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라이브 해밀턴의 《중국의 조용한 침공》 톺아보기
프롤로그: 낯설지 않은 침묵의 그림자
어떤 변화는 소리 없이 다가온다. 총성 없는 전쟁처럼, 일상의 언어와 문화, 정책과 결정 속에 조용히 스며든다. 어느 순간, 우리는 깨닫는다. 낯설게만 느껴졌던 침묵이 어느새 일상이 되어 있다는 것을.
클라이브 해밀턴의 《중국의 조용한 침공》은 바로 그 은밀한 침투에 대한 경고다. 그는 오랜 시간에 걸쳐 호주의 학계, 정계, 언론, 지역사회 곳곳에 뿌리내린 중국의 영향력 전략을 집요하게 추적해 왔다. 그가 묻는다.
“당신의 사회는, 정말로 자유로운가?”
처음엔 그저 호주만의 이야기인 줄 알았다. 하지만 책장을 넘길수록, 점점 낯설지 않은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말을 아끼는 정치인들, 스스로 수위를 조절하는 언론, 모호한 검열의 경계 안에서 움츠러드는 학계.
생각해보면, 우리는 이미 말 없는 권력의 공기 속에서 숨 쉬고 있는지도 모른다.
중국은 더 이상 단순한 성장 지향의 신흥국이 아니다. 이미 강대국의 지위에 오른 중국은 이제, 자신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세계 질서를 재편하려 한다. 군사력보다 은밀하게, 경제력보다 정교하게—‘샤프 파워(Sharp Power)’라 불리는 영향력 전략을 통해 세계 각국의 의사결정 구조 깊숙이 조용히 침투하고 있다.
과연 한국은 예외일 수 있을까? 우리 사회 역시 문화, 외교, 경제, 언론 등 여러 영역에서 중국의 영향력과 이해관계에 직간접적으로 노출되어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조짐을 애써 외면하거나, 감각조차 하지 못한 채 무심히 흘려보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글은 《중국의 조용한 침공》이라는 거울을 통해, 한국 사회에 드리운 유사한 그림자를 비춰보려는 시도다. 단순한 비판이나 감정적 반중 정서만으로는 이 조용한 흐름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이 은밀한 전술을 어떻게 감지하고, 어떤 구조적 대응을 마련할 것인가다. 지금 이 침묵의 의미를 읽어내지 못한다면, 우리가 지키고자 하는 자유와 자율의 기반 자체가 흔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제1장. ‘조용한 침공’이란 무엇인가
무언가 들리지 않는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침공’이라는 단어는 흔히 총성과 전차, 군복 입은 병사들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클라이브 해밀턴이 말하는 침공은 그와는 전혀 다르다. 총 대신 자본으로, 검열 대신 ‘협력’이라는 이름으로, 억압 대신 ‘우호’의 외피를 두르고 다가온다. 이것이 바로 조용한 침공(Silent Invasion) 이다.
이 개념은 단순한 스파이 활동이나 외교적 압박을 의미하지 않는다. 클라이브 해밀턴이 정의한 ‘조용한 침공’은, 중국 공산당이 자국의 정치적·경제적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타국의 자율성과 민주주의 기반을 서서히 잠식해 가는 구조적 영향력 전략이다. 이는 무력 행사나 물리적 침투가 아닌, 사상과 문화, 정보와 여론을 매개로 이루어지는 조용하고 은밀한 전이(轉移)다.
샤프 파워: 낯선 개념의 등장
국제 정치에서 힘의 작동 방식을 설명할 때, 우리는 주로 ‘하드 파워’와 ‘소프트 파워’라는 두 가지 개념을 사용해 왔다. 전쟁이나 무력 개입, 경제 제재처럼 직접적이고 강제적인 수단을 의미하는 ‘하드 파워’, 그리고 문화와 가치, 이미지 등을 통해 타국에 매력을 발휘하는 ‘소프트 파워’. 하지만 이 두 가지로는 설명할 수 없는 또 다른 형태의 힘이 존재한다. 바로, ‘샤프 파워(Sharp Power)’ 다.
‘샤프 파워(Sharp Power)’는 미국 민주주의기금(NED)과 주요 싱크탱크들이 개념화한 용어로, 권위주의 국가가 타국의 개방된 사회 구조를 역이용해 자국의 영향력을 확장하는 방식을 뜻한다.
겉으로는 문화적 교류처럼 부드럽게 다가오지만, 그 실체는 정치적으로 날카롭다. 정보는 흐르지만 일방적이고, 대화는 존재하지만 그 이면엔 감시와 통제가 깔려 있다.
클라이브 해밀턴은 ‘샤프 파워’가 호주와 같은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제도적 허점을 파고들어, 사회 내부를 조용히 재편하고 있다고 경고한다. 정치권의 후원금 수수, 언론의 침묵, 학계의 눈치 보기—이 모든 것은 우연한 일탈이 아니라, 체계적인 영향력 침투의 결과라는 것이다.
왜 서방은 몰랐는가?
이 질문은 클라이브 해밀턴이 던지는 가장 본질적인 물음이며, 동시에 서방 사회가 직면한 가장 불편한 진실이다.
그토록 명백한 침투가 왜 감지되지 않았을까?
첫째, 경제적 이해관계가 진실을 가렸다.
중국은 서방 국가들에 있어 중요한 무역 상대국이자 대규모 투자자다. 정치적 가치보다 실리적 협력이 우선시되는 분위기에서, 불편한 사실은 곧 외교적 갈등의 씨앗이 되었고, 결과적으로 무시되거나 회피되었다.
