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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과 현실의 균열, 죽음의 그림자 ①

잊힌 자들의 역사: 《마오의 대기근》과 기억의 윤리

by 콩코드


프롤로그: 4천5백만 뒤에 숨은 이름들

한 권의 책이 있다. 페이지를 넘길수록 숫자가 쌓인다. 사망자 4천5백만. 그 숫자는 말이 없고, 얼굴이 없으며, 이름조차 지워져 있다. 통계라는 이름으로 정리된 그 죽음의 행렬은 너무 커서, 오히려 실감할 수 없을 만큼 무겁다.


이 책을 처음 집어든 건 단순한 호기심에서였다. 인류 역사상 가장 참혹한 기근이라 불리는 사건이 어떻게 한 국가의 정책 아래에서 그렇게도 조용히, 그러나 치밀하고 조직적으로 일어날 수 있었는가? 그 기이한 침묵과 폭력의 공존이 궁금했다.


책장을 넘길수록 그 호기심은 곧 불편한 직시로 변했다. 수치로 환산된 죽음, 말없이 사라진 삶들, 국가라는 이름 아래 지워진 개인의 고통이 나를 압도했다.


내 안에서 또 다른 물음이 자라났다.

“이 책을 읽고 무엇을 기억하려는 것일까?”

그 물음은 단지 과거를 이해하는 데서 그칠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정확히 그건 그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의 존재를 내 현재로 불러오는 일, 그리고 그 기억이 나에게, 우리에게 어떤 윤리적 무게를 지우는가에 대한 고통스러운 물음이었다.


대약진운동. 학교에서 역사를 배울 때, 우리는 사건을 단 몇 줄로 요약하고 지나친다. "실패한 경제 정책으로 수많은 인명이 희생되었다."

이제 수는 정확히 얼마였을까. 그리고 그 숫자 속 사람들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었을까를 물을 수 있어야 한다.


프랑크 디쾨터의 《마오의 대기근》은 바로 그 질문들에 조용히, 그러나 혹독하게 답한다.

“4천5백만 명.”

숫자는 침묵한다. 그러나 그 침묵은 고통보다 깊다.


디쾨터의 목적은 단순히 숫자를 나열하는 데 있지 않다. 그는 통계에서 멈추지 않았다. 그 숫자들이 가리키는 자리, 그늘에 앉아있던 사람들의 숨결을 불러냈다.

굶주림 속에서 생을 마감한 아이의 이름 모를 무덤, 곡식을 감췄다는 이유로 공개 처형당한 노인, 가족을 살리기 위해 아이를 두고 도망쳐야 했던 어머니.


그 모든 숫자는 얼굴이었다.

디쾨터는 바로 그 얼굴을, 그 이름 없는 삶들을 다시 불러낸다.

그제야 우리는 역사라는 이름 아래 지워졌던 존재들을 다시 마주하게 된다.


나는 이 책을 통해 국가 권력이 어떻게 현실을 조작하고, 공동체를 해체하며, 인간성을 서서히 질식시키는지를 목격했다. 수치로 포장된 폭력, 침묵으로 관리된 비극, 그리고 책임지지 않는 권력의 냉담함이 페이지마다 드러났다.


동시에, 나는 또 다른 장면들을 보았다. 모든 억압과 공포의 그림자 아래에서도 누군가는 곡식 한 줌을 몰래 이웃에게 건넸고, 죽음의 그림자 속에서도 사람들은 서로를 끌어안았다.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세상 속에서도, 누군가는 끝내 사람으로 남았다.


절망과 고통의 끝없는 반복 속에서도, 인간은 인간이었다.

그 작고 희미한 연대와 연민이야말로 이 책의 가장 끈질긴 진실이었다.


나는 톺아보기로 숫자를 해체해, 그 안에 갇혀 있던 이들의 목소리를 다시 불러내려고 한다.

《마오의 대기근》이 수천만의 삶과 죽음, 침묵과 외침, 무너진 인간성과 끝내 버텨낸 존엄성의 기록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이 무거운 역사의 문을 조심스럽게 연다.

그 안에서, 오랫동안 잊혔던 누군가의 이름을 다시 불러낼 준비를 한다.

