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의 진화, 괴물의 탄생

생물학과 서사가 만나는 지점에서

by 안녕 콩코드
두 작품은 장르도 다르고 접근 방식도 전혀 다르지만, ‘존재란 무엇인가’ 또는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가’라는 근본적 질문을 각기 다른 방식으로 탐구한다는 점에서 충분히 비교·탐구할 만하다. 오히려 이 이질성 덕분에, 두 책을 함께 읽으면 더욱 넓고 깊은 사고의 지평이 열린다.



프롤로그 ― 과학과 소설, 존재를 말하다


서점 한쪽, 과학 코너에 꽂힌 팀 콜슨의 『존재의 역사』는 생물학자의 정밀한 시선으로 생명의 계보를 추적한다. 지구상에 생명이 등장한 이래, 어떻게 이토록 복잡하고 다양한 생명체들이 생겨났는지, 그 과정을 진화라는 언어로 풀어낸 책이다. 그것은 하나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무질서한 우주 한켠, 아주 작은 행성에서 시작되어 수십억 년 동안 축적된 변화의 기록이다. 콜슨은 이 책에서 생명을 둘러싼 수많은 질문에 답하려 한다. 생명이란 무엇인가? 왜 시작되었으며, 어떤 조건 속에서 유지되는가? 그리고 우리는 그 거대한 연쇄 속 어디쯤에 위치한 존재인가?


책에서 말하는 ‘존재’는 유전자와 환경, 우연과 필연이 얽혀 만들어진 생물학적 실체다. 존재는 세포 단위부터 설명되며, 유전자로 복제되고 환경의 선택을 받는다. 존재는 단순한 ‘살아 있음’을 넘어선다. 그것은 생존하고, 적응하며, 경쟁을 거쳐 결국 종의 다양성을 이루는 과정이다. 콜슨이 보여주는 생명의 역사는 거대한 시간이 빚어낸 진화의 파노라마이며, 그 안에서 인간 또한 우연과 변화의 연장선상에 놓인 존재다.


그런데, 이 책을 덮고 문학의 장으로 시선을 옮기면, 전혀 다른 방식으로 '존재'를 말하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독일의 범죄소설 작가 넬레 노이하우스의 『몬스터』는 인간 내면의 심연을 파고든다. 사회의 어둠 속에서 자라난 상처와 침묵, 억눌린 고통이 한 사람의 영혼을 어떻게 무너뜨리는지를 서사로 그려낸 작품이다. 여기서 ‘존재’는 더 이상 유전자에 의해 결정되는 무언가가 아니다. 오히려 심리적 구조이자 사회적 산물로서의 존재다. 어떤 이가 괴물이 되어가는가? 무엇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는가? 이 물음이 소설 전체를 관통한다.


과학서와 범죄소설, 이 둘을 나란히 읽는 것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문장을 만드는 일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한쪽은 객관과 논리, 데이터를 바탕으로 서술되고, 다른 한쪽은 감정과 서사, 내면의 파편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질적인 두 장르가 만나는 지점이 분명히 있다. 바로 ‘존재’라는 개념을 둘러싼 질문들이다.


'존재'라는 단어는 본래 철학의 영역에서 태어난 말이지만, 오늘날 그것은 생물학과 심리학, 문학과 정치의 언어 속에서 다양하게 변주되고 있다. 생물학에서 존재는 탄생과 생존의 조건을 의미한다. 특정 유전자가 어떻게 발현되고, 어떤 환경이 생존에 유리한지에 따라, 존재는 이러한 메커니즘 속에서 선택되고 유지된다. 하지만 문학에서 존재는 흔히 ‘내가 누구인가’라는 근본적 질문과 맞닿아 있다. 고통과 기억, 소외와 상처가 모여 나를 어떤 사람으로 만드는가. 이때 존재는 단순한 ‘살아 있음’보다 ‘어떤 방식으로 살아가게 되었는가’에 더 가까운 개념이다.


콜슨의 『존재의 역사』와 노이하우스의 『몬스터』는 이런 방식으로 '존재'라는 같은 단어를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해석한다. 하나는 생물로서의 인간을 바라보며, 다른 하나는 인간이라는 생물이 감정과 관계, 사회 속에서 어떻게 파괴되거나 뒤틀리는지를 응시한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 두 접근은 한 지점에서 다시 만난다. 바로 ‘조건’이라는 개념이다.


콜슨의 책에서 생명은 조건에 의해 진화한다. 유전자는 아무리 완벽해도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면 소멸하고, 불리한 돌연변이라도 특정 조건에서는 생존의 이점을 가질 수 있다. 조건은 생명의 가능성을 결정짓는 핵심 변수다. 그런데 『몬스터』에서도 우리는 유사한 구조를 발견한다. 소설 속 괴물은 한순간에 등장하지 않는다. 그는 반복되는 학대, 사회적 방치, 외면된 외로움 속에서 서서히 괴물로 길러진다. 심리적 조건의 축적이 결국 존재를 변형시키는 것이다.


존재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시간 속에서 서서히 구성되는 하나의 ‘형태’다. 그것은 유전자의 조합일 수도, 기억의 조각일 수도 있다. 때로는 그 형성 과정이 비틀리고 왜곡되어, 괴물이 되기도 한다. 생물학은 이 괴물을 ‘변이’라 부를 수 있지만, 문학은 그것을 ‘비극’이라 부른다. 괴물은 결코 자연스럽게 태어나지 않는다. 언제나 특정한 조건과 시간의 흐름 속에서 천천히, 그리고 조용히 만들어진다.


이 글은 바로 그 과정을 탐구하려 한다. 진화생물학이라는 과학의 시선으로 존재의 시작과 진화를 따라가고, 범죄소설이라는 서사의 시선으로 존재의 파괴와 괴물화의 궤적을 살펴본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이렇게 묻게 된다.


괴물은 자연의 돌연변이인가,

아니면 사회의 산물인가?


이 물음은 단순히 생물학과 문학의 대립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 사회의 구조와 인간의 취약성, 그리고 우리가 서로를 어떻게 대하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다. ‘괴물’은 타인이 아니라, 우리가 함께 만들어낸 결과일 수 있다는 섬뜩한 진실. 그 진실을 직시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존재의 양면을 온전히 이해해야 한다.


지금부터 그 여정을 함께 걸어가 보자.


1장. 생명의 조건 ― 『존재의 역사』가 말하는 존재


우리는 ‘존재’라는 말을 종종 너무도 쉽게 사용한다. 누군가 “나는 존재한다”고 말할 때, 그 말은 단순한 생물학적 생존을 뜻할 수도 있고, 철학적 자각을 드러낼 수도 있으며, 혹은 사회적 인정을 향한 상징적 몸짓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문장을 보다 근본적인 차원에서 이해하려면, 결국 하나의 질문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생명이란 무엇인가?”


팀 콜슨의 『존재의 역사(The Universal History of Us)』는 이 질문을 정면으로 받아들이는 책이다. 그는 이에 대한 답을 단순한 과학 지식의 나열이 아닌, 하나의 서사로 풀어낸다. 이 책은 생명체가 어떻게 탄생했고, 어떤 과정을 거쳐 지구에 정착했으며, 왜 지금의 형태로 존재하는지를 설명하는 일종의 ‘생명의 연대기’다. 단순한 정보의 나열이 아니라, 오늘의 ‘우리’를 이해하기 위한 과학적 기원 서사이기도 하다.


콜슨은 존재를 ‘진화의 산물’로 본다. 즉,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은 수십억 년에 걸쳐 축적된 생물학적 변화의 결과다. 그의 설명을 따라가다 보면, 존재는 더 이상 주관적인 감정이나 추상적인 철학 개념이 아니라, 엄연한 자연 현상으로 다가온다. 존재란 단순히 ‘있다’는 상태가 아니라, ‘형성되고, 유지되며, 변화해 온 과정’ 그 자체다.