둘째, 자유사회의 개방성 자체가 역설적으로 취약점이 되었다.
학문의 자유, 표현의 자유, 언론의 자유는 민주주의의 핵심 가치지만, 동시에 외부 세력이 침투하고 영향을 행사하기에 매우 유리한 구조이기도 하다. 열린 사회의 강점이, 감시와 통제가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쉽게 악용될 수 있었던 것이다.
셋째, ‘중국에 대한 환상’도 강하게 작용했다.
중국이 경제적으로 성장하면 자연스럽게 정치적으로도 개방될 것이라는 기대는, 결과적으로 순진한 낙관이었다. 실제로 중국은 경제적 부를 바탕으로 권위주의 체제를 더욱 강화했고, 민주주의 제도를 안에서 본받기보다 밖에서 흔드는 전략으로 방향을 틀었다.
해밀턴의 문제의식
클라이브 해밀턴은 이러한 현실을 “민주주의 사회의 내부 붕괴”라고 진단한다. 외부의 강제적인 압력에 의해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내부로부터 조용히 잠식되고 마비되는 과정이다..그는 말한다. “표현의 자유는 여전히 존재하지만, 표현할 사람이 사라지고 있다.”
공적 담론의 장이 위축되고, 시민사회의 경계심이 흐려지며, 비판이 검열보다 앞서 자제되는 순간 우리는 민주주의가 스스로를 포기하는 장면을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이 장은 단순히 개념을 소개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조용한 침공’이라는 표현은 단순한 수사가 아니라, 권력이 어떻게 비가시적으로 확장되고 구조를 흔드는지를 정확히 짚어내는 분석 틀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을 수밖에 없다.
과연 한국 사회는, 이 조용한 침공의 흐름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조용한 침공’은 타자의 이야기만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 안의 무감각과 침묵을 비추는 거울이기도 하다.
제2장. 중국의 영향력 전략, 그 메커니즘
중국의 영향력 행사는 단순히 무역 협상장에서 오가는 이익의 교환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훨씬 더 정교하고 지속적인 네트워크의 형성, 그리고 눈에 잘 띄지 않는 침투 전략을 통해 작동한다.
클라이브 해밀턴은 이 책에서, 중국 공산당이 어떻게 자유민주주의 사회 내부로 침투하여 제도의 틈을 비집고 영향력을 행사해 왔는지를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밝혀낸다. 영향력 행사의 메커니즘은 다음과 같이 몇 가지 방식으로 구분해볼 수 있다.
학계, 정계, 언론, 지역사회로의 침투
중국의 침투는 정치권이나 경제계 같은 상층부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가장 먼저 겨냥된 영역은 다름 아닌 학계였다.
중국 정부는 ‘공자학원’이라는 이름 아래 다수의 대학 내에 문화 기관을 설립하고, 언어 교육과 중국 문화의 전파를 명분 삼아 영향력을 넓혀갔다. 실상은 달랐다. 이들 기관이 학문적 자유를 제약하거나,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에 대해 검열을 시도한 사례들이 여러 국가에서 반복적으로 보고되었다.
정계에 대한 접근은 보다 은밀하고 정교한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친중 성향의 정치인이나 퇴임한 고위 인사들에게는 자문료, 후원금, 비영리 단체를 통한 지원 등의 형태로 손을 내밀었다.
클라이브 해밀턴은 일부 호주 국회의원들이 중국 자본에 상당 부분 의존하게 되었으며, 그 대가로 ‘중국에 불리한 입장’을 회피하거나 공개적인 비판을 삼가는 사례가 있었다고 지적한다.
언론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일부 매체는 중국 대사관이나 중국계 기업의 광고를 주요 수입원으로 삼고 있었고, 이러한 재정적 의존은 민감한 사안에 대한 보도를 자제하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지역사회에서는 해외 화교 단체들을 중심으로 ‘조국의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옹호하고, 중국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차단하려는 움직임이 곳곳에서 포착되었다.
유학생, 유학생 단체, 공자학원: 문화외교라는 이름의 장치들
중국은 전 세계 수십만 명의 유학생을 해외로 파견하며, 이들을 통해 문화적 ‘연성 외교’를 펼쳐 왔다. 그러나 일부 유학생 단체는 단순한 교류를 넘어, 중국 정부의 외교적 입장에 반하는 표현이나 행사에 대해 집단 항의, 시위, 고발 등 조직적인 대응에 나서기도 했다.
예를 들어, 티베트·홍콩·대만 관련 전시나 토론회가 열릴 경우, 중국 유학생들이 학교 측에 압박을 가하거나 행사를 방해하는 일이 여러 국가에서 반복적으로 보고되었다.
공자학원은 처음에는 중국어와 문화를 알리는 교육 기관으로 출발했지만, 실제로는 중국 정부의 정치적 메시지를 우회적으로 전달하거나, 민감한 이슈에 대한 논의를 차단하는 역할을 해왔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이들 기관은 중국 교육부 산하 기구가 직·간접적으로 운영하며, 교육 내용과 강사 선발 과정에도 정치적 기준이 개입되고 있다는 우려가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친중 네트워크의 형성과 동원 방식
중국은 장기적으로 친중 엘리트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데 주력해 왔다. 학술 포럼, 고위 인사 교류 프로그램, 투자 설명회, 친선단 파견 등 다양한 형식을 통해 의사결정 구조 내부에 중국에 우호적인 의견을 꾸준히 주입한다. 이를 통해 중요한 순간에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인물군을 확보하는 것이다.
