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의 공공성과 도덕의 붕괴
소음에 점령당한 공간
한때, ‘조용히 책 읽기 좋은 카페’는 분명 존재했다. 적당한 크기의 잔잔한 음악이 흐르고, 옆자리 사람의 숨소리조차 민망하게 느껴질 만큼 서로 조심하던 분위기. 누군가는 노트북을 펴고 일에 몰두했고, 누군가는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며 생각의 틈을 메우곤 했다. 커피잔을 내려놓는 소리조차 조금은 조심스러웠다. 그곳엔 소리보다 고요가 먼저 들어오는 질서가 있었고, 말보다 분위기를 존중하는 무언의 규칙이 작동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런 공간을 찾기란 점점 더 어려워졌다. 몇몇 프랜차이즈 카페에선 이른 아침부터 이웃 테이블의 웃음소리와 대화가 벽을 넘고 창을 흔든다. ‘대화’라기보다는 ‘외침’에 가까운 목소리들, ‘수다’라기보다는 ‘방송’처럼 퍼지는 톤. 조용히 앉아 있으려던 이들은 자신도 모르게 노트북을 닫고, 책장을 덮는다. 아무리 집중하려 해도, 저들의 목소리는 공간을 선점해 버린다.
이런 풍경은 어쩌다 하나의 예외적 현상이 아니라, 거의 일상적 장면이 되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그 중심에 유독 ‘여성들의 수다’가 자리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부인하긴 어렵다. 말하는 이들이 언제나 의식적으로 공간을 침범하는 건 아닐 것이다. 그들에겐 그저 즐거운 대화이고, 스트레스 해소의 시간이겠지만, 그 반대편엔 자리를 빼앗긴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은 거의 고려되지 않는다.
이 글은 결코 특정 성별을 비하하거나, 도덕적 우월감을 내세우려는 목적에서 쓰인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 반복적이고 명확한 사회적 풍경에 질문을 던지기 위함이다. 왜 우리는 점점 더 ‘공공장소’에서 배려받지 못한다고 느끼는가? 언제부터 타인에 대한 존중과 침묵의 윤리가 ‘꼰대’의 미덕으로 격하되었는가?
‘내가 말하고 싶으니까 말하는 것’, ‘내 기분이 좋으면 그걸로 충분한 것’이라는 태도는 어떻게 이토록 당연한 듯 우리 곁을 점령했는가? 그 안에는 단순한 개인의 예의 문제를 넘어서, 우리 시대를 관통하는 사회경제적 구조와 문화적 변화가 있다. 한편으로는 소통의 배설 욕망이, 다른 한편으로는 배려의 퇴행이, 그리고 그 아래에는 ‘내가 중심’이라는 과잉된 자아가 복잡하게 얽혀 있다.
과거의 카페는 때로 도피처였고, 침묵을 품은 도서관의 연장선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 그것은 스피커와 무대가 되었다. 어떤 이는 자기 연애담을, 어떤 이는 지인의 험담을, 또 어떤 이는 직장에서의 분노를 마치 ‘퍼포먼스’처럼 늘어놓는다. 옆자리의 사람은 들으려 한 적도, 공감할 이유도 없는데 말이다.
우리는 이 풍경을 단순한 예의 문제로 치부할 수 없다. 그것은 지금 이 시대가 공공성을 어떻게 소비하고 있으며, 도덕과 배려라는 오래된 가치들을 어떻게 ‘비효율적’이라고 말하며 버려왔는지를 보여주는 징후다. ‘조용히 해주세요’라는 말은 이제 낡고 권위적인 간섭처럼 여겨진다. 오히려 그런 말을 꺼내는 사람이 눈치를 보게 되는 시대다.
그렇다면 진짜 문제는 ‘떠드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들을 제지하지 못하게 된 사회 전체의 침묵일지도 모른다.
이제 우리는, 그 침묵이 만들어낸 모두의 불편함에 대해 진지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공간 감각의 붕괴: 공공장소를 사적 영역으로 오인한 사람들
카페는 본질적으로 상업 공간이지만, 동시에 다양한 개인들이 모여드는 ‘준(準) 공공장소’다. 이 말은 단순히 공간을 공유한다는 차원을 넘어, 공유된 질서와 암묵적 규범에 따라 행동해야 하는 곳임을 뜻한다. 타인의 존재를 인식하고, 자신의 행위가 공동체적 분위기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고려하는 일—그것이 바로 공공장소에서의 기본 윤리다.
