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표절, 리메이크 시대의 윤리와 상상력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는 존재하는가?
오늘날 우리는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이야기 속에서 살아간다. 영화관에 가면 속편, 리부트, 프리퀄, 세계관 확장 등 다양한 이름을 달고 다시 돌아온 이야기들이 줄지어 상영된다. 헐리우드의 슈퍼히어로 프랜차이즈는 이제 하나의 독립된 서사를 만들기보다, 이미 구축된 이야기의 틀 안에서 수많은 장르와 캐릭터를 반복적으로 재조합하는 데 집중한다. 문학계에서도 고전을 현대적으로 각색하거나, 특정 작가의 서사 구조를 변형해 재활용하는 작업은 더 이상 낯설지 않다.
온라인 콘텐츠 플랫폼에서도 이와 유사한 흐름은 뚜렷하다. 인기 있는 영상 포맷은 ‘챌린지’나 ‘리액션’이라는 이름 아래 무수히 복제되고 확산된다. 유튜브, 틱톡, 인스타그램 릴스 등에서는 '처음 보는 듯 익숙한' 영상들이 끝없이 반복되며 소비된다. 이처럼 새로움을 추구하는 듯하면서도 반복을 본질적으로 내포한 창작물의 홍수 속에서, 우리는 묻게 된다. 이 시대에 과연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란 가능한 것일까? 창작이란 본디 ‘리메이크’였던 것은 아닐까?
이러한 현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일각에서는 이 같은 반복과 재생산을 창작의 위기, 상상력의 고갈, 혹은 자본 중심의 산업 구조가 빚어낸 ‘서사의 빈곤’으로 진단한다. 이야기가 소비와 유통의 논리에 완전히 포섭되면서, 진정한 창작이 점차 설 자리를 잃고 있다는 우려다. 반면, 또 다른 시각은 반복과 차용, 재구성 그리고 재해석이야말로 창작의 본질이라고 본다. 이들은 우리가 여전히 다양한 방식으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있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말하는 ‘새로움’은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는 독창성이라기보다, 기존의 것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낯익은 틀을 낯설게 바꾸는 창의적 변형에 가깝다.
사실 이야기를 창작한다는 행위는 오래전부터 전통과 관습, 집단의 기억 속에 깊이 뿌리내려 왔다. 구술 서사 시대부터 사람들은 영웅담, 사랑 이야기, 기원 신화 등 반복되는 모티프를 통해 삶의 질서를 이해하고 그 의미를 전해왔다.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는 ‘떠돌이의 귀환’이라는 보편적 서사의 원형이 되었고, 성서의 이야기들은 수천 년 동안 문학과 회화, 음악의 바탕이 되어왔다. 중세 유럽에서는 고대 그리스 신화를 다시 쓰고, 근대 문학은 이를 새롭게 해석했으며, 현대는 그 모든 층위를 각색해 디지털 스크린 위에 다시 펼쳐내고 있다. 이처럼 모든 이야기는 근본적으로 ‘되돌아보기’와 ‘재서술하기’의 반복 속에서 탄생한다고 할 수 있다.
창작이란 정말 완전히 새로운 무언가를 세상에 내놓는 일일까? 아니면 기존에 존재하던 세계의 구조, 이미지, 개념들을 다시 엮고 변형해 ‘지금-여기’의 의미를 재구성하는 작업일까? 루마니아 출신 종교학자 미르치아 엘리아데는 인간이 반복과 원형의 재현을 통해 신성한 질서를 되살리려 했다고 말한다. 이 관점은 단지 신화적 구조에만 국한되지 않고, 예술과 문학 창작에도 적용할 수 있다. 즉, 창작은 단절이 아니라 연속이며, 진정한 차이는 무(無)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반복 속에서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시 묻게 된다. 창작과 모방의 경계는 어디에 있을까? 작가가 고전을 차용할 때, 그것은 오마주인가 아니면 표절인가? 리메이크는 단순한 반복에 불과한가, 아니면 시대에 대한 새로운 해석인가? ‘기시감’과 ‘창의성’이 뒤엉킨 이 시대에, 과연 우리는 무엇을 ‘창작’이라 부를 수 있을까?