진화생물학의 눈으로 존재를 바라보다

콜슨은 생명의 기원을 다루며 생물학의 핵심 개념들을 탁월하게 엮어낸다. 그 가운데 중심을 이루는 것은 자연선택, 돌연변이, 그리고 환경과의 상호작용이다. 이 세 가지는 진화론을 구성하는 삼각축이라 할 수 있다.


자연선택은 생존에 유리한 형질을 가진 개체가 더 많은 자손을 남기게 되는 메커니즘이다. 다윈 이후 진화생물학의 핵심 원리로 자리 잡은 이 개념은, 어떤 형질이 선택받느냐가 환경 조건에 따라 달라진다는 점에서 우연성과 법칙성이 동시에 작용하는 구조를 갖는다. 유전자에 무작위로 발생한 변화, 즉 돌연변이가 어떤 환경에서 생존에 유리하게 작용하면, 그 형질은 다음 세대로 전달되어 점차 증폭된다. 반대로 불리하거나 적응에 실패한 형질은 사라진다. 콜슨은 이 단순한 원리로부터 시작해, 어떻게 생명체가 이처럼 복잡하고 정교한 형태로 진화했는지를 설득력 있게 제시한다.


여기에 환경이라는 요소가 더해진다. 진화는 실험실이라는 고립된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막과 빙하, 열대우림과 심해, 그리고 도시의 틈새와 균열 속에서 진행된다. 어떤 환경에서는 빠른 번식이 유리한 전략이 되고, 또 다른 환경에서는 둔감함이 생존의 열쇠가 된다. 결국 존재란 특정한 시간과 장소, 그리고 조건 속에서 가능해진 하나의 형태다. 존재는 보편적인 실체가 아니라 언제나 ‘조건적’인 것이다.


인간, 진화의 특이한 가지

이 지점에서 우리는 하나의 특별한 생명체와 마주하게 된다. 바로 인간이다. 인간은 그 어떤 종보다도 복잡한 사회를 구성하고, 언어와 도구를 활용하며, 나아가 자기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는 유일한 생명체다. 그렇다면 인간이라는 존재는 진화의 어느 지점에서, 어떤 전환을 거쳐 탄생한 것일까?


콜슨은 인간의 진화를 단지 해부학적 변화로만 설명하지 않는다. 그는 공감하고 협력하며 공동체를 구성하는 능력이야말로 인간 진화의 핵심 동력이라고 본다. 인간은 타인을 의식하고, 기억을 공유하며, 규범을 만들어낸다. 이러한 사회적 능력은 생존에 결정적인 이점을 제공했고, 그로 인해 자연선택의 과정에서 선택되었다. 결국 인간의 존재는 사회적 관계와 정서적 소통을 전제로 탄생한 진화의 결과물인 셈이다.


인간은 진화라는 계통수의 끝단에 놓인, 매우 특이한 가지다. 우리는 생물학적 진화의 산물로 ‘존재하게 되었지만’, 그 존재를 스스로 자각하고, 의미를 묻고, 삶의 방향을 설계하려는 욕망을 지닌 존재로 진화했다. 이 자각 능력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가장 근본적인 특질이다. 우리는 살아 있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왜 살아야 하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나는 누구인가’를 끊임없이 되묻는 생명체다. 진화는 인간을 만들어냈고, 인간은 마침내 진화를 성찰하기에 이르렀다. 아이러니하게도, 진화는 스스로를 되돌아볼 수 있는 존재를 탄생시킨 것이다.


존재는 우연과 법칙의 경계에서

『존재의 역사』에서 가장 인상 깊은 점은, 콜슨이 존재의 형성을 ‘법칙과 우연이 교차하는 긴장 속에서’ 설명한다는 것이다. 진화는 결코 정밀한 설계가 아니다. 그것은 수많은 시행착오와 실패, 그리고 멸종의 흔적 위에 쌓인 우연의 결과다. 생명은 언제나 불확실했고, 인간이라는 존재 역시 필연적으로 예정된 결말이 아니었다. 지금 여기, 우리가 존재한다는 이 사실조차도 수많은 가능성 속에서 우연히 선택된 하나의 결말에 불과하다.


만약 거대한 운석이 공룡을 멸종시키지 않았다면, 혹은 어떤 유전자가 다른 방식으로 발현되었다면, 지금의 우리는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런 의미에서 존재는 ‘선택된 가능성’의 결과다. 그것은 놀랍도록 정교하면서도, 한없이 취약한 생명의 결합이다. 콜슨은 이를 경외심과 겸허함의 언어로 풀어낸다. 존재는 단순히 과학적으로 설명되는 현상이 아니라, 우연과 법칙이 만나 만들어낸 하나의 기적이다.


우리는 흔히 존재를 자명한 것으로 여긴다. 그러나 이 책은 그 자명함을 해체하고, 존재가 얼마나 복잡한 조건의 조합 위에 놓여 있는지를 되묻는다. 지금 이 순간 살아 있는 우리는, 사실상 무수한 사라진 가능성들 위에 세워진 단 하나의 생존 서사다.


과학으로 존재를 다 설명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콜슨이 보여주는 ‘존재의 역사’는 오직 과학적 해석에만 머무는 것일까? 철학적·문학적·윤리적 존재 개념은 그 바깥으로 밀려나는가?


꼭 그렇지는 않다. 오히려 콜슨은 과학의 언어로 존재를 서술하면서도, 그 존재가 품고 있는 경험적·감정적·윤리적 함의를 조용히 환기한다. 그는 과학이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다는 전지적 환상에 빠지지 않는다. 존재의 형식은 과학이 분석할 수 있지만, 존재의 의미는 여전히 인간이 스스로 묻고 해석해야 할 과제로 남겨둔다.


이 지점에서 『몬스터』와의 연결 고리가 생긴다. 그 소설은 인간 존재가 어떻게 파괴되고 비틀리는지를 서사의 언어로 추적한다. 두 책은 전혀 다른 길을 걷지만, 존재를 깊이 있게 이해하려면 이 두 접근을 모두 품어야 함을 보여준다. 과학은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하고, 문학은 ‘왜’ 그런 존재가 되었는지를 묻는다.


맺으며: 존재, 한없이 구체적인 것

『존재의 역사』는 생명을 이야기하는 책이지만, 동시에 인간 존재의 조건을 다시 돌아보게 만든다. 우리는 우연히 태어났고, 다양한 조건 속에서 진화했으며, 지금도 또 다른 조건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존재는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세포와 유전자, 사회적 맥락과 기억, 선택과 실수들이 켜켜이 쌓여 이루어진, 지극히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무늬다.


이 책을 읽고 나면, ‘존재한다’는 말은 단순히 ‘살아 있다’는 상태를 넘어선다. 존재란 오랜 시간에 걸쳐 형성되고, 환경에 따라 변화하며, 때로는 극적으로 비틀어지는 무엇이다. 콜슨은 과학의 언어로 존재의 경로를 설명하지만, 그 설명은 과학의 경계를 넘는 여운을 남긴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는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이토록 복잡하고도 긴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나’라는 존재,

나는 지금, 과연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2장. 괴물의 조건 ― 『몬스터』가 보여주는 파괴의 서사


한 사람의 인생을 뒤에서부터 되짚는다는 것. 그것은 잊힌 기록을 끌어모으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어떤 과정을 거쳐 지금 이 지점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하나하나 추적하는 일이다. 그는 어떤 상처를 입었고, 누구에게 외면당했으며, 어떤 말을 들었고, 또 어떤 말을 끝내 듣지 못했는가. 이것은 호기심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한 존재의 붕괴 과정을 따라가는 윤리적 응시이자, 인간 이해에 대한 조심스러운 접근이다.