그러나 오늘날의 많은 이용자들은 이 카페라는 공간을 '나만의 방'처럼 대한다. 이어폰을 끼고도 통화를 하고, 주변 테이블과 30cm도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서 몇 시간이고 친구와 수다를 떨며 웃고 떠든다. 그들에겐 테이블만 내 공간이고, 나머지는 배경일뿐이다. 문제는 이 배경에 사람들이 실제로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들이 전혀 의식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이 같은 ‘공간 감각의 붕괴’는 단지 무례함의 문제가 아니라, 자기중심적 인식의 사회화라는 구조적 현상을 반영한다. 즉, 이는 개인의 성격 차원이 아니라, 어떤 시대의 문화 코드로 자리 잡았다는 것이다. 이 시대는 모든 것을 사적으로 전유하고, 심지어 공공마저도 나의 ‘라이프스타일’ 속으로 흡수하려는 경향을 강화해 왔다.
특히 소셜 미디어의 확산은 이러한 현상을 가속화했다. SNS에서는 '나를 표현하는 것'이 곧 '살아 있다는 증명'으로 작동하며, 오프라인의 행동 역시 점점 더 '공유 가능한 순간'을 연출하기 위한 하나의 무대가 되어간다. 카페에서의 대화도 예외가 아니다. 주체는 대화를 나누는 사람이 아니라, 그 대화를 하고 있는 ‘모습’ 그 자체다. 시끄럽고 과도한 대화는 본질적으로 타인을 향한 과시다. 나의 사적 감정을 공공의 영역에 뿌려야만 안심하는 심리는, 마치 "내 존재는 이만큼 확실해"라고 외치는 강박에 가깝다.
한편으로는, 오랫동안 자기 억압과 침묵을 강요받았던 이들—특히 여성들이 ‘이제는 나도 말할 수 있다’는 시대적 권리를 실현하는 과정에서, 때론 ‘과잉된 자기표현’이라는 방식으로 반동적 해방을 경험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이는 결코 ‘여성 탓’이 아니라, 오랜 억압이 낳은 구조적 반작용이며, 그래서 더 복잡한 문화현상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공의 규범과 타자에 대한 감각이 실종된 상태라면, 그 해방은 쉽게 방종으로 전락하고 만다.
사적 영역의 확장은 때때로 공공질서의 파괴로 이어진다. 타인에 대한 고려는 ‘마음이 약한 사람의 미덕’쯤으로 무시되고, 소음을 지적하는 이는 "유난 떠는 꼰대"로 낙인찍힌다. 바로 여기서 ‘공간의 의미’는 무너지고, 공공장소는 점차 소수의 목소리 큰 사람들만을 위한 곳으로 전락한다.
공간이 누구의 것이냐는 질문은 곧, 누가 그 공간에서 더 많은 권리를 갖는가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진다. 침묵과 배려는 점점 권리가 아니라 희생이 되고, 그렇게 공존의 윤리는 뒷전으로 밀려난다. 오늘날 카페는 그래서 더 이상 누구나 머물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조용한 이를 위한 자리는 없고, 떠들 줄 아는 사람만이 공간을 점유한다.
왜 ‘여성’이 특히 눈에 띄는가?
카페라는 공간에서 유독 여성들의 소리가 더 크게, 더 자주 들리는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다. 그 이면에는 지난 수십 년간 축적된 사회문화적 변화, 특히 여성의 사회적 위치 변화와 커뮤니케이션 방식의 특성이 결합된 복합적 배경이 존재한다.
먼저 사회경제적 측면에서 보자면, 오늘날 여성들은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경제력을 갖추고,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위치에 서게 되었다. 소비자로서, 직업인으로서, 자기 결정권을 지닌 주체로서 여성은 더 이상 침묵을 강요받는 존재가 아니다. 이 변화는 당연히 환영받아야 할 진보다. 그러나 모든 변화에는 그에 수반되는 새로운 책임과 규범의 재정립이 필요하다. 문제는 많은 경우, 자유는 빠르게 받아들이되, 그 자유가 머무는 공간의 공공성에 대해선 무관심하다는 점이다.