이 질문은 단지 예술적 가치 판단에 그치지 않는다. 더 넓게 보면, 현대 사회에서 ‘창의적 주체’로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를 다시 묻는 일이자, 디지털 문화 속에서 생산과 소비의 경계가 흐려지는 시대에 우리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를 성찰하는 일이다. 특히 인공지능과 생성형 알고리즘이 본격적으로 이야기 생산에 개입하기 시작한 지금, 창작의 윤리와 기준은 그 어느 때보다 복잡하고 다층적인 논의를 요구하고 있다.
결국 이 글이 던지는 핵심 질문은 다음과 같다. 모든 이야기가 리메이크라면, 창의성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그리고 우리는 창작과 표절, 영감과 도용, 오마주와 복제 사이에서 어떤 기준과 감각으로 그 차이를 가늠해야 하는가? 이 글은 바로 그 물음에 대한 실마리를 모색하려는 시도이며, 반복 속에서 새로움을 길어 올리려는 인간의 근원적 욕망에 대한 비평적 성찰이다.
창작이란 무엇인가 – 오리지널리티의 신화
창작은 흔히 ‘무(無)에서 유(有)를 만들어내는 행위’로 여겨진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은 근대 이후 형성된 작가 중심주의가 만들어낸 신화에 가깝다. 실제로 창작이라는 개념은 이른바 ‘순수한 독창성’과는 거리가 있다. 우리가 말하는 ‘오리지널리티’란 순수한 독창성이라기보다, 익숙한 것을 낯설게 만들고, 기존의 질서를 변형하는 창조적 조합의 방식이다.
문학이론가 롤랑 바르트는 「저자의 죽음」이라는 짧은 글에서, 창작을 개인 작가의 독창성에 귀속시키려는 시도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했다. 그는 창작자가 결코 완전히 자율적인 주체가 아니며, 모든 텍스트는 이미 존재하는 담론, 관습, 문화적 코드 속에 갇혀 있다고 보았다. 바르트에 따르면, 텍스트는 그것을 창조한 저자의 것이 아니라, 그것을 해석하고 경험하는 독자의 것이다. 창작자는 언어라는 체계 속에서 의미를 조립하는 ‘중개자’일 뿐, 진정한 의미에서의 ‘창조자’는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상호텍스트성(intertextuality)’이라는 개념과도 맞닿아 있다. 줄리아 크리스테바는 바흐친의 대화이론에 기반해, 모든 텍스트는 이전 텍스트들과의 관계 속에서만 의미를 갖는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어떤 이야기도 고립된 채 쓰이지 않으며, 수많은 인용과 영향, 차용의 흔적 위에 구축된다. 창작자는 언제나 ‘이미 말해진 것들’을 다시 조합하고 변형하며, 그 과정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구성한다. 여기서 말하는 새로움이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절대적 독창성이 아니라, 반복과 차용 속에서 출현하는 ‘차이의 생성’에 가깝다.
이러한 관점은 고대 철학에서도 그 맥을 찾을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모든 예술은 모방에서 비롯된다”고 말한다. 그는 인간이 타인의 행위나 자연의 모습을 흉내 내는 과정에서 미적 쾌감을 느낀다고 보았으며, 시와 연극 역시 현실 혹은 이상적 세계를 재현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고 보았다. 중요한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 모방은 창작의 반대가 아니라 오히려 그 출발점이라는 점이다. 모방은 단순한 복제나 추종이 아니라, 창의적 상상력을 발휘하기 위한 토대이자 조건이다.
근대 이후, ‘오리지널리티’에 대한 강박은 작가 개인의 ‘영감’과 ‘천재성’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강화되어 왔다. 그러나 문학과 예술의 실제 역사에 눈을 돌리면, 많은 작품들이 특정 전통 위에서 이루어진 재해석과 재구성의 산물임을 알 수 있다. 셰익스피어는 당대의 민담, 역사서, 고전 비극 등을 토대로 수많은 희곡을 썼고, 단테의 『신곡』은 중세 기독교 세계관과 고대 로마 문학의 전통을 교차시키며 집필된 대표적 사례다.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는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를 20세기 더블린이라는 현대적 공간으로 옮긴 리메이크 서사이며, 보르헤스의 단편들은 존재하지 않는 책과 가공의 저자를 인용함으로써 창작과 인용, 실재와 허구의 경계를 의도적으로 흐린다.