넬레 노이하우스의 소설 『몬스터』는 바로 그런 시선을 요구한다. 표면적으로는 연쇄살인의 수수께끼를 좇는 전형적인 범죄소설처럼 보이지만, 껍질을 벗겨보면 이 작품은 오히려 인간 존재의 심리적 기반과 사회적 조건을 해부하는 서사에 가깝다. 소설 속 극단적인 폭력은 그 자체로 충격적이지만, 더욱 섬뜩한 것은 그 폭력이 발생한 뿌리를 따라가다 보면 결국 우리가 사는 현실, 그리 멀지 않은 어둠 속에 도달하게 된다는 점이다.


괴물은 태어나는가, 길러지는가.

넬레 노이하우스의 『몬스터』는 제목부터 이 명징한 질문을 던진다. 괴물은 처음부터 그렇게 태어나는가, 아니면 점차 그렇게 길러지는가? 이야기가 전개될수록, 독자는 점점 후자의 가능성 쪽으로 이끌리게 된다 — 마치 그 답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처럼.


소설 속 연쇄살인범은 단지 ‘비정상적인 뇌구조’를 가진 기형적 존재가 아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지속적으로 방치되고 학대당했으며, 단 한 번도 누군가에게서 온전한 보호를 받아본 적 없는 사람이다. 그를 둘러싼 어른들은 무심하거나 잔인했고, 사회 제도는 그를 그저 ‘문제아’ 혹은 ‘가난한 아이’쯤으로 취급했을 뿐이다. 그는 분명 사회 안에 존재했지만, 결코 제대로 인정받은 적 없는 존재였다.


그런 삶은 마치 정체불명의 화학물질을 서서히 흡수하는 것과도 같다. 처음엔 아무 일도 없는 듯하지만, 어느 순간 내부 조직이 완전히 변형되고 만다. 『몬스터』는 바로 그 변화의 과정을 집요하게 따라간다. 그는 처음부터 ‘괴물’로 태어난 존재가 아니었다. 누군가의 아이였고, 누군가의 이웃이었으며, 한때 학교에 다녔고, 길거리에서 어른들과 스치던 평범한 아이였다. 단지, 아무도 그를 보려 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는 늘 그 자리에 있었지만, 존재로서 ‘인정’ 받지 못했다. 그리고 긴 시간 동안, 누구도 그에게 진심으로 말을 걸지 않았다.


심리적 결핍의 누적, 그리고 존재의 변형

『몬스터』가 보여주는 괴물성은 단번에 폭발하는 돌발적 사건 같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지하 깊숙이 조용히 누적되는 지진대처럼, 수면 아래에서 오랜 시간 동안 압력을 키워가며 형성된다. 처음엔 자기혐오와 수치심 같은 내면의 균열로 드러나고, 점차 타인에 대한 분노와 불신으로 형태를 바꾼다. 그리고 마침내, 스스로도 통제할 수 없는 파괴 충동으로 터져 나온다.


소설은 이 심리적 메커니즘을 정밀하게, 공을 들여 묘사한다. 주인공은 반복적으로 소외되고 무시당하며, 특히 어른들에 의해 철저히 ‘투명한 존재’로 취급된다. 그 결과, 그는 세상과의 감정적 연결을 상실한 채 존재의 기반 자체가 무너진 상태에 이르게 된다. 이 상태는 단순한 고립이나 우울을 넘어선다. 그것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자각이 붕괴된 자리다. 그는 더 이상 자신을 ‘사람’으로 인식하지 않으며, 타인을 오직 ‘대상’으로만 바라보게 된다.


이런 조건은 인간을 서서히, 그러나 확실하게 파괴의 경로로 밀어 넣는다. ‘존재’는 단지 물리적 생존만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인정받고, 소통하며, 돌봄을 주고받는 관계 속에서만 비로소 온전하게 유지될 수 있다. 『몬스터』는 바로 이 관계의 부재가 어떻게 한 인간을 괴물로 변형시키는지를 집요하게 추적한다. 결국 괴물이란, 심리적 결핍의 누적, 정서적 단절의 총합, 그리고 사회적 방치의 결과물인 셈이다.


생물학이 설명하지 못하는 ‘존재의 뒤틀림’

1장에서 살펴본 팀 콜슨의 『존재의 역사』는 존재를 생물학적 조건과 진화의 산물로 설명한다. 유전자, 환경, 돌연변이, 자연선택—존재는 이 네 가지 요소의 상호작용 속에서 탄생하고 유지된다. 그러나 넬레 노이하우스의 『몬스터』는 그런 방식으로는 결코 포착할 수 없는 ‘존재의 일그러짐’을 다룬다.


여기서 등장하는 존재는 생물학적으로는 아무 이상이 없지만, 심리적 차원에서는 깊게 왜곡되고 파괴된 상태다. 그의 몸은 멀쩡히 살아 있으나, 그 내면은 돌이킬 수 없이 무너져 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과학이 설명하지 못하는 존재의 결핍, 혹은 파괴를 마주하게 된다.


그것은 어떤 실험으로도 수치화할 수 없는 감정의 균열이며, 데이터로는 잡히지 않는 기억과 고통의 잔재다. 『몬스터』는 이처럼 생물학이 설명할 수 없는 ‘정신의 진화 실패’를 보여준다. 그리고 그 실패는 종종, 너무도 일상적인 무관심과 방치 속에서 조용히 진행된다.


우리는 누군가가 끔찍한 범죄를 저질렀을 때, 본능적으로 생물학적 원인을 찾고 싶어진다. “그는 원래 사이코패스야”, “뇌구조가 남들과 달라” 같은 말은 범죄자의 행동을 단순화하고, 그를 우리와는 전혀 다른 세계의 사람으로 밀어낸다. 물론 이러한 요소들이 완전히 무시될 수는 없다. 유전적 요인이나 뇌 기능의 차이는 때로 하나의 단서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몬스터』는 이렇게 말한다.

괴물은 단지 ‘다르게 태어난 존재’가 아니라, ‘다르게 취급당한 존재’일 수도 있다고.


이 말은 인간 존재의 어두운 변화를 이해하려 할 때, 우리가 생물학적 설명만으로는 결코 충분하지 않다는 점을 일깨운다. 괴물이 되어간다는 것은, 단지 어떤 선천적 결함 때문이 아니라, 오랜 시간에 걸친 관계의 실패와 돌봄의 부재, 사회적 무관심이 축적된 결과일 수 있다.


이것은 ‘존재’를 설명하는 데 있어 과학의 한계를 짚는 동시에, 문학이 할 수 있는 일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문학은 타인의 내면으로 침잠해 들어가, 그가 끝내 말하지 못한 상처와 침묵을 이야기로 풀어낸다. 그리고 그 서사를 통해 우리는 ‘괴물이 된 인간’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복원할 수 있게 된다. 그것은 범죄를 정당화하려는 변명이 아니다. 오히려 존재를 깊이 이해하기 위한 윤리적 전제다. 우리가 인간을 단지 유전자와 신경 회로의 조합이 아닌, 감정과 기억, 관계와 상처가 얽힌 복합적인 존재로 바라보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괴물은 어디에서 만들어지는가

넬레 노이하우스의 『몬스터』는 하나의 비극적 존재를 통해 우리 사회에 묻는다. 괴물은 어디에서 만들어지는가? 그는 학교에서, 가정에서, 거리에서, 제도의 빈틈과 법의 사각지대에서 만들어졌다. 그가 머물렀던 공간에는 늘 어른들이 있었지만, 누구도 제대로 보지 않았고, 아무도 책임지지 않았다.

그는 계속해서 존재하고 있었지만, 아무도 그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다. 마침내 그가 괴물이 되었을 때, 사람들은 말한다. “그는 원래 그런 사람이었어.” 그 말과 함께, 모두 고개를 돌린다.


이 지점에서 소설은 우리 앞에 날카로운 윤리적 질문을 내민다. 괴물은 단지 한 개인의 책임인가, 아니면 우리 모두의 결과인가? 우리는 흔히 범죄자를 응징할 권리를 말하지만, 그가 범죄자가 되기까지의 삶과 환경에 대해서는 과연 책임이 없는가? 그의 곁에 있었던 사회, 가정, 제도는 과연 그에게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았는가? 우리는 늘 ‘괴물 이후’를 이야기한다. 그가 저지른 행위, 그에 대한 처벌, 그가 만들어낸 공포.

