현대 금융자본주의와 자산불평등)


노동은 시대마다 다른 언어로 해석되어 왔다. 스미스의 세계에서 노동은 공정한 교환의 약속이었다. 마르크스에게 노동은 해방의 열쇠이자 억압의 근원이었다. 피케티는 노동을 자본에 밀린 수익 항목으로 바라본다(피케티는 노동이 벌어들이는 소득(노동소득)이 자본이 만들어내는 수익(자본소득)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고, 그 격차가 점점 커지고 있다고 봄).


5. 우리는 어떤 노동의 시대를 살고 있는가

오늘날 노동은 플랫폼 노동, 프리랜서 계약, 시간제 고용 등이 확산되며 그 의미가 다시 정의되는 전환기에 놓여 있다. 자율적인 듯하지만 불안정하고, 선택한 듯하지만 강요된 삶이 공존한다. 노동은 여전히 인간 존엄의 일부이나, 생존의 경계에서 흔들리고 있다.


스미스가 말한 자유로운 교환은 마르크스가 경고한 소외를 낳았고, 피케티가 지적한 격차를 심화시켰다. 이제 노동은 새로운 질문을 맞이한다. 노동을 인간의 권리로 볼 것인가, 아니면 단지 데이터 속 비용과 수입으로 환산할 것인가? 자본의 시대, 노동의 자리는 어디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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