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힌 자들의 역사: 《마오의 대기근》과 기억의 윤리
3장. 대지의 침묵: 굶주림의 메커니즘
굶주림은 조용히 다가왔다. 총성도, 혁명가의 구호도 없이, 사람들의 그릇에서 한 숟가락씩 차분히 사라지는 방식으로. 굶주림은 소리보다 무거웠고, 말보다 날카로웠으며, 삶 깊숙이 스며들었다. 그 어떤 폭력보다도 더 오래, 더 깊게 사람들을 옥죄었다.
대약진운동이 본격화된 1959년부터, 중국의 수많은 농촌 마을은 아침마다 점점 줄어드는 인원으로 점호를 시작했다. 배고픔에 쓰러져 죽은 자들, 굶주림을 피해 탈출했다가 붙잡혀 처벌받은 자들, 그리고 밤새 사체를 짊어지고 마을 외곽으로 나간 이들의 이름은 명부에서 차례로 지워졌다. 하지만 그들을 삼킨 것은 전염병도, 전쟁도 아니었다. 바로 ‘국가의 정책’이었다.
곡물 수출과 인민의 굶주림
대기근의 가장 도발적인 진실 중 하나는, 굶주림이 단순한 식량 부족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1958년부터 1961년 사이, 중국은 해외로 수십만 톤의 곡물을 수출했다. 소련과 동유럽 국가들과의 외교적 관계를 유지하고,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신생 독립국가들에 외교적 선물을 보내며, 사회주의 체제의 ‘성공’을 과시하려는 목적이었다. 마오는 중국 인민이 굶주리더라도, 세계 무대에서의 체면과 영향력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국가는 굶주림을 문제 삼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을 ‘혁명정신의 훈련’으로 미화하며 포장했다. 인민들은 식량을 강제로 내놓으면서도, “사회주의는 희생을 요구한다”는 구호를 되뇌어야 했다. 굶주림은 개인의 고통이 아니라, 체제의 위엄과 마오주의의 순결을 지키기 위한 ‘혁명의 의식’으로 전환되었다. 국가에게 굶주림은 부끄러운 실패가 아니라, 견고한 권력과 이념의 상징이었다.
식량 탈취와 저장고의 진실
마을마다 수확된 곡식은 수확 직후 곧바로 징발되었다. ‘식량공작대’는 무장한 채 마을로 들어와 곡식을 샅샅이 조사했고, 주민들이 항의하거나 저항하는 행위는 곧 ‘반혁명 행위’로 규정되어 처벌받았다. 몇 줌의 쌀이라도 몰래 숨겨두었다가 발각되면, 가족 전체가 엄중한 체벌을 받았다. 아이들까지 나무에 묶인 채 공개 비판을 당하는 광경도 있었으며, 곡식을 지키려다 목숨을 잃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이처럼 식량 탈취는 단순한 수탈을 넘어, 공포와 폭력으로 주민들의 삶을 옥죄었다.
그러나 그 모든 곡식이 당장 쓰이거나 소비된 것은 아니었다. 일부는 지방 저장고에 방치되었고, 어떤 저장고는 열쇠를 가진 간부들 외에는 접근조차 금지되었다. 디쾨터는 수많은 문건을 통해, 일부 지역의 저장고에 곡식이 썩어가고 쥐들이 들끓었다는 증언을 기록했다.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마을 주민들이 담 너머로 바라보던 곡식 냄새나는 창고는 국가의 자존심이자, 인간성의 종말을 의미했다.
“저장고 안에서 쥐들이 곡식을 뜯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우린 그 소리를 들으면서 아이들이 죽는 걸 봤습니다.” — 한 생존자의 증언
일상 속 굶주림의 정황과 생존의 방식들
굶주림은 인간의 일상을 송두리째 부쉈다. 식사는 하루 한 끼로 줄어들었고, 그마저도 수수껌이나 나무껍질 같은 비식용 재료로 대신해야 했다. 마을 곳곳에는 나무뿌리와 진흙을 파먹은 흔적이 선명하게 남았으며, 소화되지 않은 풀을 게워 내는 아이들의 모습이 흔하게 목격되었다.