그러나 정작 ‘괴물 이전’의 세계—그를 만들어낸 시간, 조건, 무관심과 방치에 대해서는 얼마나 진지하게 성찰하고 있는가?


『몬스터』는 감정에 호소하며 독자를 몰아붙이지 않는다. 오히려 차분하고 치밀한 구성 안에서, 한 사람이 괴물이 되기까지의 경로를 단계적으로 드러낸다. 그 점에서 이 이야기는 더욱 섬뜩하다. 단지 ‘그 사람’만의 비극이 아니다. 어느 누구라도 비슷한 조건에 놓인다면, 충분히 무너질 수 있다는 보편적인 진실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괴물은 예외적인 존재가 아니라, 우리가 외면하고 있는 평범한 사람의 한 가능성이며, 그 가능성은 사회가 감당하지 못한 고통 속에서 서서히 자라난다.


우리는 괴물을 어떻게 만들고 있는가

『몬스터』를 읽으며 마주하게 되는 가장 불편한 진실은 이것이다. 괴물이 되기까지의 과정이 결코 비현실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우리는 타인의 고통에 점점 더 둔감해지고, 제도는 취약한 존재를 보호하기보다는 분류하고 배제하는 데 익숙하다.

미디어는 범죄를 소비하고, 학교는 아이들의 미세한 징후를 지나치며, 사회는 ‘정상’과 ‘비정상’이라는 납작한 이분법으로 존재를 재단한다. 이 모든 무관심과 오판이 쌓여, 괴물의 조건을 만들어낸다. 괴물은 돌연히 나타나는 존재가 아니다. 그는 우리가 돌보지 않은 시간과 장소에서, 조용히 길러진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도, 또 다른 괴물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괴물의 조건은 어느 날 갑자기 생겨나지 않는다. 그것은 시간이 쌓이고, 침묵이 반복되며, 외면이 일상화될 때 서서히 자라난다. 우리는 종종 괴물을 두려워하지만, 정작 그 기원에는 무관심하다. 어쩌면 괴물이란, 사회가 가장 오래 외면해 온 존재, 그리고 가장 보고 싶어 하지 않았던 얼굴인지도 모른다.


맺으며: 존재의 왜곡, 인간의 책임

『몬스터』는 단순히 범죄의 실체를 파헤치는 추리 소설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라는 존재가 어떻게 일그러질 수 있는지를 정밀하게 추적한 하나의 사회심리학적 리포트이며, 존재에 대한 깊은 문학적 탐구이기도 하다. 만약 진화생물학이 존재의 기원과 가능성을 설명해 주는 학문이라면, 문학은 그 가능성이 어떻게 좌절되고 파괴되는지를 보여주는 감정의 지도다. 과학은 인간이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가’를 묻고, 문학은 ‘왜 그렇게 무너질 수밖에 없었는가’를 되묻는다. 『몬스터』는 바로 그 지점에서, 우리가 외면해 온 사회적 조건과 윤리적 책임을 정면으로 응시하게 만든다. 괴물은 단지 ‘다르게 태어난 존재’가 아니라, 우리가 끝내 외면했던 ‘다르게 다뤄진 존재’였을 수 있다. 존재의 일그러짐은 어느 한 개인의 파괴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무관심과 방조가 만든 집합적 결과일지도 모른다. 소설은 우리에게 묻는다.

존재가 뒤틀리기 전에, 우리는 무엇을 했는가? 그리고 지금, 우리는 또 어떤 존재를 만들어내고 있는가?


괴물은 단순한 생물학적 돌연변이가 아니다.

그것은 윤리적 실패의 증거다. 우리가 놓치고, 외면하며, 책임지지 않은 것들이 쌓여 만들어진 존재의 뒤틀림이다. 그 뒤틀림은 단지 한 개인의 파국에 머무르지 않는다. 우리 사회 깊숙이 뿌리내린 균열이기도 하다. 『몬스터』는 조용히, 그러나 분명히 말한다. “괴물은 혼자 만들어지지 않는다.”


3장. 조건이 존재를 만든다 ― 과학과 문학의 교차점


‘존재는 주어진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말은 이제 철학적 언어를 넘어, 생물학과 문학 양쪽에서 모두 유효한 진술이 되었다. 존재는 고정된 본질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과정이며, 그 과정을 가능하게 하거나 왜곡하는 것은 바로 환경, 즉 조건이다. 팀 콜슨의 『존재의 역사』와 넬레 노이하우스의 『몬스터』는 장르와 접근법은 다르지만, 이 중요한 지점에서 만난다. 두 작품 모두 ‘존재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조건에 의해 형성되고 변형되는 산물’이라는 전제 아래, 인간과 생명의 생성과 변화를 탐구한다.


콜슨은 과학자의 시선으로 생명의 역사를 해부하고, 노이하우스는 소설가의 시선으로 한 인간 존재의 붕괴를 추적한다. 콜슨의 세계에는 유전자와 자연선택, 돌연변이와 생존이 자리 잡고 있고, 노이하우스의 세계에는 학대와 침묵, 외면과 트라우마가 놓여 있다. 겉으로 보면 전혀 다른 언어처럼 보이지만, 두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크게 다르지 않다. 생물도, 인간도 모두 환경이라는 조건의 영향을 받아 서서히 형성되고, 동시에 서서히 무너져 간다는 점이다. 결국 생명의 다양성과 인간의 왜곡된 존재 모두, 조건의 축적이라는 동일한 논리 아래 놓여 있다.


진화의 시간과 트라우마의 시간

팀 콜슨은 『존재의 역사』에서 생명을 진화의 시간 속에 놓고 설명한다. 생명은 어느 한순간에 갑자기 등장하지 않는다. 최초의 단세포 생물이 탄생한 이래, 수십억 년이라는 긴 시간이 흐르며 다양한 종들이 생겨났고, 수많은 생명체가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어떤 생명은 돌연변이라는 우연의 산물을 통해 더 잘 적응하여 살아남았고, 어떤 생명은 환경 변화에 적응하지 못해 멸종했다. 이렇듯 ‘존재’란 결국 시간이라는 거대한 흐름 속에서 누적되고 변형되며 선택된 산물이다. 반면, 넬레 노이하우스의 『몬스터』가 다루는 시간은 훨씬 단축되고 밀도 높은 ‘트라우마의 시간’이다. 한 인간 존재가 괴물이 되어가는 과정은 순간의 충동이 아닌, 오랜 상처와 방치, 고통이 점차 쌓여 만들어진다. 그 시간은 짧을 수도, 길 수도 있지만, 항상 개인의 내면 깊은 곳에서 천천히 뒤틀림을 일으킨다. 이처럼 콜슨이 제시하는 진화의 시간과 노이하우스가 그리는 트라우마의 시간은 다르지만, 두 시간 모두 존재의 형성과 변형을 설명하는 데 핵심적이다. 존재는 거대한 우주적 시간 속에서부터, 한 인간의 내면 깊은 시간까지, 다양한 스케일의 시간 속에서 만들어지고 변화한다.


노이하우스의 『몬스터』 역시 시간을 중심축으로 삼는다. 다만 그것은 생물학적 진화의 시간이 아니라, 심리적 파괴와 트라우마의 시간이다. 한 사람이 괴물로 변해가는 과정은 결코 갑작스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반복된 상처, 오래된 방치, 무너진 관계와 잊힌 보호가 차곡차곡 쌓이고 축적되면서, 한 존재의 성격을 변화시키고 감정의 흐름을 뒤틀며, 마침내 인간성을 와해시키는 과정으로 이어진다. 존재의 일그러짐은 돌발적인 사건이 아니라, 오랜 시간에 걸친 조용한 침식의 결과인 것이다.