기억은 애도이며, 애도는 곧 책임이다.

그 점에서 이 책을 읽는 일, 그리고 이 글을 써 내려가는 일 모두 그 책임에 응답하려는 시도가 될 것이다.


1장. 시대의 문을 열다: 대약진운동의 기원

1958년, 중국은 스스로 ‘천하를 뒤엎을’ 준비를 마쳤다고 믿었다.

농민들은 호미 대신 철망을 들고 제철소로 향했고, 아이들은 교과서 대신 선전 구호를 외치며 거리로 나섰으며, 지식인들은 비판 대신 침묵과 복창의 기술을 익혔다. 나라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실험장이 되었다.


마오쩌둥은 “3년 안에 영국을 따라잡고, 15년 안에 미국을 능가하겠다”고 호언장담했다. 그의 머릿속에서 인간의 의지는 자연의 질서를 압도할 수 있었고, 집단의 열정은 현실을 단숨에 뛰어넘는 엔진이 되었다. 이상과 신념, 그리고 정치적 과시욕이 뒤섞인 이 선언은 곧 ‘대약진운동(大躍進)’이라는 이름으로 국가 전체를 휘감았다.


이렇게 해서, 전례 없는 ‘경제 실험’의 문이 열렸다. 그러나 그 문 너머에는 번영이 아닌, 기근과 파괴, 그리고 수천만의 죽음이 기다리고 있었다.


마오의 권력 기반과 이상주의

대약진운동은 단순한 경제 정책이 아니었다. 그것은 마오쩌둥의 사상, 그의 통치 방식, 그리고 그가 상상한 ‘사회주의적 인간상’의 총합이었다.

1949년, 국공내전에서 승리한 마오는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자로서 절대적인 정치적 입지를 확보했다. 이후 그는 당내 반대 세력을 철저히 숙청하며 권력을 중앙으로 집중시켰고, 그 누구도 그의 결정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체제를 만들어갔다.


마오는 소비에트식 경제 모델에 대한 의존을 경계했다. 스탈린식 중공업 우선 전략 대신, 그는 중국 특유의 농촌 중심 사회주의—말하자면 ‘인민의 힘으로 생산력을 단숨에 끌어올리는 방식’—을 실험하고자 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기존의 기술적 계획보다도 ‘정치적 열정’과 ‘사상적 순결성’을 우선시했다.


그에게 있어 진정한 사회주의 사회란 인간의 정신적 혁신을 바탕으로 기존의 자연 질서와 경제 법칙마저 뛰어넘는 것이었다. 대약진운동은 바로 그 이상주의의 가장 극단적인 표현이었다.


하지만 마오의 혁명은 단순한 체제의 교체에 그치지 않았다.

그것은 ‘의식의 혁명’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그는 인간이 본래의 이기심과 물질적 욕망을 벗어나, 집단과 혁명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헌신할 수 있다고 믿었다. 바로 그 믿음이 그의 이상주의의 핵심을 이뤘다.


마오는 인간의 본성을 재구성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토지와 공장, 생산수단을 재편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과제는 사람들의 ‘마음’을 다시 설계하는 일이었다. 사상의 통일, 감정의 동원, 행동의 규격화를 통해 그는 새로운 사회주의 인간을 만들어내려 했다.


그러나 이런 신념은 종종 현실의 조건을 무시하는 방향으로 흐르기 쉬웠고, 결국 그 맹목성은 비극의 씨앗이 되었다. 인간을 도구로 보는 시선, 현실을 이념의 부속물로 여긴 태도는 수많은 생명을 지우는 결과로 이어졌다.


1950년대 후반 중국 사회의 경제·정치적 상황

1950년대 중반까지 중국은 혁명 이후의 격동을 지나 일정 수준의 안정과 경제 성장을 경험했다.

토지개혁을 통해 전통적인 지주 계급은 해체되었고, 국가는 사회주의적 계획경제 아래에서 산업화에 박차를 가했다. 도시에서는 국영 공장이 세워지고, 농촌에서는 집단농장 체제가 정착되어 가는 듯 보였다.


그러나 이 과정은 결코 평탄하지 않았다.