특히 퇴직 관료, 교수, 언론인 등을 대상으로 한 초청 프로그램에서는 중국 방문 시 극진한 환대와 함께 체제 친화적인 시각을 유도한다. 이후 이들은 기고문 작성이나 세미나 참여를 통해 간접적으로 여론 형성에 영향을 미치는 경로로 활용된다. 이는 단순한 교류를 넘어선 전략적 포섭의 일환이라 할 수 있다.
무역·투자와 외교적 영향력의 결합
경제는 강력한 무기다. 중국은 주요 국가들과의 무역 의존도를 높인 뒤, 특정 정치적 사안에서 경제적 압박 수단을 자주 활용한다. 사드 배치 이후 한국이 경험한 ‘한한령(限韓令)’이 대표적 사례다. 중국은 정치적 불만을 직접 드러내지 않고도 관광객 제한, 연예인 활동 규제, 기업 제재 등 비공식적인 보복 조치를 취했다.
이 같은 방식은 다른 국가들에도 유사하게 적용되었다. 노르웨이가 노벨 평화상을 류샤오보에게 수여하자 연어 수입이 중단되었고, 호주가 코로나19 기원 조사를 요구하자 와인과 보리에 고율 관세를 부과하였다. 이러한 경제적 제재는 직접적인 군사 위협 없이도 효과적인 외교적 압력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다.
탈북민·대만·홍콩 관련 이슈에 대한 검열 시도
중국이 특히 민감하게 반응하는 분야는 체제 위협으로 간주되는 주제들이다. 탈북민 문제, 대만 독립, 홍콩 민주화 운동이 대표적 사례다. 해외에서 이러한 주제가 공개적으로 다뤄질 경우, 중국 외교부나 대사관은 해당 기관이나 정부에 공식 항의를 하거나, 중국 유학생 단체 및 친중 언론을 통해 압박을 가하는 일이 빈번하게 발생한다.
한 대학교에서 열린 탈북민 인권 토론회가 중국 측 압박으로 행사 직전에 취소되거나, 대만 출신 예술가가 참가한 국제 행사가 ‘중국 지도상의 대만 표기 문제’로 논란이 되어 중단되는 사례도 있었다. 이러한 검열은 직접적인 법적 통제 대신, 외교·경제·사회적 압력으로 작동하는 ‘비공식 검열 체계’의 한 형태라 할 수 있다.
맺으며: 침묵이 선택이 될 때, 사회는 무너진다
중국의 영향력 전략은 단순한 ‘강대국의 외교’를 넘어선다. 그것은 개방된 사회의 틈새를 노려 제도 내부로 깊숙이 스며드는 복합적 침투 전략이다. 이 전략의 대상은 특정 정치 세력이나 개인에 국한되지 않고, 사회 전반의 구조와 문화, 그리고 공공 담론의 분위기까지 포함한다. 앞으로 우리의 자유와 민주주의가 얼마나 지속될지는, 이 같은 침투에 대해 얼마나 경각심을 가지고 어떤 원칙으로 대응하느냐에 달려 있다.
제3장. 한국은 과연 예외인가
클라이브 해밀턴이 경고한 ‘조용한 침공’은 호주와 서방 국가들의 문제로 시작되었지만, 그 실체를 들여다보면 결코 먼 나라의 이야기가 아니다. 한국은 중국과 지리적으로 가까울 뿐 아니라, 정치·경제·문화적으로 깊고 복잡하게 얽혀 있는 이웃이다. 따라서 중국의 영향력 확장 전략이 한국 사회에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지를 면밀히 살피는 것은 필수적이다. 우리는 과연 이 흐름에서 예외일 수 있을까?
공자학원의 증가와 운영 실태
한국의 주요 대학들에도 공자학원이 설치되어 있다. 서울, 부산, 대전, 제주 등 전국 20곳이 넘는 공자학원이 중국어 교육과 문화교류를 명분으로 활동해 왔다. 그러나 이들의 실체는 단순한 어학 기관을 넘어선다.
공자학원의 운영은 중국 교육부 산하 한반(漢辦, 현 국제중국어교육기구)이 재정 지원과 커리큘럼을 주도하며, 강사 채용에도 정치적 기준이 개입된다는 비판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티베트’, ‘대만 독립’, ‘천안문 사태’ 등 민감한 주제는 교육 과정에서 철저히 배제되며, 일부 학내 강연이나 행사에서는 이러한 주제를 둘러싼 외압과 행사 취소 사례도 보고되었다.
한국에서도 공자학원의 정치적 성격에 대한 우려가 확산되면서, 일부 대학에서는 폐쇄하거나 운영 방식을 재검토하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이는 단순한 언어 교육의 문제가 아니라, 학문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를 지키는 데 있어 중대한 쟁점으로 부상하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언론계의 자기검열과 침묵의 공기
한국 언론은 전반적으로 자유롭고 경쟁적인 구조를 갖추고 있지만, 중국과 관련된 보도에 있어서는 주저하거나 침묵하는 경향이 뚜렷하게 감지된다. 그 이유는 명확하다. 광고 수익, 협력 관계, 중국 시장 진출 가능성 등 복합적인 이해관계가 걸려 있기 때문이다.