진화의 시간과 트라우마의 시간은 방식은 다르지만, 공통된 본질을 지닌다. 그것은 둘 다 되돌릴 수 없으며, 축적된다는 점이다. 존재는 어느 한순간의 선택이나 사건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 흐름과 조건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서서히 형성된다. 생명체가 특정 환경에 적응하며 자신을 변화시키듯, 인간 존재도 끊임없이 외부와 상호작용하며 모습을 달리한다. 이 변형은 때로는 생존을 위한 진보가 되고, 때로는 파괴로 향하는 침식이 된다.


존재는 선택되지 않는다, 다만 길러질 뿐

이 두 책에서 두드러지는 공통점은 ‘존재’를 능동적인 선택의 결과로 보지 않고, 조건에 의해 형성되는 과정으로 이해한다는 점이다. 인간이 어떤 존재가 될지는 온전히 개인의 의지나 선택에 귀속되지 않는다. 오히려 존재는 끊임없이 외부 환경과 관계 속에서 길러지고, 조율되며, 때로는 일그러진다. 생명은 스스로를 선택하지 못한다. 다만 자신이 놓인 조건에 반응하고 적응하며, 그렇게 존재하게 된다.


『존재의 역사』에서 콜슨은 이를 생물학적 관점에서 설명한다. 어떤 유전자가 ‘좋은 형질’인지 ‘나쁜 형질’인지는 절대적인 기준이 아니다. 그 형질이 어떤 환경과 맥락 속에서 작용하느냐에 따라 생존 가능성이 달라진다. 예를 들어, 빠른 번식은 특정 환경에서 생존의 이점이 되지만, 다른 환경에서는 오히려 단점이 될 수 있다. 존재란 고정된 ‘본질’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적응의 패턴이다. 환경은 생명을 재료 삼아 실험하고, 선택하며, 필요에 따라 버리기도 한다.


『몬스터』에서는 이 구조가 심리적으로 반복된다. 괴물은 타고난 본성이 아니라, 환경과 상황이 만들어낸 결과다. 학대와 외면, 제도의 부재와 사회적 방치 속에서 그의 존재는 조금씩 무너지고 다시 뒤틀린다. 괴물은 선택된 존재가 아니다. 다만 그렇게 길러졌을 뿐이다. 그는 자신을 자각하기도 전에 세상이 그를 부정했고, 결국 그 부정을 내면화하며 자신을 잃었다. 자신이 될 수 없었던 그는 결국 괴물이 되고 말았다.


생명의 다양성과 인간의 일그러짐은 모두 ‘조건의 산물’이다. 진화생물학은 생물의 다양성을 ‘조건의 함수’로 설명한다. 콜슨은 유전자의 무작위 변이와 환경의 선택이 맞물려 수많은 생명 종이 탄생했다고 말한다. 이는 생명의 경이로움인 동시에, 치열한 생존 경쟁의 기록이기도 하다. 생명은 스스로 조건을 선택하지 못한다. 단지 주어진 조건에 적응하며, 그 안에서 존재 방식을 끊임없이 변화시켜 나간다.


하지만 이 구조는 『몬스터』 속 인간 존재의 붕괴 과정과 크게 다르지 않다. 괴물의 탄생 역시 조건의 산물이다. 수많은 삶의 가능성들이 있었지만, 그 가능성들은 환경이라는 필터를 통과하며 하나둘씩 제거되었다. 타인과의 관계, 보호받을 기회, 인정받음의 경험, 신뢰를 배우는 과정… 만약 이런 조건들이 주어졌다면, 그는 전혀 다른 존재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 주어진 조건은 정반대였다. 그의 존재는 점점 견고해지기는커녕, 틈으로 가득 찬 균열체가 되어갔다.


이처럼 생명의 다양성과 인간의 일그러짐은 모두 조건의 축적에서 비롯된다. 한쪽은 생존을 향해 진화하고, 다른 한쪽은 파괴를 향해 추락한다. 이 차이는 본성의 문제가 아니라, 주어진 조건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존재는 자연이라는 필터를 거치기도 하고, 사회라는 필터를 통과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 필터는 언제나 불완전하며, 때로는 잔인하기까지 하다.


존재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반응하고 변형되는 것

『존재의 역사』와 『몬스터』를 함께 읽을 때 가장 뚜렷하게 다가오는 통찰은 바로 이것이다.

존재는 살아 있는 한 끊임없이 변화하고, 반응하며, 적응하는 과정이라는 사실이다.


콜슨은 진화를 정적인 구조가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동적인 흐름으로 설명한다. 환경이 바뀌면 존재도 바뀐다. 생명은 유연하게 적응하거나, 그렇지 못하면 소멸한다. 고정된 존재란 없다. 존재는 늘 무언가가 되어가는 중이다. 이 과정을 생물학의 언어로는 ‘적응’, 철학의 언어로는 ‘형성’, 문학의 언어로는 ‘서사’라고 부를 수 있다.


노이하우스의 소설도 마찬가지다. ‘괴물’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그 사람도, 처음부터 그런 존재였던 것은 아니다. 그는 수많은 가능성을 지닌 하나의 아이였고, 스스로를 구성해 가는 존재였다. 그러나 주변의 조건들은 그에게 제대로 된 형성과 성장을 허락하지 않았다. 존재는 다듬어지지 못한 채 점점 깎여나갔고, 결국 타인의 고통에 무감한 존재, 나아가 자기 자신에게조차 무감한 존재로 전락하고 만다.


존재는 언제나 조건에 반응한다. 그리고 그 반응은 시간 속에서 누적된다. 좋은 조건은 존재를 단단하게 만들고, 나쁜 조건은 존재를 서서히 뒤틀어놓는다. 존재는 애초에 완성된 실체가 아니다. 언제나 ‘되어가는 중’이며, 그 과정은 관계와 사회, 환경과 기억 속에서 끊임없이 변형된다.


존재를 조건으로 다시 읽기

이제 우리는 ‘존재’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그 말이 품고 있는 무게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존재는 단순히 ‘있는 것’이 아니라, 형성되고, 변형되며, 조건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콜슨은 과학의 언어로, 노이하우스는 문학의 언어로 그 사실을 반복해서 증명한다. 존재란 단순한 ‘살아 있음’이 아니라, 어떻게 살아남았는가, 어떤 환경을 통과해 지금 여기에 이르렀는가에 대한 이야기이자 기록이다.


그리고 그 기록은 늘 우리의 조건들을 다시 들여다보게 만든다. 우리는 종종 누군가의 존재를 타고난 것처럼 여긴다. 하지만 과학도, 문학도 말한다. 그 존재는 만들어진 것이라고. 조건에 의해, 시간에 의해, 그리고 타인에 의해.


우리는 묻게 된다. 지금 이 순간, 우리는 어떤 존재를 만들어가고 있는가? 또는, 우리가 외면한 누군가는 어떤 존재로 변해가고 있는가? 이 질문은 단순한 과학적 사실이나 문학적 감상을 넘어서, 함께 살아가는 이 세계를 진정으로 이해하기 위한 가장 근본적인 사유다.


4장. 괴물이란 누구인가 ― 생물학적 변이 vs 윤리적 파괴


과학적 진화론에서 ‘변이체’는 새로운 생명의 가능성으로 여겨진다. 돌연변이와 유전적 변이는 생물 다양성의 원천이자, 미래의 새로운 종이 탄생할 수 있는 토대다. 자연계에서 변이체는 결코 부정적인 개념만은 아니다. 그것은 생명의 역동성과 적응력을 증명하는 증거이며, 생태계의 지속 가능성을 뒷받침하는 원동력이기도 하다.


하지만 ‘괴물’이라는 단어가 인간 사회에서 지니는 의미는 생물학적 변이와는 전혀 다른 차원에 있다. 괴물은 단순히 ‘다른’ 존재가 아니라,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판단의 대상이다. 그는 사회적 규범을 위반한 자이며, 종종 법적 책임을 지는 범죄자와 동일시된다. 괴물성은 타고난 본성에 대한 두려움이자, 사회가 부과하는 낙인과 공포의 상징이기도 하다.