이러한 창작의 방식은 시각 예술, 음악, 영화에서도 마찬가지다. 피카소는 아프리카 조각과 이베리아 반도의 고대 유물에서 영감을 얻었고, 바흐, 모차르트, 베토벤은 각 시대의 음악 어법을 자신만의 독창적인 스타일로 재구성했다. 영화감독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는 도스토옙스키, 톨스토이, 아이젠슈타인에게서 영향을 받았으며, 쿠엔틴 타란티노는 브루스 리 영화와 쿠엔틴 듀피외의 작품, 1970년대 B급 영화의 장면과 분위기를 차용하면서도 독특한 영화 세계를 창조했다.
결국 ‘오리지널리티’란 단일한 독창성이 아니라, 기존의 이야기, 이미지, 구조를 어떻게 변주하고 재배열하는가에 달려 있다. 이는 ‘창작이란 조합이고 인용이며 재서술’이라는 비평적 통찰과 맞닿아 있다. 그리고 이러한 조합과 인용이 단순한 과거의 모방을 넘어, 지금 이 순간의 감각과 문제의식을 담아낼 때 비로소 창의적이라 부를 수 있다.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란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것은 다만 ‘새롭게, 다르게 말하는’ 행위일 뿐이다. 창작은 기억과 재현, 차용과 왜곡, 인용과 해체가 엮이는 문화적 대화이며, 오리지널리티는 그 속에서 나타나는 스타일의 차이, 해석의 깊이, 그리고 구조적 창의성에 관한 문제다. 따라서 창작자는 무엇보다 해석자이며, 그 해석의 깊이와 태도가 곧 창작의 진정성을 결정한다.
다음 장에서는 ‘차용’과 ‘재조합’이 창작의 출발점이 될 수 있지만, 여전히 ‘표절’ 논란과 어떻게 구분되는지, 창작 윤리 문제를 살펴보고자 한다
모방과 표절의 경계
문제는 모방이 어디까지 창의적인 ‘재해석’으로 간주될 수 있으며, 어디부터 타인의 성과를 가로채는 ‘표절’로 간주되어야 하는가에 있다. 모방은 분명 창작의 출발점이 될 수 있지만, 비판적 거리두기나 고유한 시각 없이 기존의 것을 그대로 반복하거나 복제하는 행위는 창작이라 부르기 어렵다. 그것은 오히려 창작의 본질을 훼손하는 행위로 여겨질 수 있다. 특히 오늘날처럼 콘텐츠의 생성과 유통이 실시간으로 이루어지는 환경에서는 이러한 경계가 한층 더 흐릿해지며, 창작자와 수용자 모두에게 섬세한 윤리적 분별력이 요구된다.
예를 들어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은 수많은 B급 영화, 홍콩 액션, 일본 사무라이 영화, 스파게티 웨스턴 등에서 시각적·서사적 요소를 적극적으로 차용했지만, 이를 독자적인 방식으로 재구성하여 고유한 미학을 창조해 냈다. 『킬 빌』의 검은 슈트, 『펄프 픽션』의 파편화된 서사, 잔혹성과 유머가 교차하는 독특한 리듬은 단순한 장르 오마주를 넘어 타란티노만의 스타일로 자리 잡았다. 이처럼 그의 작업은 ‘창의적 차용’의 대표적 사례라 할 수 있다. 원천의 흔적은 분명하지만, 그것이 단순한 모방이 아니라 의미 있는 재해석과 새로운 가치 창출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명백히 창작의 영역에 속한다.
반면 어떤 영상 콘텐츠 제작자가 기존 다큐멘터리를 거의 그대로 베껴 유튜브에 게시한다면, 그것은 창작이라기보다 명백한 도용에 가깝다. 여기서 핵심은 단순히 ‘똑같이 만들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그 과정에서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는지, 혹은 비판적·해석적 거리를 확보했는지에 있다. 원본의 구조, 문장, 리듬, 논리를 그대로 유지한 채 단어만 교체하는 식의 ‘표면적 리라이팅’은 오히려 더 악질적인 표절이다. 겉으로는 창작의 형식을 띠지만, 실질적으로는 타인의 지적 노동을 가로채는 행위이자, 창작 윤리를 심각하게 위반하는 사례라 할 수 있다.