공동식당은 점차 죽 대신 물로 채워졌고, 몇몇 지역에서는 배급표 자체가 사라져 굶주림을 피할 방법조차 사라졌다. 사람들은 굶주림을 견디기 위해 몸에 해로운 양잿물에 볏짚을 담가 삶아 먹거나, 마대 같은 질긴 섬유질을 입에 넣었다. 그때의 ‘음식’은 더 이상 음식이 아니었고, 그 자체가 절망 속에서 살아남으려는 처절한 저항의 몸부림이었다.
탈출을 시도하는 일은 곧 죽음과 맞서는 일이었다. 마을 경계마다 엄중한 자위대가 버티고 있었고, 한밤중에 도망친 이는 배신자의 굴레를 썼다. 굶주림에 몸부림치던 사람들은 식량을 훔치다 붙잡히면 공개 처벌을 받았고, 어떤 이는 굶겨 죽임을 당하기도 했다. 한 어머니는 어린 자식을 팔아 겨우 감자 한 덩이를 샀고, 형제들은 생존을 위해 서로의 음식을 빼앗으며 갈등했다.
인육에 관한 보고는 이 비극에서 가장 침묵하고 싶은 장면이자, 인간 존엄이 송두리째 무너진 절정이었다. 디쾨터는 공식 문건과 생존자들의 증언을 통해, 극한의 굶주림 속에서 부모가 아이를 먹고, 아이가 부모의 시신을 요리했다는 참담한 진실을 기록한다. 이는 단순한 야만의 기록이 아니라, 절망이 인간성을 끝까지 밀어붙인 비극의 현장이다.
침묵한 대지, 그 위에 새긴 기록
중국의 대지는 한 번도 소리 내 울지 않았다. 강물은 쉼 없이 흘러갔고, 들판은 계절 따라 변했지만, 그 땅 위에 쓰러진 수천만의 목숨은 고요히 사라졌다. 그러나 디쾨터는 그 침묵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그는 묻는다. “왜 아무도 멈추지 않았는가?” 그리고 더 깊은 절망 속에서 묻는다. “이토록 많은 이들이 죽는 동안, 국가는 무엇을 지켰는가?”
이 장은 단순한 기근의 기록을 넘어선다. 그것은 기근이 어떻게 구조화되고, 은폐되며, 체제화되었는지를 밝힌다. 마오의 대기근은 자연재해가 아니라, 계획된 침묵이었고, 명령된 굶주림이었다. 그 침묵 속에서, 사람들은 울지도 못한 채 조용히 스러져갔다.
이제 우리는 그 침묵에 귀 기울인다. 그리고 역사의 이름으로, 그 비극이 다시는 되풀이되지 않도록 기록한다.
4장. 공포의 감시국가: 말할 수 없는 사회
어느 날, 마을 회관 앞에 한 사람이 끌려 나왔다. 죄목은 ‘식량 징발에 대한 불만 표시’, 벌은 ‘공개 자아비판과 재교육’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 그 남자는 곧 사라질 것이고, 그의 아이들은 학교에서 따돌림당할 것이며, 그의 이름은 기록에서 지워질 것이라는 것을.
작은 목소리조차 용납되지 않는 사회. 말하는 것이 곧 위험이었고, 침묵만이 살아남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공포는 개인을 옭아맸고, 감시의 눈은 사소한 행동까지 감시했다. 서로를 감시하고, 밀고하며, 불신은 공동체를 해체시켰다.
국가는 완벽한 통제를 꿈꾸었고, 그 꿈은 사람들의 일상을 감옥으로 만들었다. 의심과 두려움 속에 숨죽인 채, 누구도 자유롭게 말할 수 없었다. 대기근의 고통은 단지 굶주림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말하지 못하는 고통, 보이지 않는 감시의 공포였다.
말은 금지되었다. 의문 역시 금지되었다. 고개를 갸웃하는 표정마저도 위험이 되던 시대.
이 장은, 마오의 대약진운동이 어떻게 하나의 거대한 감시 시스템으로 전화되었는지를 탐색한다.
그 감시망은 단지 국가 기관의 통제에 그치지 않았다. 이웃과 가족, 심지어 친구들까지 서로를 감시하는 체제로 확장되었다. 작은 불만과 의심도 ‘반혁명 분자’로 몰려 처벌받았고, 공개 자아비판은 일상이 되었다.