특히 대형 미디어 그룹의 경우, 중국 기업의 광고와 제휴가 주요 수익원으로 작용하면서, 자극적인 헤드라인이나 비판적 기사에 대해 내부적으로 제동이 걸리는 일이 적지 않다. “중국 문제는 조심하라”는 암묵적 분위기가 데스크에서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자기검열은 정부나 법률에 의한 통제가 아니라, 외부 이해관계에 의해 작동하는 ‘비공식적 검열’의 전형적인 사례이며, 민주사회에서 언론 자유의 기반을 뿌리부터 흔드는 심각한 균열로 작용한다.
유학생 단체의 조직적 활동과 감시
한국에는 매년 약 6~7만 명의 중국 유학생이 체류하고 있다. 이들은 단순한 학습 공동체를 넘어, 때로는 정치적 반응 조직이나 비공식적인 감시 네트워크처럼 작동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대만이나 홍콩 문제, 탈북민 인권 등을 다룬 강연이나 토론회에서 중국 유학생 단체들이 집단적으로 항의하거나 방해 활동을 벌인 사례들이 있다. 일부 대학에서는 이러한 항의로 인해 행사가 취소되거나, 주최 측에 자제를 요청하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중국 유학생들 사이에는 ‘조국에 대한 충성’을 독려하는 온라인 커뮤니티가 존재하며, 특정 발언이나 활동을 ‘중국 모욕’으로 간주해 자국 대사관이나 관련 기관에 보고하는 체계도 작동 중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일종의 해외 감시망으로 기능하며, 한국 내 학문과 표현의 자유에 실질적인 위협이 되고 있다.
연예·문화계의 검열 사례: 한한령과 ‘지도 문제’
중국의 ‘문화 보복’은 한국에겐 결코 낯설지 않은 경험이다. 2016년 사드(THAAD) 배치 결정 이후 촉발된 ‘한한령(限韓令)’은 한국 연예계에 직격탄을 날렸다. 공식적으로는 존재를 부인하면서도, 방송 출연 금지, 공연 불허, 콘텐츠 유통 중단 등 실질적으로는 전방위적인 통제가 이루어졌다.
또한 ‘지도 검열’은 샤프 파워의 대표적 사례 중 하나다. 광고, 게임, 영화 등에서 대만이나 홍콩이 중국과 별도로 표기되면, 즉각적인 불매 운동과 온라인 비난이 이어지고, 해당 콘텐츠는 중국 시장에서 퇴출된다. K-팝 아이돌이 SNS에 무심코 올린 지도나 문구 하나로 중국 팬덤이 등을 돌리고, 소속사는 곧바로 사과문을 발표하는 이른바 ‘검열 루틴’이 되풀이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경제적 이해관계가 어떻게 문화 영역에서 자기검열을 유도하고, 나아가 표현의 자유를 서서히 압박하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정치권 및 기업과의 밀착, 그리고 침묵
일부 정치권 인사들이 중국의 시각에 민감하게 반응하거나, 중국 비판을 의도적으로 회피하는 모습은 적지 않게 목격된다. 이는 겉으로는 양국 관계의 외교적 민감성 때문으로 보일 수 있지만, 그 이면에는 긴밀한 경제적 이해관계, 정치적 후원 구조, 향후 이익에 대한 기대가 작용하고 있다.
특히 일부 지방 정부나 공공기관은 중국 지방정부와의 협약 체결, 투자 유치, MOU 추진 등에 적극적이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어떤 가치들이 희생되거나 우선순위에서 밀려났는지는 명확히 드러나지 않는다.
기업들도 예외는 아니다. 중국 시장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대기업들은 정치적 사안에 대해 침묵하거나, '중국의 반응'을 우선 고려하는 조직 문화가 자리 잡고 있다. 정부의 공식 입장과 충돌할 여지가 있는 사안에서는 스스로 거리를 두거나, 선제적으로 해명을 내놓는 방식으로 위험을 관리하려 한다.
비판 여론에 대한 조직적 반응
한국 내에서 중국 정부의 정책을 비판하는 발언이나 보도가 나오면, 온라인을 중심으로 중국 측의 조직적 반응이 뒤따르는 경우가 적지 않다. 댓글 폭탄, SNS 항의, 가짜 뉴스의 유포 등이 대표적인 방식이다.
또한 중국 대사관이 언론사나 정치인에게 공식 항의 서한을 보내거나 공개 성명을 발표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이러한 행위는 단순한 외교적 소통을 넘어 내정 간섭으로 인식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조직적 대응은 단순한 반박을 넘어 비판을 억제하는 압력 수단으로 작용하며, 국내 여론의 자율성과 다양성을 심각하게 위협한다.
마치며: 우리가 침묵할수록, 더 많은 것이 사라진다
한국은 자유롭고 개방된 사회다. 그러나 바로 그 개방성이 ‘조용한 침공’의 실험장으로 변할 위험도 안고 있다. 이미 사회 곳곳에는 작은 침묵과 조심스러운 자기검열, 이유를 알기 힘든 자제와 위축이 퍼져 있다. 과연 우리는 이를 단순한 외교적 예의로만 치부할 수 있을까?
이 장은 우리가 직면한 현실을 정면으로 응시하자는 제안이다. ‘조용한 침공’은 먼 곳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 바로 여기서 진행되고 있다.