이 경계를 판단하기 위한 핵심 기준은 크게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창작자의 태도다. 차용 대상에 대해 비판적 인식과 해석의 의도를 가지고 있는가, 단순한 소재 재사용을 넘어 의미의 재구성이 이루어졌는가가 중요하다. 둘째, 결과물의 구조적 차이다. 서사, 구성, 표현 방식에서 원작과 구별되는 유의미한 차별성이 존재하는지 여부가 판단 기준이 된다. 셋째, 수용자의 인식이다. 수용자가 그것을 새로운 해석으로 받아들이는가, 아니면 단순한 모방으로 인식하는가 역시 창작과 표절의 경계를 가늠하는 중요한 요소가 될 수 있다.
표절 문제를 논의할 때 자주 등장하는 개념 중 하나가 바로 ‘공정한 사용(fair use)’이다. 비평, 교육, 풍자, 패러디 등의 목적에서는 기존 작품의 일부를 인용하거나 변형하는 것이 일정 부분 허용된다. 그러나 이러한 허용 역시 변형의 정도, 인용의 목적, 원작에 미치는 시장적 영향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판단해야 한다. 특히 상업적 이용이 포함될 경우, 그 기준은 훨씬 더 엄격해진다.
예를 들어, 패러디가 창작물로서 보호받기 위해서는 단순한 흉내나 반복을 넘어, 원작의 구조를 활용하되 그 위에 새로운 비판적 의미나 창조적 반응을 구축해야 한다. 기존의 장면이나 표현을 그대로 차용해 단지 웃음을 유발하는 것이라면, 겉으로는 패러디처럼 보일지라도 의미의 전환 없이 소재만 반복했다면 표절로 판단될 수 있다.
오늘날 인공지능이 텍스트와 이미지를 ‘학습’하여 생성하는 시대에, 창작과 표절의 경계는 더욱 불투명해지고 있다. 인공지능이 기존 작가들의 스타일을 모방해 그럴듯한 문장을 만들어내거나, 특정 화가의 화풍을 그대로 따라 그린 이미지를 생성할 때, 우리는 그것을 과연 ‘창작’이라 부를 수 있는가? 이는 단순한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저작권과 창작 윤리에 대한 새로운 기준과 논의를 요구하는 지점이다.
이제 우리는 창작을 단지 ‘표현의 외형’만으로 판단할 수 없다. 창작이란 어떤 맥락 속에서, 어떤 태도로, 어떤 해석을 담아냈는가를 함께 물어야 하는 행위다. 즉, 진정한 창작 여부는 결과물의 형식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의미 구성과 해석의 주체성을 통해 판단되어야 한다.
모방은 창작의 출발점이 될 수 있지만, 창작은 궁극적으로 자신만의 언어를 찾아가는 여정이다. 같은 재료를 쓰더라도 그것을 어떻게 조합하고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가 탄생한다. 진정한 창작자는 결국 ‘다르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며, 표절은 바로 이 ‘다름의 가능성’을 포기하고, 남의 것을 흉내 내는 데 머무르는 행위다.
창작은 자유로운 행위지만, 그 자유는 타인의 기여와 노력에 대한 존중을 전제로 할 때 비로소 의미를 가진다. 타인의 언어를 빌려 쓰되, 자신의 목소리로 다시 말할 줄 아는 것—그것이 창작의 윤리이며, 창조적 주체로서 우리가 지켜야 할 태도다.
다음 장에서는 현대 콘텐츠 생태계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리메이크와 오마주, 시퀄과 프리퀄의 범람이 창작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살펴본다. 이를 통해 ‘리메이크 시대’의 윤리와 창의성, 그리고 그 속에서 창작자가 감당해야 할 책임과 태도에 대해 고찰하고자 한다.