즉, 말할 권리는 확보되었지만, 어디에서,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에 대한 감각은 종종 결여되기 쉽다. 이는 오히려 억압의 시대가 길었기 때문에 생긴 구조적 반동일 수도 있다. 오랫동안 침묵을 강요당한 주체가 해방 이후 겪는 표현 욕망은 때로 ‘과잉’의 형태로 드러난다. 마치 스피커를 처음 손에 쥔 아이가 볼륨 조절을 몰라 소리를 끝까지 높여버리는 것처럼, 이제야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된 사람들이 그 공간의 경계선을 미처 자각하지 못한 채, 공공장소를 사적 확장의 장으로 오인하는 것이다.
여기에 여성 특유의 커뮤니케이션 방식이 더해진다. 여성 간의 대화는 단순한 정보 교환이 아니라, 감정의 흐름과 공감의 연결을 중심으로 조직된다. 대화는 곧 관계의 유지이며, 공통의 정서를 공유함으로써 유대감을 강화하는 수단이다. 문제는 이 구조가 ‘감정적 확장’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대화의 톤과 강도가 점점 높아지는 방향으로 흐른다는 것이다. 친구의 말에 과장된 공감으로 반응하고, 웃고, 맞장구치는 가운데 소리의 크기와 공간 점유율은 점점 증가한다.
이러한 커뮤니티 중심의 커뮤니케이션은 대개 ‘안전한 사적 공간’에서 자연스럽게 작동하는 것이지만, 카페는 그러한 친밀성의 공간이 아니다. 타인이 분명히 존재하며, 그들 또한 저마다의 시간과 고요를 누릴 권리가 있는 공공의 공간이다. 하지만 이 공공성은 어느 순간 "여기 우리끼리야"라는 무언의 경계선에 의해 밀려나고 만다. 마치 자신들의 대화가 우선순위이며, 다른 사람들의 존재는 ‘소음’에 불과하다는 듯한 침묵의 폭력이 작동한다.
이때 공간은 ‘우리의 방’으로 바뀌고, 타인은 배경음 혹은 방해물이 된다. 여성 커뮤니티의 강한 집단 응집력은 때로 주변의 존재를 지우고, 오직 서로만을 향한 에너지로 치닫는다. 그 안에서 타자에 대한 고려는 실종되고, 공간은 배려가 아닌 ‘점유’의 대상이 된다.
그렇다고 해서 이 모든 책임을 특정 성별에 전가하려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단지 ‘누가 시끄럽냐’가 아니라, ‘왜 배려는 더 이상 주목받지 못하느냐’는 데 있다. 타인의 존재를 전제하지 않는 말하기, 공공에 대한 감각이 사라진 표현의 자유는 결국 가장 약한 이들을 침묵하게 만든다. 조용한 이들은 카페를 떠나고, 소리 큰 이들이 남는다. 그때 공간은 더 이상 공유의 장소가 아니라, 점령의 전장이 되어버린다.
요컨대, 여성의 과잉된 자기표현은 억압의 반작용일 수 있지만, 그 표현이 타인을 침범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해방이 아니라 또 다른 종류의 억압이 된다. 우리는 이 현상을 성급히 비난하기보다는, 어떤 윤리의 빈자리가 그것을 가능하게 했는지, 그리고 그 빈자리에 무엇이 들어섰는지를 함께 물어야 한다.
도덕의 빈자리, 그 자리에 들어선 ‘권리’의 오용
언제부터인가 ‘배려’는 낡은 덕목이 되었고, ‘조심스러움’은 미숙한 태도로 비치기 시작했다. 그 자리를 대체한 것은 뻔뻔함에 가까운 권리의 과잉 선언이다. "내가 이렇게 말할 권리가 있어", "이건 내 자유야"라는 말은 더 이상 정치적·사회적 맥락 속에서 절제된 요구로 기능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자기중심적인 감정과 욕망을 합리화하는 구실로 쓰이곤 한다.