토지개혁은 때로 극단적인 폭력과 강제력을 동반했고, 농민들의 반발과 저항은 억눌린 채 축적되었다. 도시와 농촌 간의 발전 격차는 커져만 갔고, 전반적인 자원 부족과 기술력의 한계는 국가 경제를 압박했다. 이 모든 요소는 사회 전반에 지속적인 긴장과 불안을 낳았다.


국제 정세 또한 중국의 진로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1953년 스탈린의 사망 이후, 소련은 일정 부분 ‘탈스탈린화’를 모색하며 노선을 수정했으나, 마오는 이를 이념의 변질로 간주했다. 이후 중소 관계는 점차 소원해졌고, 마오는 점점 더 자주적이고 독자적인 사회주의 노선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그는 내부의 동원을 통해 중국식 혁명의 정통성을 증명하고자 했고, 바로 그 결심이 대약진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다.


정치적으로도 마오는 체제 안정을 명분으로 강경책을 택했다.

‘백화제방(百花齊放)’ 운동을 통해 한때 허용되었던 표현의 자유는 오래가지 못했다.

곧이어 시작된 ‘반우파 투쟁’은 말 그대로 반대 의견을 제거하는 대대적인 숙청으로 이어졌고, 수십만 명의 지식인과 관료들이 ‘우파’라는 낙인을 안고 강제노동 수용소로 보내지거나 정치적 생명을 잃었다.


공포는 이제 체계 속에 내장되었다.

토론은 사라졌고, 당의 구호는 질문이 아닌 복종의 언어로 반복되었다. 하급 간부들은 상부에 잘 보이기 위해 실적을 과장했고, 그 과장은 곧 잘못된 정책의 근거가 되어 다시 상부로 되돌아갔다.

이러한 악순환은 곧 체계의 심장부, ‘진실을 알 수 없는 국가’를 의미했다.

현실은 은폐되고, 보고는 왜곡되었으며, 그 왜곡이 다시 현실을 결정했다.

결국, 대약진운동은 이러한 정치적 맹목과 공포의 통치 위에 세워진 모래성과도 같았다.


“철강 대약진”과 “인민공사”의 출현 배경

1958년, 마오는 “철강 생산은 공산주의의 척도”라고 선언했다.

그에게 있어 산업 생산의 수치는 단순한 경제 지표가 아니었다. 그것은 이념의 승리, 자본주의에 대한 사회주의의 우월함을 증명하는 상징이었다. 마오는 영국과 미국을 추월하는 것을 목표로 설정했고, 이 목표는 곧 전 국민적 ‘총동원’으로 이어졌다.


전국 각지에 소규모 제철로인 ‘백련(白煉) 제강로’가 설치되었다.

마을마다 연기가 피어오르고, 학교 운동장과 논바닥 위에 임시 용광로가 들어섰다. 수천만 명의 농민과 노동자, 학생과 교사, 심지어 주부들까지 농사일과 일상생활을 멈추고 철을 굽기 시작했다. 그들은 고철, 가재도구, 심지어 식기와 농기구까지 녹여가며 ‘생산량’을 채웠다.


그러나 이 거대한 열정은 실체 없는 숫자에 불과했다.

즉흥적으로 만든 쇳덩이는 대부분 산업용으로는 전혀 사용할 수 없는 불순물 덩어리에 지나지 않았다. 마오의 철강 대약진은 국가 자원의 낭비였고, 농촌의 노동력을 고갈시키는 자해적 운동이었다. 불타는 제철로는 마오의 의지를 상징했지만, 동시에 중국의 생산 기반이 무너지고 있다는 현실을 보여주는 불길한 상징이기도 했다.


이와 동시에, 또 하나의 ‘집단화 실험’이 전국을 휩쓸었다.

바로 ‘인민공사’의 전면적 도입이다. 농민들의 생활 단위였던 ‘농가’는 폐지되었고, 식사는 공공 식당에서, 노동은 분업 없이 전체가 함께 수행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개인 소유는 죄악시되었고, 가족 개념마저 해체되기 시작했다. 인민공사는 생산의 조직화를 넘어서, 삶 전체의 통제를 목표로 한 제도였다.


그렇게 ‘생산’은 도식이 되었고, ‘공동체’는 실험실이 되었다.