제4장. 한국 사회의 ‘침묵’과 ‘무감각’
‘조용한 침공’의 전략은 침묵을 기대한다. 명시적 통제 없이도 침묵과 무감각이 사회 전반에 스며들도록 만드는 것이 그 목적이다. 한국 사회는 이러한 전략에 얼마나 자각하고 있을까? 우리가 침묵하는 이유는 단지 외교적 신중함 때문일까, 아니면 무언의 압력에 길들여진 결과일까? 이 장에서는 한국 사회의 다양한 반응 양태를 살펴보고, ‘무대응의 대응’이 만들어내는 공백과 그 함의를 고찰해 본다.
시민사회의 낮은 경각심
민주주의의 진정한 척도는 시민의 자율적 감시 능력에 있다. 그러나 중국의 영향력 행사에 대한 한국 시민사회의 반응은 대체로 낮은 관심과 단편적인 인식에 머무르고 있는 실정이다.
이는 여러 복합적인 요인에서 비롯된다. 첫째, 중국은 직접적인 무력 충돌의 대상이라기보다 ‘경제적 파트너’로 인식되어 왔으며, 한국인의 외교적 관심은 여전히 북한과 미국에 집중되어 있다. 둘째, 언론 보도는 제한적이고, 교육 과정에서도 중국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깊이 있게 다뤄지지 않는다. 이로 인해 ‘조용한 침공’이라는 개념조차 사회적 어휘로 자리 잡지 못한 실정이다.
무엇보다 시민 개개인의 검열 감수성이 약화되고 있다. “별일 아니겠지”, “다른 나라도 비슷하지 않을까”라는 상대주의적 회피가 문제의 본질을 흐리고 있으며, 외교적 긴장에 대해서는 피로감과 무관심이 번갈아 나타나고 있다.
정치권과 지식인의 이중적 태도
정치권은 중국에 대해 모호한 침묵 혹은 전략적 회피로 일관해왔다. 특히 중국 관련 민감 사안—예컨대 탈북민 강제북송, 홍콩 민주화 운동, 대만 이슈—에 대해 초당적 차원의 명확한 입장 표명은 드물었다.
일부 정당은 중국과의 교류 확대를 강조하며 실용적 접근을 취하지만, 이는 때로 가치 기반 외교의 후퇴로 이어지기도 한다. 입장을 밝히지 않는 것 자체가 중국의 기대에 부응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지식인 사회 역시 예외는 아니다. 중국과 관련된 연구나 발언이 학술적 지원, 강의, 초청, 연구비 등의 이해관계와 맞물리면서 스스로 조심스러워지는 경향이 존재한다. 정치적 예민함을 이유로 스스로 발언을 삼가는 분위기는 비판적 성찰보다는 ‘중립’이라는 이름의 기피로 이어진다.
언론의 태도 분석: 자유 vs. 외교의 경계
한국 언론은 세계적으로도 높은 표현의 자유를 보장받는 편에 속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 관련 보도에서는 이상하리만치 신중하거나, 의도적으로 거리를 두는 태도가 감지된다.
이는 구조적 이유와 상업적 논리가 맞물린 결과다. 중국 기업의 광고 수익, 시장 접근성, 외교 마찰 회피가 언론사의 판단을 압박하고 있으며, 내부 자율성보다 외부 이해관계가 우선되는 보도 관행이 자리 잡고 있다.
일부 언론은 아예 ‘중국 관련 민감 이슈’를 외면하거나, 보도되더라도 논평 없이 사실 전달로 축소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독자의 판단을 도울 수 있는 정보 접근권을 제한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표현의 자유와 외교 마찰 사이의 딜레마
한국 사회가 직면한 핵심 딜레마는 표현의 자유와 외교적 균형 사이의 충돌이다. 민간 영역에서 표현의 자유를 지켜야 한다는 당위는 분명하지만, 중국이라는 강대국과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현실적 리스크는 예측하기 어렵고, 즉각적으로 타격을 줄 수 있다.
연예계, 산업계, 학계, 언론계 등 모든 영역이 이러한 자기검열의 구조 속에서 ‘미묘한 선’을 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 결과는 자유의 확장이 아니라, 침묵의 일상화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문제를 제기하려는 개인은 때때로 ‘외교를 해치는 사람’, ‘감정을 자극하는 존재’로 비치게 되고, 이는 사회 전체의 침묵을 더욱 고착시키는 방향으로 작용한다.
맺으며: 침묵의 공기 속에서 자라는 침투
‘조용한 침공’은 군화 소리를 내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 내부의 침묵과 무감각을 먹고 자란다. 정치권은 침묵으로 위험을 피하고, 언론은 거리를 두며, 시민은 무심한 일상에 머무른다. 이러한 구조야말로 중국의 영향력이 무력 충돌 없이 사회 안으로 스며들 수 있는 토양이다.
경계심은 요란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묵인과 방관은 곧 동조로 이어진다. 더 늦기 전에, 우리는 이 침묵의 구조를 스스로 들여다보아야 한다.
제5장. 비교의 거울: 호주와 한국
호주는 클라이브 해밀턴의 문제의식이 처음 제기된 곳이다. 호주는 중국의 영향력 확대에 대한 선제적 대응과 제도적 정비를 통해 국제사회의 주목을 받았다. 한국 역시 비슷한 영향력 공세의 환경에 놓여 있지만, 반응은 상대적으로 조심스럽고 느슨하다. 이 장에서는 호주의 대응 사례를 통해, 우리가 놓치고 있는 문제와 가능성을 함께 살펴본다.