이 장에서는 두 가지 ‘괴물’을 나란히 놓고 비교한다. 하나는 자연계에서 탄생한 생물학적 변이체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가 낙인찍은 도덕적 존재로서의 괴물이다. 이 두 존재는 무엇이 다르며, 그 차이는 우리에게 어떤 사유의 방향을 요구하는가. 이 장은 그 질문을 따라간다.


자연 속의 변이체: 새로운 가능성의 탄생

진화생물학에서 ‘변이체’는 우연과 필연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탄생한다. 유전자의 미세한 변화는 돌연변이를 일으키고, 그 변화가 환경에 잘 적응할 수 있다면 결국 종 전체에 퍼져 새로운 생명 형태를 만들어낸다. 팀 콜슨이 『존재의 역사』에서 강조했듯, 생명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면서 진화해 왔다. 변이는 그 진화 과정에서 필수적인 ‘실험’이며, 또 하나의 ‘도전’이다.


이 변이체들은 흔히 ‘기형’이나 ‘이상’으로 분류되곤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자연이 다양성을 생성하는 방식이다. 어떤 돌연변이는 생존에 유리하게 작용하기도 하고, 불리하게 작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모든 변이는 생명의 ‘가능성’을 확장한다는 점에서 진화의 핵심적 역할을 한다. 자연은 완벽한 설계자가 아니다. 변이 없이는 진화도 없으며, 변이체야말로 자연이 창조성을 발휘하는 방식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진화론적 존재론 속에서 ‘괴물(monster)’이라는 개념은 적절하지 않다. 자연은 괴물을 만들지 않는다. 자연은 단지 다양성을 만든다. 존재는 언제나 변이의 산물이자, 변이는 존재가 지닌 가장 근본적인 속성이다.


인간 사회 속 괴물: 도덕과 책임의 시선

그러나 인간 사회가 규정하는 ‘괴물’은 자연 속의 변이체와는 전혀 다른 개념이다. 극단적인 폭력과 악행을 저지른 이들, 특히 이해할 수 없을 정도의 잔혹함을 드러낸 범죄자들은 흔히 ‘괴물’로 불린다. 이때의 괴물성은 유전적 돌연변이나 생물학적 변화의 결과가 아니다. 그것은 도덕적 판단과 윤리적 책임의 맥락 속에서 부여된 사회적 낙인이다. 괴물은 법과 규범을 위반한 자, 상식적으로 용납할 수 없는 행동을 한 자로 간주되며, 이 판단은 종종 그 개인의 본성에 대한 공포와 혐오로 이어진다. 자연이 아닌 사회가 만들어낸 존재, 그것이 인간 사회 속 괴물이다.


넬레 노이하우스의 『몬스터』가 보여주듯, 인간 사회에서 ‘괴물’은 단순한 이질적 존재가 아니다. 그는 사회적 판단의 산물이며, 그에게는 도덕적 책임과 법적 처벌이 부과된다. 그가 어떤 환경에서 자랐든, 어떤 상처를 품었든, 사회는 그 결과를 기준으로 그를 ‘괴물’로 규정하고 배제한다. 이는 곧 개인의 타고난 본성과는 무관하게, 그의 행동에 대한 도덕적 평가가 중심이 되는 구조다.


괴물은 단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낙인찍히지 않는다. 그는 규범을 위반하고, 타인에게 해를 입힌 존재다. 바로 이 지점에서 ‘괴물’은 자연계의 변이체와 본질적으로 구분된다. 변이체가 진화의 가능성을 확장하는 생물학적 존재라면, 괴물은 공동체의 경계를 어긴 윤리적 존재다. 괴물성은 유전적 특성이 아니라, 사회가 행위 위에 부여한 판단이며, 그 판단에는 반드시 책임이 따라붙는다.


변이체와 괴물: 존재론적 차이

자연계의 변이체와 인간 사회가 낙인찍는 괴물은 겉보기에는 모두 ‘다른 존재’로 여겨지지만, 그 존재론적 지위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변이체는 생명의 가능성이다. 그것은 진화의 동력이며, 자연이 생명의 다양성을 실험하는 방식이다. 돌연변이는 종종 실패로 끝나기도 하지만, 때로는 새로운 종으로 이어지는 기폭제가 된다. 이런 점에서 변이는 본질적으로 중립적인 현상이다. 환경과의 적응 여부에 따라 생존의 유리함 혹은 불리함이 판단될 뿐, 그 자체로 긍정도 부정도 아니다. 변이는 생명 그 자체가 지닌 유연성과 역동성을 보여주는 자연의 언어다.


반면, 인간 사회에서의 ‘괴물’은 생물학적 변이가 아니라 도덕적 판단의 산물이다. 괴물은 단지 이질적인 존재가 아니다. 그는 사회가 정한 규범과 윤리를 어긴 자이며, 그 결과 법적 책임과 도덕적 비난의 대상이 된다. 사회는 괴물을 단순히 다르다고 보지 않는다. 오히려 ‘위협’으로 규정하고, 이를 통해 공동체의 경계를 다시 긋는다. 괴물은 금기와 불안의 상징이며, 규범을 재확인하기 위한 배제의 대상이 된다.


결국, 변이체와 괴물은 ‘존재의 다양성’과 ‘사회적 규율’이라는 서로 다른 언어의 산물이다. 전자는 생명 현상 속에서 필연적으로 등장하는 자연의 실험이며, 후자는 인간 공동체가 구축해 온 질서 속에서 특정한 행위를 낙인찍는 문화적 장치다. 변이체는 생명의 일부로서 포용될 수 있지만, 괴물은 언제나 경계 밖에 놓이게 된다. 이 존재론적 차이는 단순히 생물학과 사회학의 차원이 아니라, 우리가 타자를 어떻게 이해하고 어떤 기준으로 수용 혹은 배제하는지를 가늠하는 척도가 된다.


괴물성은 본성인가, 구조의 반영인가

괴물성의 본질을 묻는 일은 오래된 질문이다. 괴물은 태어나는가, 아니면 길러지는가? 유전적 요인과 환경적 조건 중 어느 쪽이 더 결정적인가? 넬레 노이하우스의 『몬스터』와 현대 심리학, 사회학의 연구들은 이 질문에 점점 더 분명한 방향을 제시한다. 괴물은 단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조건 속에서 형성되는 존재다. 그 조건은 개인의 기질만으로 설명될 수 없다. 어린 시절의 학대, 반복된 외면, 방치된 외로움, 경제적 빈곤과 교육의 단절, 그리고 응답받지 못한 상처—이 모든 것들이 괴물로 지목된 이들이 공통적으로 겪는 삶의 배경이다. 괴물성은 사회 구조와 개인 경험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탄생한다.


이 관점은 괴물성을 더 이상 개인의 본질이나 결함, 선천적 악성으로 환원할 수 없게 만든다. 오히려 괴물이란 존재는 우리가 함께 만든 사회의 부산물, 곧 조건의 결과일 가능성이 크다. 그렇기에 이 질문은 자연스럽게 사회 전체의 윤리적 책임으로 확장된다. 우리는 누구를 괴물로 만들었는가? 그를 방치하고 침묵한 공동체는 어떤 윤리적 책임을 져야 하는가?


한편, 진화론적 시각에서 돌연변이가 새로운 종의 가능성을 열듯, 사회학적·심리학적 관점에서도 괴물성은 사회 구조의 병리이자 윤리적 실패의 징후로 읽힌다. 괴물은 이탈한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사회의 균열 속에서 증폭된 반영이다. 그 존재는 일탈이 아니라, 구조가 만든 무의식적 거울일 수 있다.


괴물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구조 속에서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길러진 결과물이다. 그렇기에 괴물성을 이해한다는 것은 타인을 향한 판단을 중지하고, 사회적 조건과 공동체의 책임을 돌아보는 윤리적 사유로 이어진다. 다시 말해, 괴물은 우리 바깥의 존재가 아니라, 우리 내부의 실패가 외화된 형상일지도 모른다.