모두가 앞만 보고 달려야 했기에, 현실을 되돌아볼 시간은 없었다. 그러나 그때 이미, 기근은 조용히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같은 해, 또 하나의 상징이 전국을 휩쓸었다. 바로 ‘인민공사(人民公社)’였다.

이는 마오가 그린 공산주의 공동체의 이상형이자, 중국식 사회주의의 극단을 실험한 제도였다. 인민공사는 단순한 행정 단위를 넘어선 전인적 통제 체계였다. 사유재산은 철저히 폐지되었고, 식사는 공동 식당에서 제공되었으며, 노동력은 개인이 아닌 국가의 명령에 따라 배치되었다.


이 체제의 핵심은 ‘전체주의적 일상화’였다.

아침 점호로 하루가 시작되고, 저녁 선전으로 마무리되며, 하루 종일 정치 학습과 ‘혁명가요’가 이어졌다. 구호는 반복되었고, 행동은 동일화되었으며, 감정조차 표준화되기를 요구받았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은 사라졌고,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집단적 주문만이 남았다.


개인의 삶은 제도에 흡수되었고, 사적인 감정은 공동체의 이익 앞에서 침묵해야 했다.

‘자기’라는 말은 점점 금기어가 되었고, ‘우리’라는 이름 아래 모든 차이가 지워졌다. 인민공사는 생산의 조직화를 넘어서, 인간 존재의 방식 자체를 다시 짜려는 시도였다.


이처럼 철강 대약진과 인민공사는 1958년, 마오의 이상주의가 구체화된 해였다.

하지만 그 실험은 곧 거대한 파국의 문을 열고 있었다. 과잉된 동원, 비현실적 목표, 통제의 일상화는 하나의 방향으로 수렴한다.

바로, 굶주림과 침묵, 그리고 죽음으로.


그러나 인민공사는 이상적인 공동체가 아닌, 실제 삶을 무너뜨리는 제도로 작동했다.

‘공동 식사제’는 처음에는 평등의 상징처럼 보였지만, 곧 식량의 무분별한 낭비와 과도한 소비를 불러왔다. 잉여 식량은 없었고, 조절도 없었으며, 마침내 배급선마저 길어졌다.

밥그릇은 하나였지만, 숟가락은 너무 많았다.

식량이 바닥나기 시작했을 때, 이미 늦어 있었다.


농민들은 더 이상 자신의 밭을 가꿀 수 없었고, 가정은 생산 단위로 전환되며 해체되었다. 공동체는 연대의 공간이 아닌, 감시와 경쟁, 의심의 무대로 바뀌었다. 누가 더 열심히 일했는가 보다 누가 더 ‘혁명적인가’가 중요해졌고, 서로를 감시하고 고발하는 일이 생존의 전략이 되었다.


허위 생산량 보고는 이런 왜곡된 체계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했다.

마을 간의 경쟁은 수치를 부풀리게 만들었고, 그 숫자는 그대로 중앙정부의 계획에 반영되었다. 계획은 현실과 무관하게 다시 하달되었고, 무리한 할당은 또 다른 동원과 착취를 낳았다.

그리하여 전 국토는 거대한 실험실이 되었다.

문제는 그 실험이 이론도, 과학도 아닌 정치적 신념 위에 세워졌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실험대 위에 놓인 것은 곡식이 아니라, 바로 사람들의 삶이었다.


마오의 꿈, 그리고 그 어두운 시작

마오쩌둥은 중국을 바꾸고자 했다.

그는 제국의 잔재를 지우고, 농민이 중심이 되는 새로운 사회주의 국가를 세우려 했다. 그러나 그 꿈은 사람을 이상에 맞추기 위해 사람을 깎아내는 일이었고, 인간을 도구화하는 과정이었다. 통계는 신화가 되었고, 진실은 권력 앞에서 무너졌다. 마오의 혁명은 현실의 굶주림을 보지 않았고, 목소리 없는 죽음을 계산하지 않았다.


대약진운동은 그런 마오의 신념이 처음으로 전 국민의 삶을 직접 짓누르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이상과 현실은 같은 언어를 쓰지 않았고, 신념과 폭력은 하나의 깃발 아래 엉켜 있었다.