호주의 경험: 침투의 실감에서 제도적 대응으로
2000년대 중반 이후, 중국은 호주의 학계, 정치권, 언론, 지역사회에 점차 영향력을 확대했다. 특히 정치인에 대한 기부, 유학생 및 커뮤니티 조직화, 중국 국영 언론의 로비 등은 공공 문제로 부상했다.
클라이브 해밀턴은 저서 《중국의 조용한 침공》을 통해 이 과정을 고발했고, 이는 호주 사회에 강한 경각심을 일으켰다. 이후 호주는 외국 영향력 투명성 제도, 외국인 정치기부 금지법, 공자학원 재검토 등 일련의 제도적 대응에 착수한다. 이는 ‘표현의 자유’와 ‘민주주의의 자율성’을 지키기 위한 현실적 수단이었다.
제도적 장치: ‘외국 영향력 등록제’의 배경과 내용
2018년 호주 정부는 Foreign Influence Transparency Scheme (FITS), 즉 외국 영향력 투명성 제도를 시행했다. 이 제도는 외국 정부, 정당, 국가 기관의 대리인으로 활동하는 인물이나 단체가 이를 등록하고, 그 활동을 공개하도록 의무화한 것이다.
이외에도
외국인의 정치 기부 금지
국가 보안법 개정: 외국 간섭 행위 처벌 강화
공자학원 관련 감사 확대
중국 국영 매체의 정보 유포 활동 조사
등의 조치를 병행하며, 호주는 ‘열린 사회’라는 가치 하에 개방성과 주권 수호의 균형점을 모색했다.
이러한 제도들은 단순한 법 제정이 아니라, 정치권, 언론, 시민사회의 광범위한 공감대 위에서 추진된 것이라는 점에서 더욱 주목할 만하다.
한국에 적용 가능한 교훈들
호주의 사례는 한국에도 여러 시사점을 제공한다.
공개와 등록: 외국 기관 또는 그 영향력 하에 있는 단체의 활동은 자율성을 침해하지 않으면서도 투명하게 관리될 필요가 있다. 특히 유학생 단체, 문화 교류 조직, 국영 언론사 활동 등이 이에 포함될 수 있다.
정치자금 투명성 강화: 한국 정치권도 외국계 기부, 민간 후원, 문화/교류 단체와의 관계를 보다 투명하게 관리할 제도적 장치를 고민할 시점이다.
언론과 학계의 자율성 보호: 영향력 유입을 막기보다, 그에 대해 독립성과 자율성을 제도적으로 보장하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
시민사회의 감시 역할: 호주의 대응은 결국 시민사회와 공론장이 문제를 인식하고, 정치권을 움직인 결과였다. 한국 사회 역시 시민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구조와 언로의 회복이 중요하다.
문화적·정치적 맥락의 차이: 한국은 호주와 다른가
그러나 모든 교훈이 그대로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한국과 호주는 다음과 같은 구조적 차이를 가진다:
지정학적 맥락: 호주는 중국과 해양으로 떨어진 국가지만, 한국은 지리적 인접성과 북핵 문제, 미·중 갈등의 전면에 위치해 있다. 이는 대중 외교에서 더 높은 신중성과 전략적 유연성을 요구한다.
경제적 의존도: 한국은 수출의 약 25%를 중국에 의존하는 경제 구조를 갖고 있다. 특히 반도체, 중간재, 소비재 산업 등 주요 산업에서 공급망 차원의 연결성이 매우 깊다.
정치문화의 차이: 호주는 양당제 기반의 의회 민주주의가 안정된 반면, 한국은 강한 이념 갈등과 정권 교체에 따른 외교 정책의 변동성이 크다. 따라서 초당적 공감대를 바탕으로 한 제도화가 상대적으로 어렵다.
시민 감수성의 차이: 한국 사회에서는 중국 비판이 혐오나 민족감정과 뒤섞여 표현되는 경우가 많아, 공론장이 감정적으로 흐르거나 외교적 부담을 초래하는 경우도 발생한다.
이러한 차이는 호주의 모델을 그대로 도입하기보다, 한국형 대응 모델을 설계할 필요성을 시사한다.
맺으며: 거울은 비교만이 아니라 자각을 위한 도구다
호주는 중국의 영향력에 대한 경험을 통해, 한 사회가 자유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를 정비하고 성찰하는 과정을 보여주었다. 그 여정은 충돌과 논란의 연속이었지만, 결과적으로 민주주의의 내성을 키우는 길이 되었다.
한국은 지금도 영향력의 파도 속에 있다. 우리는 호주라는 거울을 통해, 우리 자신이 어느 방향을 바라보고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단순한 모방이 아니라, 우리의 현실과 문화, 제도적 특성을 고려한 자각과 재설계가 필요한 시점이다.
제6장. 우리가 마주해야 할 질문들
‘조용한 침공’은 외부의 공세만이 아니다.
그것은 동시에, 우리가 지키지 못한 틈과 외면한 침묵이 빚어낸 결과이기도 하다.
이제 우리는 단순한 피해자 프레임에서 벗어나, 우리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야 할 시점에 와 있다.
이 장에서는 그러한 물음들을 정리하고,
민주주의의 자율성과 개방성을 지켜내기 위한 사회적 상상력을 모색해보고자 한다.
표현의 자유는 어디까지 보호될 수 있는가
‘표현의 자유’는 민주주의의 핵심이다.
그러나 외부 권력의 영향력, 특히 경제적 압력이나 외교적 반발이 실질적인 위협으로 작용할 때,
이 자유는 어떤 조건에서 어떻게 지켜질 수 있는가?