오늘날, 공공장소에서 조용함을 요구하거나, 주변 사람을 배려해 달라는 목소리는 즉각 "꼰대", "유난", "예민" 등의 낙인을 동반한다. 타인에 대한 최소한의 고려조차 ‘과한 요구’로 취급되며, 배려의 언어는 권리의 언어 앞에서 침묵을 강요당한다. 특히 젊은 세대일수록, 배려는 선택 사항이고, 자유는 전가의 보도처럼 휘둘러지는 경향이 짙다.
이러한 태도는 결국 도덕의 공백에서 비롯된 권리의 오용이다. 원래 권리는 타인의 권리와 충돌할 수 있음을 전제로 하고, 그 균형과 상호 존중 위에서만 정당성을 갖는다. 그러나 이 시대의 권리 담론은 오히려 배타적이고 독점적으로 작동한다. "나는 말할 권리가 있다"는 말은 곧 "네가 불편한 건 네 문제"라는 선언으로 이어지고, 그렇게 우리는 권리라는 이름 아래 타인을 침묵시키는 새로운 형태의 폭력을 경험한다.
더 큰 문제는 이 모든 오용이 '진보' 혹은 '해방'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된다는 점이다. "여성의 자기표현은 억압에서 벗어난 증거", "Z세대는 솔직함을 중시한다", "나답게 말할 권리가 있다"는 식의 주장들은 그 자체로 유효한 맥락을 갖고 있지만, 그들이 작동하는 방식은 오히려 타자에 대한 무관심, 사회적 질서에 대한 조롱으로 흘러버릴 때가 많다. 도덕이란 시대에 따라 바뀌는 것이지만, ‘타인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이라는 윤리적 기초마저 지워졌을 때, 그 공백은 결코 권리로 메울 수 없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지금, 배려 없는 권리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조용히 있으라는 말은 금기어가 되었고, 공공장소에서 ‘눈치’를 본다는 말은 수치로 간주된다. 대신 자신을 드러내고, 감정을 과감히 퍼뜨리는 사람이 ‘자기 확신이 있는 사람’으로 칭송받는다. 그러나 그 화려한 자기표현 뒤에는 공공의 피로와 침묵하는 다수의 퇴장이 존재한다.
무엇보다 무서운 것은, 이런 권리의 과잉이 이제는 정서적으로도 면책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내 기분이 그러니까”, “나도 힘들었으니까”, “이건 내 방식이야”—이런 말들은 논리가 아니라 감정의 성역에 들어가게 만든다. 그리고 우리는 그 감정의 철벽 앞에서 그저 피하거나,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게 된다.
공공장소에서의 기본적인 질서, 조용함과 배려, 타인의 존재에 대한 의식. 이 모든 것은 이제 도덕이라는 이름 아래 잊힌 유물이 되었고, 그 자리를 대체한 권리 담론은 더 큰 소음과 더 깊은 무례로 사회 전체를 갉아먹고 있다.
말하지 못하는 사회, 듣지 않는 개인들
공공장소의 기본 질서조차 지켜지지 않을 때, 그 공간은 더 이상 ‘함께 존재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그 상태에 너무 익숙해져 버렸다. 누군가의 소음에 얼굴을 찌푸리면서도, 정작 “조용히 해주세요”라는 말은 꺼내지 못한다. 오히려 그 말을 꺼내는 순간, 문제를 야기한 사람이 아니라 지적한 쪽이 ‘예민한 사람’, ‘분위기 못 읽는 사람’, ‘꼰대’가 되어버리는 이상한 질서가 작동한다.
이런 왜곡된 질서 속에서 사람들은 둘 중 하나가 된다. 하나는 ‘목소리 큰 사람’이다. 타인을 고려하지 않고, 자기 존재를 우선시하며, 감정과 말을 여과 없이 방출한다. 다른 하나는 ‘조용히 불쾌해하는 유령’이다. 불편함을 느끼지만 말하지 못한 채 존재를 감춘다. 아무리 불쾌해도 입을 닫고, 자리를 피하거나, 속으로만 삭인다. 우리는 이 침묵을 ‘배려’라고 부르지만, 실상은 말할 수 없게 된 자의 무력한 자기 검열이다.