과학과 윤리, 존재 이해의 두 축

‘괴물’이라는 개념은 단순히 기형적 존재를 지칭하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자연과학과 사회과학, 존재론과 윤리학의 경계에서 복합적인 의미의 층위를 형성한다. 팀 콜슨이 『존재의 역사』에서 그려낸 생명의 진화 과정과, 넬레 노이하우스가 『몬스터』에서 보여주는 인간 존재의 붕괴는 표면적으로는 이질적이지만, 깊은 층위에서는 존재를 바라보는 두 개의 시선으로서 서로를 보완한다.


과학은 존재를 유전자, 변이, 적응이라는 자연법칙의 언어로 서술한다. 인간이라는 생명체의 몸과 뇌, 유전적 특성과 신경 회로의 형성 과정을 해부한다. 이 시선 아래 존재란 ‘어떻게 생겨났는가’라는 물음에 답하는 것이다. 반면 윤리와 도덕의 시선은 존재를 단순히 ‘있다’고 정의하지 않는다. 괴물은 도덕적으로 책임지는 존재이며, 사회는 그 존재를 행동의 주체로 간주하고, 평가하고, 처벌한다. 괴물은 그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방식으로 존재했는가를 묻게 만드는 존재다. 이처럼 과학과 윤리가 각각 다른 방식으로 존재를 규정하면서, 우리는 하나의 근본적인 물음 앞에 선다. 존재란 단지 '있음'인가, 아니면 '행함과 책임을 수반하는 있음'인가?


콜슨의 진화론적 시선이 존재를 시간과 조건, 변이와 선택의 결과로 설명한다면, 노이하우스의 소설은 그 조건 속에서 탄생한 존재가 어떻게 무너지고, 어떻게 ‘괴물’로 비치는지를 보여준다. 과학은 존재를 필연과 우연의 법칙 속에서 이해하려 하고, 윤리는 그 존재가 만들어낸 결과와 영향, 즉 ‘타자에게 가한 상처’를 중심으로 사유한다.


이 둘은 때로 충돌하고, 때로 보완된다. 과학은 윤리적 판단을 배제하려 하지만, 윤리는 언제나 인간 존재의 맥락과 관계 속에서 과학이 설명하지 못하는 것을 묻는다. 괴물은 이 양 극단 사이에서 태어난다. 하나는 그를 생물학적 변이로 해석하고, 다른 하나는 그를 도덕적 타락으로 규정한다. 결국 괴물은 우리 사회가 존재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는 경계의 존재다.


이러한 이중적 사유는, 존재를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이 얼마나 복잡하고 다층적인지를 드러낸다. 존재란 단순한 사실이 아니라, 해석되고 판단되는 행위의 총합이며, 과학과 윤리라는 두 축 사이의 팽팽한 긴장 위에서 그 의미를 획득한다.


맺음말: 괴물의 이중성

괴물은 언제나 두 얼굴을 지닌 존재다. 한쪽 얼굴은 생명의 자연스러운 변이로, 또 다른 얼굴은 사회가 낙인찍은 책임의 표식으로 나타난다. 자연은 돌연변이를 통해 생명의 다양성을 확장하고, 진화의 가능성을 실험한다. 그러나 사회는 그 다양성 중 일부를 ‘위험’으로 간주하며, 규범에서 벗어난 존재에게 ‘괴물’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배제한다. 생명이 품은 가능성은 그렇게, 때로는 윤리적 비난의 대상으로 전환된다.


이 이중성은 우리에게 한 가지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괴물을 단지 ‘본성’의 산물로 볼 것인가, 아니면 그를 만들어낸 구조와 맥락 속에서 이해해야 할 존재로 볼 것인가?


괴물은 흔히 개인의 결함이나 선천적 기질로 환원되곤 하지만, 실제로는 자연과 사회, 생물학과 윤리의 복합적 교차점에서 태어난다. 그는 혼자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다. 반복된 방치와 침묵, 부정된 감정과 왜곡된 관계 속에서 천천히 구성된 존재다. 따라서 괴물성은 ‘책임’이라는 말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그것은 존재를 둘러싼 조건들의 총체이며, 우리 사회가 외면하거나 용인해 온 구조의 결과이기도 하다.


이 장은 우리에게 다시 묻는다. 괴물을 낳은 ‘조건’들은 과연 무엇이었는가? 그 조건들에 대해 우리는 어떤 몫의 책임을 져야 하는가? 그리고 가장 중요한 질문. 우리는 앞으로 어떤 조건을 만들어갈 것인가? 괴물이 더 이상 자라나지 않아도 되는 사회, 존재의 다양성이 낙인이 아니라 가능성으로 받아들여지는 사회를 우리는 상상할 수 있는가?


괴물은 단지 어떤 타인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는 우리가 만든 사회의 거울이며, 우리가 외면한 질문의 실체다. 괴물이란 결국, 우리 모두가 언젠가 마주해야 할 존재론적이며 윤리적인 질문 그 자체다.


5장. 존재와 시간 ― 되돌릴 수 없는 과정에 대하여


5장. 존재와 시간 ― 되돌릴 수 없는 과정에 대하여

존재는 시간 속에서 형성되고, 시간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하며 때로는 부서진다. 이 불가피한 시간성은 존재의 근본적 속성이다. 존재는 고립된 단절된 현재가 아니라, 과거와 미래를 잇는 연속적 흐름 속에 놓여 있다. 팀 콜슨의 『존재의 역사』와 넬레 노이하우스의 『몬스터』는 각기 다른 언어로 이 ‘시간’을 조명한다. 콜슨은 수십억 년에 걸친 진화사를 통해 축적된 생명 존재의 시간을, 노이하우스는 한 인간이 겪은 트라우마와 상처의 시간을 섬세하게 그려낸다.


되돌릴 수 없는 진화의 시간

진화의 과정은 본질적으로 비가역적이다. 생명의 나무는 한 방향으로 뻗어나가며, 이미 지나간 가지는 다시 이어지지 않는다. 팀 콜슨은 『존재의 역사』에서 생명의 기원부터 인간에 이르기까지 축적된 시간의 흐름을 따라가며, 변화가 되돌릴 수 없는 연쇄 반응임을 강조한다. 자연은 끊임없이 ‘과거의 선택’ 위에 현재를 쌓아 올리고, 그 과정은 다시 미래를 향한 발걸음이 된다.


이 시간성은 단순한 ‘흐름’을 넘어 존재의 본질을 정의한다. 존재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시간의 누적된 결과다. 단 한 번의 돌연변이, 환경 변화 하나가 미래 존재의 모습을 바꾼다. 이미 흘러간 시간은 결코 되돌릴 수 없으며, 존재는 오직 과거의 산물로서만 존재할 수 있다.


진화는 선택의 연속이자, 시간의 기록이다. 우리가 지금 마주하는 모든 생명체는 그 긴 시간을 통과한 흔적이며, 그 시간에 의해 형태가 결정되고 기능이 규정되었다. 이처럼 존재는 시간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임을 과학적으로 입증한다.


『몬스터』 속 시간: 되돌릴 수 없는 상처의 기록

한편, 『몬스터』에서 인간 존재는 또 다른 시간 축 위에 놓인다. 그것은 개인이 경험한 트라우마와 상처가 쌓여 내면을 변모시키는 심리적 시간이다. 이 시간은 단순한 육체적 흐름을 넘어서, 마음과 기억에 새겨진 흔적들이 누적되는 과정이다. 상처는 시간이 지나도 쉽게 지워지지 않으며, 오히려 그 흔적이 쌓일수록 인간은 점차 다른 존재로 변모한다.


노이하우스는 이 상처의 누적을 ‘되돌릴 수 없는 과정’으로 그린다. 주인공이 겪은 학대와 외면은 과거의 사건일 뿐 아니라, 현재의 삶과 심리, 그리고 미래의 행동까지 규정하는 결정적 요인이 된다. 상처는 단순한 기억이 아니라, 존재 자체를 바꾸는 힘이다. 그렇게 그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괴물’로 재구성된다.