혁명은 구호로 시작되었지만, 그 뒤를 따르는 것은 굶주림과 침묵, 그리고 이름 없는 무덤이었다.

그 첫걸음은 찬란한 수사로 포장되었지만, 그것이 향한 곳은 인류가 가장 외면하고 싶었던 참상의 심연이었다.


이제 우리는 그 서막을 넘었다. 곧 도달하게 될 장면은, 훨씬 더 어둡고, 훨씬 더 견디기 어려운 진실들이다.

그러나 이 비극의 기원을 직시하지 않고서는, 우리는 대기근을 단지 ‘실패한 정책’으로 축소해 버릴 것이다.

마오의 꿈은 단순한 착오가 아니었다. 그것은 체계적인 억압과 구조화된 망각의 서막이었고, 수천만의 삶을 집어삼킨 신념의 그림자였다.


그 기원을 외면할 때, 비극은 반복되지 않지만 망각은 반복된다.

그리고 그 순간, 역사는 다시금 무뎌진다.



2장. 이상과 현실의 균열: 정책 실패의 구조

‘이상’은 아름다웠다.

모두가 평등하고, 굶주림이 사라지며, 노동이 해방의 상징이 되는 사회. 마오쩌둥은 그런 미래를 그렸다. 그러나 그 이상은 하늘에 떠 있었고, 현실은 땅속 깊이 가라앉아 있었다. 대약진운동은 그 간극을 메우려는 집단적 몸부림이었다. 동시에, 바로 그 틈에 빠져 사라진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이기도 했다.


마오의 목소리는 강철처럼 단단했고, 그의 꿈은 신앙처럼 흔들림 없었다.

하지만 그 신념은 점점 현실의 경계를 무시했고, 국가의 구호는 마치 구멍 난 통처럼 메아리만을 남겼다.

정책은 현실을 보지 않았고, 대신 그것을 덮으려 했다.

이상은 하늘에 있었지만, 그 밑에서 살아가던 사람들의 삶은 점점 피폐해졌다.

이 장은 바로 그 균열, 즉 꿈과 현실 사이의 구조적 실패를 들여다본다.


허위 보고와 상벌 체계: 거짓말이 권력이 된 사회

대약진운동이 실패로 귀결된 가장 핵심적인 구조는 ‘허위 보고’였다.

국가는 생산량을 성과의 유일한 지표로 삼았고, 곡물 몇 석, 철 몇 톤, 면화 몇 필이라는 숫자만이 모든 것을 말해주었다. 그러나 정작 그것을 정확히 산출할 체계는 존재하지 않았고, 무엇보다 그러한 수치를 의심하거나 비판할 자유는 허용되지 않았다.


그 결과, 대부분의 현지 간부는 생존과 승진을 위해 현실보다 훨씬 부풀려진 수치를 상부에 보고했다.

허위는 상벌 체계와 결합하면서 필연이 되었다.

상부의 신뢰를 얻기 위해서는 ‘성공한 혁명’을 증명해야 했고, 이는 곧 숫자의 조작을 의미했다.

이렇게 왜곡된 수치는 다시 중앙의 계획에 반영되었고, 그 계획은 또다시 더 많은 동원을 요구했다.

기만은 순환되었고, 그 순환 속에서 농민들의 현실은 점점 사라졌다.

정책은 현실을 반영하지 못한 채, 허위의 사슬에 매여 국민을 더욱 깊은 굶주림 속으로 몰아넣었다.


“우리 현은 헥타르당 5톤의 수확을 기록했습니다.”

“우리 군은 헥타르당 10톤을 넘었습니다.”

현실과는 거리가 먼 숫자였다. 그러나 그 거짓말은 곧 ‘모범 사례’가 되었고,

모범이 된 거짓은 상을 받았다.


성과를 가장 잘 ‘연출’한 이가 가장 큰 보상을 받는 체제.

진실은 침묵했고, 거짓은 권력이 되었다.


이런 체계 아래서 진실은 짐이었고, 정직은 죄였다.

성과가 낮은 간부는 ‘혁명 의지가 부족한 자’로 낙인찍혔고,

성과가 높은 간부는 ‘당에 대한 충성의 상징’으로 빠르게 승진했다.