연예계의 검열, 학계의 자기검열, 언론의 위축은 모두
법적 제재가 없는 비가시적 영향력에 의한 것이라는 점에서 문제의 본질은 더욱 복잡하다.
우리는 이제 법이 보호하지 못하는 자유,
그리고 개인이 지켜내야 할 자유의 무게에 대해 성찰해야 한다.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는 사회는
단지 발언을 허용하는 곳이 아니라,
그 발언이 외부 압력 없이 가능하도록 제도와 공론장을 지켜내는 사회다.
‘친중’과 ‘반중’ 프레임을 넘어서
중국에 대한 입장을 둘러싼 논의는 너무 쉽게 ‘친중’과 ‘반중’이라는 이분법으로 환원되곤 한다.
이 프레임은 사안을 감정적·정치적 갈등으로 축소시켜,
정작 중요한 구조적 문제를 가려버리는 결과를 낳는다.
우리가 질문해야 할 것은
"중국이 좋은가, 나쁜가"가 아니라
"중국이 우리의 사회 시스템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그에 대해 어떤 자율적 기준과 원칙을 세울 것인가"이다.
민주주의 사회는 복잡한 질문을 단순한 프레임으로 설명하지 않기 위해 애쓰는 사회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혐오도, 맹목적 수용도 아닌
비판적 거리와 성찰적 태도다.
중국과의 관계는 어떻게 균형 잡을 것인가
현실적으로 한국은 중국과 높은 경제적·지정학적 연결성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완전한 차단이나 탈중국화는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
그렇다면 우리의 과제는
‘관계의 단절’이 아니라
‘관계의 재설계’이다.
경제 의존 구조를 다변화할 방안은 무엇인가
민감 이슈에 대한 발언권을 지키기 위한 외교적 전략은 어떤가
문화·학술 교류가 자율성과 투명성을 유지할 제도는 무엇인가
한국이 스스로 정책적 독립성과 가치 기준을 세우는 나라가 되려면,
중국을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조율과 경계의 대상으로 보는 인식 전환이 필요하다.
민주주의 사회의 취약성, 어떻게 보완할 것인가
민주주의는 외부 압력보다 내부의 무관심에 의해 먼저 무너진다.
‘조용한 침공’은 우리가 자유와 자율성을 당연하게 여길 때, 그 틈을 타고 들어온다.
따라서 우리는 민주주의가 작동하기 위한 기반을 다시 점검해야 한다.
언론의 독립성과 투명성 확보
학문·문화 영역의 자율성 유지와 자정 구조
외국 영향력에 대한 감시체계 정비
시민 교육과 공공 감수성 향상
특히 시민사회가 감시자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제도적·문화적 기반을 강화해야 한다.
‘깨어 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 없이는,
아무리 훌륭한 법과 제도를 만들어도 무력해질 수 있다.
맺으며: 불편한 질문, 건강한 사회
진짜 민주주의는 불편한 질문을 외면하지 않는 사회다.
이 책이 던진 질문은 단지 중국이라는 외부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보다 더 근본적으로,
우리가 우리 사회의 자율성과 품격을 어떻게 지켜나갈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다.
‘조용한 침공’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우리가 그 침묵을 끝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그 침공은 계속될 것이다.
제7장. 대안을 묻다: 열려 있으되, 단단한 사회로
열려 있다는 것은 외부와의 교류를 막지 않는 것이다.
단단하다는 것은 그 교류 속에서도 자율성과 기준을 잃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이 두 가지를 동시에 지향할 수 있는가?
‘조용한 침공’이라는 개념은 단지 경고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 사회가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를 묻는 물음이기도 하다.
이 장에서는 그 물음에 답하기 위해, 가능한 제도적, 문화적, 국제적 대안을 함께 고민해 본다.
학계·언론·시민사회의 자정 노력
영향력 공작은 사회의 틈과 느슨한 관행을 파고든다.
그래서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스스로를 들여다보는 내부의 힘, 즉 ‘자정 능력’이다.
학계는 해외 협력·지원금 수령 시 투명한 공시 구조를 마련해야 한다.
특히 공자학원, 중국계 연구자금, 파견 교수 프로그램 등은
학문적 자율성을 침해하지 않는 선에서 투명성과 학내 논의를 병행해야 한다.
언론은 광고, 제휴, 기사 게재 등의 과정에서
외국 정부의 입장에 편승하거나 자기검열을 강요받는 관행을 직시해야 한다.
스스로를 검열하지 않고, 다양한 관점을 담아낼 수 있는 윤리와 환경이 필요하다.
시민사회는 감시자의 역할을 자임해야 한다.
특정 단체가 외국 정부의 입장을 대변하거나,
표현의 자유를 제약하려는 활동을 할 경우 시민 감시와 공론의 힘이 이를 견제할 수 있어야 한다.
제도적 장치 도입 검토
호주, 미국, 유럽 일부 국가들은 외국 영향력 활동에 대한 등록과 투명성 확보를 위해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 왔다.
한국 사회도 다음과 같은 장치들을 진지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
외국 영향력 등록 제도 도입
→ 외국 정부·정당·기관으로부터 자금이나 지시를 받고 활동하는 단체 및 개인은
그 사실을 신고하고 공시하도록 의무화.
정치자금·공공협력의 외국 자금 수수에 대한 투명성 강화
→ 외국계 기업, 단체, 연구기금과의 거래를 공직자 및 정당이 수령할 경우,
보고 및 공개 의무 강화.