소설은 시간에 따른 존재의 파괴와 재형성을 섬세하게 묘사하며, 과거가 사라지지 않고 현재와 미래에 깊이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강조한다. 상처를 경험한 존재는 결코 그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으며, 시간은 그 존재를 새롭게 만드는 피할 수 없는 과정임을 보여준다.


존재와 시간: 과학과 서사의 교차점

『존재의 역사』와 『몬스터』는 서로 다른 언어와 형식으로 존재와 시간의 관계를 탐구한다. 콜슨은 생물학적 진화의 관점에서 시간의 축적이 어떻게 생명을 형성해 왔는지를 보여주고, 노이하우스는 인간 내면의 서사를 통해 시간의 흔적이 어떻게 한 존재를 무너뜨릴 수 있는지를 그려낸다.


두 관점은 한 가지 핵심에서 만난다. 존재란 결국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의 누적’이라는 점이다. 존재는 과거의 선택과 경험의 산물이며, 그 시간 위에 놓인 현재이자, 미래를 향한 토대다. 이 과정은 단순한 변화가 아니라, 깊은 변형과 구조적 형성을 동반한다.


시간은 존재의 무대이자 존재의 본질이다. 우리는 시간 속에서 생겨나고, 성장하며, 때로는 무너진다. 그 모든 누적과 흔적이 곧 ‘존재의 역사’이며, 그 자체가 하나의 의미가 된다.


불가역성의 의미와 책임

되돌릴 수 없는 시간성은 존재에 대한 이해를 넘어, 윤리적 책임의 문제와도 맞닿아 있다. 타인의 상처나 변화, 붕괴를 바라볼 때 우리는 단지 ‘지금 이 상태’만을 보아선 안 된다. 그 존재를 만든 과거의 시간, 경험의 누적을 함께 보아야 한다.


『몬스터』는 이러한 시선을 요구한다. 이 작품은 사회와 개인이 외면해 온 상처가 어떻게 쌓이고, 결국 어떤 비극으로 이어졌는지를 묻는다. 시간의 불가역성은 ‘되돌릴 수 없음’의 무게를 의미하며, 그 무게는 우리가 더 이상 같은 상처를 반복하지 않도록 책임을 촉구한다.


과학도 이와 다르지 않다. 존재가 시간 속에서 어떻게 형성되어 왔는지를 이해하는 순간, 우리는 생명에 대한 존중과 보호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다. 더 나아가, 생명을 둘러싼 환경과 조건을 개선하려는 윤리적 태도 또한 요구된다. 시간은 존재를 규정하지만, 그 흐름에 대한 인식은 우리가 미래를 바꾸려는 노력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맺음말: 시간 속에서 존재하기

존재는 시간의 흐름 속에 놓여 있다. 그 시간은 되돌릴 수 없으며, 축적되고 누적된다. 팀 콜슨과 넬레 노이하우스는 서로 다른 언어로 이 불가역적인 시간을 말한다. 그들은 존재가 어떻게 조건 속에서 태어나고, 변하고, 때로는 부서지는지를 보여준다.


이 장은 우리에게 조용히 묻는다. 존재를 이해한다는 것은 결국 ‘시간의 기록’을 읽는 일이며, 그 기록 앞에서 우리는 어떤 태도를 취할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되돌릴 수 없는 시간 속에서 존재를 마주하고, 그 존재가 다시 상처받지 않도록 어떤 책임을 감당해야 할까? 존재와 시간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 우리 모두가 함께 써 내려가야 할 서사다.


에필로그 ― 존재를 다시 묻는 두 개의 방식


팀 콜슨의 『존재의 역사』와 넬레 노이하우스의 『몬스터』는 전혀 다른 언어와 형식을 지닌 두 책이다. 하나는 자연과학의 엄정한 논리로 존재를 해석하고, 다른 하나는 문학의 서사와 인간 내면의 감정을 통해 존재를 응시한다. 이 둘을 나란히 읽는 일은 단순한 비교를 넘어, 존재란 무엇인가를 보다 깊고 다층적으로 사유하게 만든다. 『존재의 역사』는 존재를 설명하는 책이다.


수십억 년에 걸친 생명의 진화 과정을 따라가며, 우리가 오늘 이 세계에서 마주하는 존재들이 어떻게 생성되고 변화해 왔는지를 밝힌다. 그것은 자연의 법칙과 수많은 변이, 그리고 조건들의 축적이 만들어낸 결과다. 콜슨은 과학자의 눈으로, 존재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끊임없이 생성되고 변형되는 ‘과정’임을 보여준다. 그의 설명은 냉정하고 객관적이지만, 그 안에는 생명이 지닌 경이로움과 신비로움 또한 고스란히 담겨 있다.


반면, 『몬스터』는 존재를 응시하는 책이다. 한 개인의 상처 입은 삶을 통해 인간 존재의 복잡성과 취약함, 그리고 그 붕괴의 과정을 응시하게 한다. 노이하우스는 독자로 하여금 괴물이 되어버린 존재와 마주하게 하고, 그 이면에 자리한 인간의 고통과 사회의 책임을 묻는다. 그의 문장은 감정을 응축하고, 서사는 고통의 균열을 세심히 따라간다. 독자는 이 이야기를 통해 존재란 단지 ‘있다’는 상태를 넘어서, ‘느끼고, 상처받고, 반응하며 결국 변해가는’ 존재임을 깨닫게 된다.


이 두 책을 함께 읽는다는 것은, 서로 다른 두 얼굴의 ‘존재’를 마주하는 일이다. 하나는 과학적 법칙과 시간, 조건에 의해 형성된 존재이고, 다른 하나는 감정과 기억, 사회적 맥락의 그물망 속에서 형성된 취약한 존재다. 한쪽은 거대한 자연의 흐름 속에서 존재의 ‘역사’를 이야기하고, 다른 한쪽은 그 역사 안에서 개별 존재가 어떻게 ‘운명’을 살아내는지를 보여준다.


이 사유는 결국 하나의 근본적인 질문으로 수렴된다.

“우리는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가, 그리고 왜 어떤 존재는 무너지는가?”


존재란 단순히 ‘있다’는 상태를 넘어선다. 존재는 환경과 시간, 그리고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구성되고, 변화하며, 때로는 무너지는 하나의 과정이다. 그 과정은 경이롭고 찬란할 수 있지만, 동시에 위태롭고 불안정하다. 어떤 존재는 자연의 조건 속에서 단단하게 뿌리내리고, 또 어떤 존재는 사회적 조건 아래에서 천천히 금이 가고 부서진다.


이 물음은 단지 철학적 사색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 모두의 삶과 깊이 연결된 질문이며, 더 나은 존재, 더 나은 사회를 향한 성찰의 출발점이다. 우리는 존재의 역사 속에 살면서, 동시에 존재의 붕괴를 목격한다. 그 사이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분명하다. 존재를 지키고, 이해하며, 다시 세우는 일. 무너진 존재의 자리에서 눈을 돌리지 않고, 그 속에 깃든 시간과 조건, 그리고 침묵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일이다.


과학과 문학, 설명과 응시, 법칙과 감정, 이 모든 것은 존재를 둘러싼 서로 다른 언어들이다. 그 언어들이 만나는 지점에서, 우리는 존재에 대한 더 깊은 통찰에 이른다. 그 통찰은 다시 우리 자신에게 돌아온다. 존재를 이해하는 만큼, 우리는 그 존재에 대해 책임져야 한다.


이 책을 덮으며, 당신에게 묻는다. 지금, 당신은 어떤 존재를 보고 있는가? 그리고 그 존재를 위해, 당신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존재를 묻는 여정은 결코 끝나지 않는다. 우리는 그 여정 속에서 서로 다른 두 언어를 듣고, 함께 답을 만들어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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