누가 감히 말할 수 있었을까.

“그 숫자는 과장입니다.”라고.

그 한마디는 곧 숙청의 서곡이었고, 침묵은 살아남기 위한 유일한 전략이었다.


그렇게 거짓은 체계를 점령했다.

고위층은 전국의 생산량이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다고 믿었고,

그 믿음은 더 많은 곡식의 징발로 이어졌다.

더 많은 인력이 동원되었고, 더 많은 밥그릇이 비워졌다.

그리고 결국, 더 많은 이들이 굶주려 쓰러졌다.


계획경제의 폐쇄성과 권위주의: 누구도 멈출 수 없었던 재앙

중국의 경제는 철저한 계획경제 체제였다.

성(省)에서 시(市)로, 시에서 현(縣)으로, 다시 촌(村)까지 모든 생산과 유통은 국가가 정한 수치에 따라 움직였다.

중앙정부는 할당량을 하달했고, 하위 단위는 그 수치를 무조건 따라야 했다.

각 단계는 생산량과 수확고를 숫자로만 보고했으며, 그 숫자들은 곧 ‘정치적 성실성’의 지표가 되었다.

문제는 그 숫자들이 현실을 반영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보고된 수치는 허위였고, 그 허위는 다시 다음 계획의 기준이 되었다.

중앙은 이미 ‘인민이 풍요롭다’는 신화를 믿고 있었고, 그 신화를 확인할 수단도, 그것을 의심할 여유도 없었다.


계획은 수정되지 않았고, 오류는 반복되었으며, 권력은 그 모든 왜곡을 정당화했다.

결국 체계는 자정 능력을 상실했고, 재앙은 아무도 멈출 수 없는 속도로 확대되었다.

그것은 단지 행정의 실패가 아니었다.

그것은 권위주의가 진실을 배제한 순간, 체계 전체가 어떻게 눈먼 질주를 하게 되는가를 보여주는 증거였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권위주의’였다.

마오쩌둥의 말은 곧 진리였고, 그 진리를 반박하는 것은 정치적 자살과 같았다.

중앙의 방침에 의문을 제기하는 행위는 곧 ‘반당(反黨)’으로 간주되었으며, 그 순간부터 개인의 경력은 물론 생존조차 위협받았다.


관료제는 오직 수직적으로만 존재했다.

상명하복은 절대 원칙이었고, 수평적 피드백은 구조적으로 봉쇄되어 있었다.

누군가 잘못된 결정을 내려도 그것을 바로잡을 장치는 없었다.

오히려, 그 잘못은 ‘충성의 결과’로 포장되어 더 높은 자리로 나아가곤 했다.


그렇게 해서 하나의 잘못된 판단은 도미노처럼 체계를 타고 내려갔고,

결국 온 나라를 오판의 소용돌이 속에 몰아넣었다.

그 누구도 멈출 수 없었다. 왜냐하면, 멈추려는 순간 그 사람부터 사라졌기 때문이다.


수많은 간부들은 마음속으로 그것이 불가능한 목표임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들은 서로의 침묵에 의지했고, 그 침묵은 전체주의적 권력구조 속에서 곧 ‘당연한 질서’로 굳어져 갔다.

마오 한 사람의 이상은 거대한 수직 권력 체계를 타고 현실을 짓눌렀고,

그 압박 아래에서 사회는 점점 숨을 잃어갔다.

말하지 않는 것이 생존의 방식이 되었고, 현실은 점점 환상 속으로 밀려났다.


토지 개간과 식량 정책의 파괴적 효과

대약진운동의 핵심 과제 중 하나는 ‘토지 개간’이었다. 마오와 당 지도부는 국토를 더 많이 농사짓게 만들면 식량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 믿었다. 그리하여 산을 깎고 강을 돌리며, 심지어 사막을 논으로 만들겠다는 야심 찬 계획이 수립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시도는 자연에 대한 이해가 결여된, 무모한 동원이자 맹목적 신념의 산물이었다. 생태계는 파괴되었고, 토양은 침식되었으며, 수로는 비효율적으로 변경되었다. 무엇보다도, 이 무리한 개간 작업은 농민의 노동력을 극한까지 소진시켰다.