개인의 사생활은 완전히 사라졌고, 공포는 사람들의 마음 깊숙이 뿌리내렸다. 누구도 자유롭게 말하지 못했고, 모든 행위가 감시받는 사회에서 진실은 침묵 속에 묻혔다.
이 체제 속에서 ‘말할 수 없는 사회’는 권력의 무자비한 얼굴이자, 인간성을 억압하는 가장 깊은 상처로 남았다.
비판 금지와 정보 통제: 질문이 곧 반역이던 시절
정책은 실패했지만, 그것을 말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다. “생산량이 줄었습니다”라는 한마디는 곧 ‘당의 방침에 대한 회의’로 연결되었고, 이는 ‘반혁명 분자’로 낙인찍히는 지름길이었다.
간부들조차 회의 석상에서 ‘객관적 수치’를 말하지 못했다. 수치는 감정이 되었고, 감정은 충성의 척도로 변질되었다.
정보의 왜곡과 은폐는 체제의 생존을 위한 방어기제로 작동했다. 내부의 문제를 외부에 드러내지 않기 위해, 실패한 정책은 ‘대풍작’으로 포장되었고, 보고서는 점점 허위와 과장으로 가득 찼다.
질문하는 자는 적으로 간주되었고, 진실을 말하는 것은 체제에 대한 배신이었다. 공포는 더욱 깊어졌고, 사회 전체가 자기 검열에 잠식되었다.
이 시절, 정보는 통제되고, 진실은 말살되었다. 질문은 반역이었다.
신문은 여전히 ‘대풍작’을 보도했고, 라디오는 ‘마오 주석 만세’를 외쳤다. 국가는 실패를 인정하지 않았고, 인정할 수 없었다.
정보는 철저히 상부에 의해 관리되었고, 각 지역은 중앙에 ‘좋은 소식’만을 보낼 의무를 지녔다. 비판이 사라진 곳엔 찬양만이 남았다.
그것이 마오 시대의 정보 질서였다. 허위와 선전이 진실을 대신했고, 국민들은 진짜 현실과 동떨어진 뉴스에 갇혔다.
이 시스템은 진실의 왜곡뿐 아니라, 정책 실패의 책임 회피와 권력 강화의 도구로 작용했다. 말할 수 없는 사회, 그 속에서 사람들은 점점 더 깊은 침묵에 빠져들었다.
지식인은 침묵했고, 기자는 복창했다. 일반 시민은 의심을 속으로 삼켰다. 모두가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는 가운데 실제의 삶은 점점 공허해졌다.
굶주림과 죽음이 일상인 현장에서도 사람들은 ‘국가의 승리’를 말해야 했다. 언어는 더 이상 현실을 담는 그릇이 아니라, 진실을 감추는 베일이 되었다.
그 베일 아래 숨겨진 고통은 더욱 깊어졌고, 사람들은 말 없는 절망 속에 갇혔다. 그 침묵은 체제의 감시와 통제 아래, 가장 무거운 폭력이 되었다.
‘고의적 침묵’과 ‘제도적 눈감기’
디쾨터는 반복해서 지적한다. 이 참극은 단순한 중앙정부의 착오나 무능이 아니었다.
수많은 간부와 공무원, 지식인, 그리고 조직의 구성원들이 ‘보았지만’ 침묵했다. 그들은 현실을 알면서도 문제를 은폐하거나 외면했다.
이로써 기근은 개인의 실패가 아니라, 집단적이고 제도적인 공모 속에서 구조적으로 발생한 비극이었다. 이 ‘고의적 침묵’과 ‘제도적 눈감기’가 대약진운동 대기근의 가장 어두운 그림자다.
그들은 곡식을 징발하면서도, 주민들의 시든 얼굴을 똑똑히 보았다.
폐교된 학교, 굶어 죽어가는 어린이들의 모습을 알면서도 입을 닫았다.
말하지 않았고, 진실을 보고하지 않았다.
아니, 보고했지만 일부러 왜곡하고 거짓을 섞었다.
거짓은 때로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었고,
또 때로는 승진과 개인의 안위를 위한 냉혹한 계산이었다.