리메이크와 재해석 – 현대 문화의 창작 방식
리메이크는 이제 단순한 재생산을 넘어, 하나의 창작 장르로 자리매김했다. 이는 단지 오래된 영화를 다시 만드는 작업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특정한 서사와 구조를 오늘날의 시대적 맥락에 맞게 재조직하고 재해석하는 창의적 행위로 이해된다. 예를 들어, 1995년작 영화 『클루리스』는 제인 오스틴의 『엠마』를 1990년대 미국 고등학교라는 배경 속에 새롭게 풀어냈고, 디즈니는 자사의 고전 애니메이션들을 실사화하면서 그 이야기들이 지닌 가치와 의미를 현대적으로 재조명하고자 했다. 이처럼 리메이크는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기존 이야기를 ‘지금-여기’에 다시 맞춰보려는 재해석의 시도이며, 동시에 특정 시대의 정서와 관점을 반영하는 창조적 개입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동시대의 리메이크 작업은 단순한 복원을 넘어, 서사를 전복하거나 기존 가치 체계를 재구성함으로써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최근 리메이크된 디즈니 실사 영화들만 보더라도, 원작에서 주변화되었던 인물의 시선을 중심에 놓거나, 전통적인 성 역할과 고정관념을 새롭게 해석하려는 경향이 뚜렷하다. 이는 더 이상 이야기의 반복에 머무르지 않고, 고전 텍스트에 대한 사회적 재독해의 시도로 기능하며, 나아가 문화적 진화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또한 디지털 시대의 창작은 이른바 ‘리믹스 문화’로 대표된다. 팬픽션, 밈, 커버 영상, 디지털 콜라주, 짧은 숏폼 콘텐츠 등은 기존의 콘텐츠를 바탕으로 개인의 해석을 덧입혀 새로운 의미를 창출한다. 이러한 형식의 창작물은 원본을 단순히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재구성하여 전혀 다른 이야기와 정서를 만들어낸다. 리믹스는 창작의 주체를 다양화하며, 원본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색다른 감정과 경험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방식이다. 이로써 창작은 더 이상 ‘처음부터 새로 만드는 일’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것들 속에서 다르게 말하기’의 예술로 확장된다.
이러한 현상은 오늘날 창작의 주요한 특징으로 떠오른 ‘집단 창작(collective authorship)’ 또는 ‘열린 텍스트(open text)’ 개념을 잘 보여준다. 과거에는 창작자가 창작의 권한을 독점했다면, 이제 그 권한은 수용자들과 공유되고 있다. 창의성은 더 이상 개인의 고유한 영감에서만 비롯되지 않으며, 다양한 해석과 참여가 가능한 ‘문화적 대화’ 속에서 형성된다. 누군가가 만들어낸 이야기, 캐릭터, 세계관은 독자, 관객, 사용자에 의해 변형되고 확장되며, 그 자체로 새로운 서사를 낳는다. 이런 점에서 인터넷은 창작 주체를 대중 전체로 확장시킨 ‘민주적 서사 공간’이라 할 수 있다.
소셜미디어 플랫폼, 유튜브, 틱톡 등에서 이루어지는 수많은 2차 창작 활동은 이러한 변화의 생생한 증거다. 특정 노래에 맞춰 제작되는 챌린지 영상, 드라마 명장면을 패러디하거나 재구성한 숏폼 콘텐츠, 영화 등장인물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팬픽션 등은 모두 원작에 대한 수용자들의 창의적 반응이자 재창조의 산물이다. 이 과정은 단순한 ‘모방’을 넘어, 의미의 변형과 재맥락화를 통해 새로운 문화적 층위를 형성하는 창작 행위로 볼 수 있다.
학자 헨리 젠킨스는 이러한 리믹스 문화를 ‘참여 문화(participatory culture)’라고 명명했다. 그는 팬들이 단순한 수용자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콘텐츠를 생산하고 재구성하는 참여적 주체로 활동하는 문화 생태계를 통해, 창작이 더 이상 소수 전문가의 전유물이 아님을 보여준다. 이는 전통적인 창작 개념의 해체를 의미하며, 창의성의 중심을 개인의 고유한 천재성에서 ‘관계와 상호작용’으로 이동시키는 전환점이 된다.
