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법 파기환송심 무기한 연기, 사법부는 책임을 유예할 수 있는가
보루의 붕괴, 신뢰에 깊은 금이 가다
'보루(堡壘)'란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튼튼하게 쌓은 방어선이다. 공동체의 마지막 생존선을 의미하기도 한다. 우리는 오래도록 사법부를 그러한 ‘보루’로 여겨왔다. 권력의 전횡으로부터 국민의 권리를 지키고, 법 앞의 평등을 실현하는 최후의 자리가 바로 그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그 보루가 스스로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내려앉는 장면을 목격했다. 선거법 위반 혐의에 대한 파기환송심 재판을 사법부가 ‘무기한 연기’한다는 결정을 내리면서다.
이는 단순한 재판 일정 조정이 아니다. 법 앞에 모두가 평등하다는 원칙이 '일시정지' 버튼을 누른 순간, 법치주의는 침묵하고, 정의는 길을 잃는다.
무기한 연기된 재판, 시간 속에 잠긴 판결
파기환송심이란 대법원의 법리 판단에 따라 사건을 다시 심리하는 절차다. 상급심이 판단한 법적 기준을 하급심이 반영해 결론을 내리는 것은, 삼권분립의 기본 원리이자 ‘사법 작용’의 실체다. 그런데 이번 사건에서 하급심은, 대법의 판단이 내려진 지 수개월이 지난 시점에서도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 급기야 ‘선거 이후로 연기’하는 결정을 내렸고, 이는 ‘선거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법적 판단이 정치적 고려에 의해 미뤄졌다는 인상을 줄 수 있다는 점에서, 이 결정은 중대한 문제를 내포한다. 사법부가 판단을 유예하는 순간, 그 공백은 권력의 계산이 채우게 된다. 유죄 여부는 판단받지 않고, 법의 권위는 유예 속에서 무뎌진다.
사법부의 자기검열, 침묵이 만든 불신
사법부는 정치와의 거리에서 권위를 얻는다. 그러나 이번 사태는 그 거리를 좁힌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치적 파장’을 우려한 나머지 스스로를 가두고 만 예다. 이는 사법의 독립성 훼손을 넘어서, 국민에 대한 설명 책임을 포기한 결정이기도 하다.
사법적 판단은 때로 무겁고 고통스럽지만, 그 책임에서 도망치는 것이야말로 ‘사법의 탈정치화’를 해치는 길이다. "정의는 실현되어야 할 뿐 아니라, 실현되는 것으로 보여야 한다"는 오래된 법 격언이 지금처럼 절실한 순간이 있을까. 재판의 유예는 곧 정의의 유예다.
무너진 보루를 다시 세우기 위하여
국민은 사법부에 무언가 거창한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단지 공정한 절차, 예측 가능한 판단, 그리고 원칙을 원할 뿐이다. 그 원칙이 '정치 일정'이나 '사회적 파장'이라는 불확실성 앞에서 흔들린다면, 법은 더 이상 버팀목이 될 수 없다.
보루가 무너진 자리에 다시 벽돌을 쌓는 일은 사법부의 몫이다. 판단을 내리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 그 용기가 이 시대 사법의 명예를 다시 세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