그렇게 체제는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진실을 은폐했고,
수많은 목숨은 침묵 속에 희생되었다.
가끔 누군가는 양심의 목소리를 냈다.
하지만 곧 조직의 ‘사상 점검’이 시작되었고,
그로 인해 가족까지 불이익을 당했다.
그 기록은 평생을 따라다니며 짐이 되었다.
체제는 단순한 명령이 아니라,
구조적으로 인간의 눈을 감기고 입을 닫게 만들었다.
마치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듯,
침묵은 사회 전체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
그 속에서 공모는 선택이 아니라,
유일한 생존 방식으로 굳어졌다.
공개 처형, 고문, 폭력은 일상이 되었다.
침묵은 강요되었고, 저항은 무자비하게 처벌당했다.
특히 마오가 강조한 ‘계급투쟁’은
대기근 시기의 공포를 더욱 체계적이고 조직적으로 만들었다.
굶주림을 겪는 가난한 자가 아니라,
‘혁명 의지가 의심되는 자’가 표적이 되었고,
굶주림을 비판하는 이는 ‘사상 불순자’로 낙인찍혔다.
징발에 반발하는 자는 ‘부농’이라는 이름 아래 처벌받았다.
공개 처형은 마을 광장에서 이루어졌고, 아이들까지 동원되어 모두가 ‘잘못된 자의 최후’를 목격하며 침묵을 배우도록 강요받았다. 고문은 일상적인 수단이었으며, 식량을 숨겼다는 이유만으로 발바닥에 끓는 물을 붓고 손톱을 뽑는 잔혹한 행위가 자행되었다. 강간과 가족에 대한 협박 또한 폭력의 도구로 사용되었으며, 국가의 이름 아래 자행된 모든 폭력은 정당성을 부여받았다.
이처럼 공포와 폭력은 체제의 기초가 되었고, 저항은 곧 죽음과 맞닿았다.
가장 끔찍한 것은, 이런 폭력이 예외가 아니라 일상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사람들은 어느 순간부터 “누가 또 사라졌는지”보다 “이번에는 어디에서?”를 먼저 물었고, 공포는 삶의 밑바탕이 되었다. 사회 전체가 마치 산 채로 진흙 속에 파묻힌 듯 무기력하게 움츠러들었으며, 모두가 스스로를 숨기고 살아야만 했다.
말할 수 없던 시대, 말해야 하는 지금
디쾨터가 『마오의 대기근』에서 가장 강력하게 드러낸 주제 중 하나는 바로 이 ‘침묵의 구조’다. 굶주림과 죽음, 고통이 끊임없이 이어졌지만, 그 모든 것을 제대로 이름 붙이고 말할 수 없었던 시대. 말하는 자는 사라졌고, 침묵하는 자만이 살아남았다. 이는 단순한 정책 실패를 넘어선, 인간 존엄의 근본적 붕괴를 의미한다. 오늘 우리는 그 침묵을 깨고, 역사의 어둠 속에 숨겨진 진실을 마주해야 한다.
침묵은 개인의 선택이 아니었다. 그것은 국가가 만든 거대한 감옥이었다. 수백만이 굶주리던 그 시절에도, 마오를 찬양하는 노래는 끊임없이 울려 퍼졌다. 이는 감시가 철저히 작동하지 않고서는 결코 가능하지 않은 일이었다. 그리고 그 감시를 가능하게 한 것은 단순한 통제가 아니라, 제도 자체에 내재된 맹목성과 구조화된 공포였다. 이 체제의 그물망 속에서, 침묵은 강요된 생존 방식이자 저항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기억하라, 그 침묵을
이 장을 통해 우리는 묻는다. 대기근은 왜 멈추지 못했는가? 수천만이 죽는 동안, 왜 아무도 고개를 들지 못했는가?
그 대답은 단순하지만 잔인하다. 고개를 든 자는 먼저 죽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그들의 목소리를 다시 살려낼 수 있다.
침묵이 강요되었던 그 시대에, 우리가 지금 말하는 일은 곧 기억의 정의이며, 또 다른 폭력을 막는 사적 선언이다.
과거의 침묵을 깨뜨리는 목소리가 다시는 같은 비극이 반복되지 않게 만드는 힘이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