이처럼 말하지 못하는 사회는 겉으로 보기엔 조용할지 몰라도, 그 침묵 속엔 분노와 피로, 그리고 공동체에 대한 신뢰의 붕괴가 축적된다.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사람이 아니라, 그것을 지적하는 사람이 문제시되는 사회는 정의와 질서가 역전된 사회다. 여기서 우리는 배려하는 사람보다 무례한 사람이 더 큰 공간을 점유하게 되는 역설을 목격하게 된다.
그렇다면 왜 말하지 못하는가? 가장 큰 이유는 우리 사회가 갈등을 관리하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갈등을 견디고 풀어나가기보다, 감정의 마찰 자체를 피하는 것이 미덕이 된 사회.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은 ‘예민한 사람’으로, 침묵하는 사람은 ‘성숙한 사람’으로 포장된다. 그러나 이 침묵은 성숙이 아니라 사회적 기피의 결과일 뿐이다. 결국 누구도 서로를 정직하게 마주하지 않고, 각자의 불쾌함 속에 고립된 개인들만이 남는다.
또한, 문제를 지적하는 사람에게 돌아오는 반응은 대개 방어적이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느냐”, “말투가 기분 나빴다”, “기분 나쁜 건 네 문제다”—이러한 반응은 이야기 자체가 아니라 이야기하는 방식에 집착하는 문화, 즉 내용보다 감정의 정당성만 따지는 사회를 보여준다. 말할 수 없는 사회는 단지 권위가 없기 때문이 아니라, 듣지 않는 사람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이제 카페는 단지 커피를 마시는 장소가 아니라, 사회적 소통과 배려가 어떻게 실패하고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거울이다. 사람들은 서로를 인식하지 않고, ‘나’의 감정과 말만을 확장하며, 결국 공존이 불가능한 개별 섬들처럼 살아간다.
말하지 못하고, 들으려 하지 않는 이 사회에서 진짜 사라진 것은 조용함이 아니라 ‘존재 간의 조율’이다.
암종은 어디서 자라는가
카페는 단지 커피를 마시는 장소만이 아니다. 그것은 오늘날 우리가 서로를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를 드러내는 축소된 사회이자, 공동체 윤리의 척도다. 그리고 그 안에서 벌어지는 무례는 결코 사소한 일상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 사회가 얼마나 깊이 공존의 감각을 잃어버렸는지, 그리고 도덕의 빈자리를 어떻게 방치하며 살아가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뚜렷한 징후다.
이제 우리는 너무나 많은 것을 ‘내 마음대로’ 하도록 허락받았다. 공공장소에서도 사적인 감정을 여과 없이 퍼뜨리는 것, 타인의 침묵을 침묵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 자신이 불편을 주고 있다는 사실에 무감각한 것—이 모든 것은 우연한 소란이 아니라, 하나의 시대정신이다. 이 시대는 배려를 덕목이 아니라 약점으로 취급하고, 조용한 이들을 뒤로 밀쳐낸다. 대신 목소리가 크고, 감정이 빠르며, 리액션이 과한 사람만이 공간을 장악한다.
이 ‘암종’은 단지 소음이라는 형태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권리라는 이름으로 타인을 침묵시키고, 자유라는 이름으로 공간을 점유하며, 자기표현이라는 이름으로 공동체를 파괴한다. 공공의 질서 위에 자아를 세우는 대신, 공공을 침식해 사유화하는 무의식의 총합이자, 침묵을 미덕이 아닌 굴욕으로 만드는 문화적 병리다.
그리하여 우리는 지금, “조용히 해주세요”라는 가장 단순한 말조차 꺼낼 수 없는 사회에 살고 있다. 단지 그 말이 권위처럼 들리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존재하지 않는 언어가 되었기 때문이다. 말하지 않는 이유는 용기가 없어서가 아니라, 그 말을 받아들일 귀가 이 사회에는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말이 사라질 때, 질서도 함께 사라진다. 배려가 비웃음이 되고, 도덕이 오지랖이 되며, 공동체는 무관심 속에 무너진다. 그리고 그 안에서 조용히 자라나는 것—그것이 바로 우리 시대의 암종이다.
어쩌면 우리는 이미, 함께 존재하는 삶이 끝나버린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