언론사·문화단체의 외국 제휴 구조 공개
→ 기사 협약, 콘텐츠 재배포 등에서 외국 정부 또는 기관과의 관계를 명확히 표시.
이러한 제도들은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고,
사회적 신뢰와 감시 기반을 마련하기 위한 수단이다.
국제사회와의 연대 및 정보 공유
‘조용한 침공’은 단지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중국의 영향력 전략은 글로벌 차원에서 작동하고 있으며,
이에 맞서기 위해서는 국제적 연대와 정보 교류가 필수적이다.
정보 공유: 유럽, 호주, 미국, 일본 등과
유사한 영향력 사례에 대한 정보와 분석을 교류.
(특정 단체의 활동 경로, 언론 공작 유형 등)
학술 교류 기준 마련: 국제 학계 간 협의를 통해
자유롭고 대등한 연구 협력의 기준을 공동 설정.
민주주의 연대 네트워크 구축:
표현의 자유와 정보의 투명성 수호를 위해
NGO, 국제 언론, 시민단체 간 연대 플랫폼 활성화.
정치적 독립성과 표현의 자유 보호를 위한 정책 제언
궁극적으로 가장 중요한 과제는
정치의 독립성과 사회의 표현 자유를 실질적으로 보장하는 환경을 구축하는 것이다.
외교적 부담을 이유로 국민의 발언권을 축소하지 말 것
→ 특히 탈북민·홍콩·대만 관련 이슈에 대해
국가가 ‘외교적 민감성’을 이유로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는 행태는
민주주의 사회의 근간을 흔드는 일이다.
‘관계 유지’보다 ‘기준 설정’을 우선시할 것
→ 정부의 외교 전략은 현실적 고려를 담되,
명확한 기준과 원칙 위에 서야 한다.
기준 없는 유연함은 자율이 아니라 종속이다.
정권과 관계없이 지속 가능한 대응 시스템 설계
→ 정권 교체에 따라 외국 영향력 대응 기조가 흔들리지 않도록
초당적 기구 설립 혹은 법제화가 필요하다.
맺으며: 열린 사회를 지키기 위한 단단함
열린 사회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사회가 아니라,
무엇을 받아들이고 무엇을 거부할지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을 가진 사회다.
‘조용한 침공’은
그 기준이 사라질 때, 우리가 얼마나 쉽게 영향력을 허용하는지를 보여주는 말이다.
이제 우리는
경계만이 아니라 설계,
분노만이 아니라 성찰,
차단이 아니라 조율의 기술을 통해
열려 있으되 단단한 사회로 나아가야 한다.
그것이 이 책의 마지막 질문이자,
한국 사회가 스스로에게 던져야 할 다음 물음이다.
에필로그. 감춰진 전쟁, 깨어 있는 시민
우리는 눈에 띄지 않는 전쟁 속에 살아가고 있다.
총성이 없고, 군복도 없으며, 국경도 넘어오지 않는다.
그러나 그 전쟁은 언론의 편집방향을 조정하고,
학계의 연구 방향을 바꾸며,
문화산업의 표현 방식을 검열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 사회의 ‘말할 권리’와 ‘생각할 자유’에 보이지 않는 그림자를 드리운다.
이것이 바로 ‘조용한 침공’의 본질이며,
우리가 지금 마주한 침묵 속의 외교 전쟁이다.
그 침공은 폭력이 아닌 ‘협력’이라는 얼굴로 다가오고,
검열은 ‘배려’라는 말로 포장되며,
자율성의 후퇴는 ‘현실적 판단’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된다.
하지만 묻지 않을 수 없다.
과연 이 조용한 타협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그리고 우리는 어떤 사회를 다음 세대에게 넘기려 하는가?
시민사회가 서야 할 자리
이 책이 던진 질문은 정부나 언론에만 해당되지 않는다.
그보다 더 근본적으로,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어디에 서 있어야 하는가를 묻는다.
시민사회는 단순한 여론의 공간이 아니라,
자유를 지키기 위한 감시의 장이다.
정부가 말하지 못할 때,
언론이 침묵할 때,
학계가 침투될 때,
마지막으로 남아야 할 곳은 깨어 있는 시민의 목소리다.
그 목소리는
정파적 이익이나 혐오가 아닌,
원칙과 자율, 그리고 열린 사회에 대한 애정에서 비롯되어야 한다.
‘자유로운 사회’의 진짜 강인함
진짜 강한 사회는
모든 위험을 봉쇄하는 폐쇄적인 사회가 아니라,
위험을 인식하고도 그것을 이겨낼 수 있는 사회다.
우리는 자유를 누린 만큼,
그 자유를 지킬 책임도 나눠져야 한다.
표현의 자유는 법의 선물이라기보다,
우리가 매일 지켜내야 할 문화이고 태도이며 연대의 결과물이다.
누군가의 침묵이 아니라,
모두의 경계와 성찰,
그리고 공공을 향한 관심이
조용한 침공의 다음 단계를 막는 방파제가 될 수 있다.
끝이 아닌 시작을 향해
이 책이 제안한 것은 ‘완성된 해답’이 아니다.
오히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함께 묻고,
함께 결정해야 할 질문들이다.
“우리는 어떤 사회에 살고자 하는가.”
“자유롭고 주체적인 사회란 무엇인가.”
“말할 수 있는 권리를 지키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조용한 침공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침묵을 더 이상 외면하지 않을 수 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깨어 있는 시민이 역사 앞에 등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