동시에 식량 정책 또한 파국을 향해 나아갔다. 과도하게 설정된 생산 목표는 허위 보고를 낳았고, 그 허위 수치는 중앙정부의 징발량을 더욱 부풀렸다. 현실보다 훨씬 많은 곡식이 국가에 징발되었고, 남은 것은 거의 없었다.

공동 식사제 아래서 개인이 직접 식량을 관리하거나 저축할 수 없었기에, 농민들은 굶주림에 무방비로 노출되었다.


이 모든 혼란은 자연과 인간, 생태와 제도 사이의 균형을 완전히 무너뜨렸다. 식량 문제를 해결하겠다던 정책은 오히려 기근을 부추겼고, 땅은 더 이상 생명을 키우는 공간이 아니라 인간 실험의 전장이 되었다.


또한 기존의 농업 기술과 농민들의 오랜 경험은 ‘봉건적 구습’으로 낙인찍혔다. 대신 당국은 ‘심층 경운’, ‘고밀도 파종’, ‘밀식 재배’ 같은 검증되지 않은 실험적 농법을 전면적으로 도입하라고 강요했다. 이는 과학이 아닌 이상에 기반한 명령이었다.

그 결과, 토양은 쉽게 지력(地力)을 잃고, 작물은 빛과 영양 부족으로 병충해에 시달렸다. 생산량은 오히려 줄어들었지만, 현지 간부들은 상부의 기대를 충족하기 위해 여전히 ‘대풍작’을 보고했다. 그 허위 수치는 다시 곡물 징발량을 부풀렸고, 농민들에게 돌아갈 식량은 더욱 줄어들었다.


이러한 잘못된 식량 정책은 지방을 말라죽게 했다. 마을마다 곡식 저장고는 텅 비었고, 주민들은 배급을 기다리다 하나둘씩 굶어 죽어갔다. 당시의 내부 문서에 따르면, 일부 지역에서는 징발된 곡식의 양이 마을 주민 전체가 1년 동안 먹을 수 있는 분량을 넘었다. 하지만 누구도 그것을 막지 못했다. 징발을 거부하는 것은 곧 반혁명 행위로 간주되었고, 반혁명은 곧바로 체포와 구금, 심지어 처형으로 이어졌다.


또한 ‘공동식사제’는 재앙을 더욱 가속화했다. 개인이 음식의 소유권을 잃으면서, 식사에 대한 통제는 완전히 붕괴되었다. 처음에는 과도한 소비로 식량이 급속히 바닥났고, 뒤이어 극심한 배급 통제로 굶주림이 시작되었다. 누군가는 죽기 전 마지막 끼니를 위해 긴 줄에 섰고, 또 누군가는 남은 죽 한 그릇을 두고 싸우다 쓰러졌다.


맺으며: 균열을 직시한다는 것

이상은 현실을 향한 간절한 지향이었지만, 결코 현실 그 자체가 될 수는 없었다. 대약진운동은 ‘의지의 승리’라는 화려한 기치 아래, 사실과 경험, 과학과 비판을 철저히 억압했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정책은 허위 보고와 권위주의, 계획경제의 폐쇄성과 맞물려, 결국 돌이킬 수 없는 재앙으로 가는 길을 열었다.


이 균열을 외면한 채, 역사를 단지 실패한 정책의 기록으로 축소한다면, 우리는 다시금 같은 비극 앞에 무기력해질 뿐이다. 진실을 마주하는 용기만이, 앞으로의 길을 조금이라도 밝힐 수 있을 것이다.


디쾨터는 이 모든 구조를 냉철하게 드러내며 질문한다. “이 재앙을 막을 수는 없었는가?”

우리는 알고 있다. 그것이 단순히 수확량의 문제도, 효율성의 문제가 아니었다는 것을. 그것은 인간을 위한 정치를 가장한, 결국 인간을 통제하는 체제로 변질되었을 때 발생하는 필연적 구조적 붕괴였다.


이상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그 이상은 스스로에 대한 끊임없는 의심과 성찰을 통해서만 진정한 힘을 가질 수 있다. 의심하지 않는 이상은 독선이 되고, 독선은 결국 재앙을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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