그러나 리메이크와 리믹스가 문화 전반에 널리 퍼진 오늘날, 그에 따른 우려 또한 적지 않다. 창작이 점점 더 반복적이고 참신함을 잃어간다는 비판, 원작에 대한 과도한 의존이 오히려 창의성을 저해한다는 지적, 나아가 원저작자의 권리를 침해할 수 있다는 윤리적 논란까지—이 모든 문제는 현대 창작 환경에서 여전히 핵심적인 쟁점으로 남아 있다. 리메이크와 리믹스가 진정한 창작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단순한 반복을 넘어, 새로운 시각과 해석, 그리고 의미의 재구성이 반드시 수반되어야 한다.
다음 장에서는 이러한 ‘재창작’이 어떻게 예술성과 윤리성을 동시에 확보할 수 있을지, 창작의 자유와 원저작권 보호 사이에서 어떤 균형점을 모색할 수 있을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창의성의 본질은 재구성에 있다
우리는 이제 창의성을 단지 ‘완전히 새로운 것’으로만 정의할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 진정한 창의성이란 무(無)에서 유(有)를 만들어내는 신적인 능력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재료, 이야기, 이미지, 사고들을 어떻게 새롭게 해석하고 조합하느냐에 달려 있다. 창작은 과거를 지우는 일이 아니라, 그 위에 새로운 시선을 덧씌우는 작업이다. 그것은 전통에 대한 무조건적인 순응도, 완전한 파괴도 아닌, 역사와 맥락에 대한 비판적 개입이자 창조적 재구성이다.
‘모든 이야기는 리메이크다’라는 선언은 창작의 종말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창의성의 본질에 대한 깊은 성찰이다. 고전은 시대마다 반복적으로 리메이크되며, 그때그때의 요구와 감수성에 따라 새롭게 해석된다. 리믹스 문화는 다중의 주체들이 공유된 텍스트 위에서 새로운 대화를 만들어내며, 창작이란 더 이상 고립된 천재의 산물이 아니라 사회적·문화적·언어적 맥락 속에서 이루어지는 ‘관계의 예술’임을 보여준다.
결국 창의성이란, ‘다르게 말하기’의 기술이다. 같은 이야기를 어떻게 새롭게 전달할 것인가, 익숙한 서사를 어떤 시선으로 재배치할 것인가, 흔한 소재를 얼마나 낯설게 재구성할 수 있는가—이러한 질문들이야말로 현대 창작의 핵심이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창작자만의 고유한 목소리가 드러난다. 모방은 창작의 출발점일 수 있지만, 단순한 복제에 머문다면 그것은 창작이 아니다. 오직 모방을 넘어서 새로운 의미를 구축할 때, 우리는 그것을 비로소 창작이라 부를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비평가의 역할 또한 새롭게 정의되어야 한다. 비평은 더 이상 단순히 ‘이것이 새로운가’를 판별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이제 비평은 ‘그 리메이크가 무엇을 어떻게 새롭게 말하고 있는가’를 묻고, 그 창작물이 던지는 질문과 시선을 읽어내는 해석의 작업이어야 한다. 창작이란 결국 기존 세계에 대한 하나의 응답이며, 비평은 그 응답이 지닌 사회적, 미학적, 윤리적 함의를 조명하는 일이다.
앞으로의 창작은 더욱 많은 차용과 인용, 변형과 리믹스 속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흐름 속에서 진정한 창의성은 더 이상 ‘독창성’이라는 고립된 환상에 있지 않다. 오히려 그것은 기존의 것을 얼마나 깊이 이해하고, 얼마나 다르게 해석하며, 얼마나 새롭게 말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모방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다르게 말할 것인가다. 창작의 윤리는 바로 그 ‘다름’에 대한 성찰과 책임 위에 세워져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창의성을 더 이상 절대적 오리지널리티의 신화 속에서 찾지 않는다. 오히려 수많은 이야기들이 중첩되고 교차하며 서로의 경계를 허무는 이 시대야말로, 창작의 본질을 가장 잘 보여주는 무대일지도 모른다. 창의성은 결국 ‘새로움’이 아니라, ‘다름’의 예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