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어 있으면 앉는 자리?’ — 지하철 임산부석 유감

by 안녕 콩코드


분홍색 좌석의 무력한 존재감


도시인의 하루는 지하철에서 시작되고 끝난다. 익숙한 플랫폼, 익명의 군중, 반복되는 정차음. 그리고 그 속에 묘하게 이질적인 색채 하나, 분홍색 좌석. ‘임산부 배려석’이라 명명된 이 자리엔 붉은 눈길과 무거운 침묵이 교차한다. 누군가는 그 앞에 서서 멍하니 서 있고, 누군가는 조심스럽게 엉덩이를 비켜 앉는다. 또 어떤 이는 거리낌 없이 털썩 앉아 스마트폰 속으로 사라진다. 그 순간, 우리는 그 좌석의 정체성을 잊는다. 그 좌석이 왜 존재하는지, 누구를 위한 자리인지.


그 의자는 비어 있어도 자유롭지 않다. 그 자리에 앉을 수 있는 사람은 존재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묻는다. “지금, 이 자리에 앉아도 될까?”


이 질문은 단지 의자 하나에 관한 것이 아니다. 우리 사회가 ‘배려’를 어떻게 다루는지,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무력화되어 가는지를 보여주는 작고 날카로운 장면이다.


처음 임산부 배려석이 등장했을 땐, 많은 이들이 손뼉 쳤다. '드디어 공공장소에서 배려를 제도화했다'는 기대 때문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현실은 달라졌다. 배려는 형식이 되었고, 의무는 권리와 충돌하며, 그 모든 틈에서 임산부는 다시 투명한 존재가 되었다.


지하철을 타는 수많은 사람들은 이제 알고 있다. 그 좌석에 앉는 것은 도덕이 아니라 선택이고, 선택은 언제든 욕망에 의해 덮일 수 있다. 분홍색은 더 이상 배려의 상징이 아니다. 그것은 침묵과 회피, 그리고 무관심의 색이다. ‘앉아도 되는 자리’가 된 순간, 그 의자는 본래의 목적을 잃었다.


묻고 싶다. 우리는 언제부터 배려를 '표시'에만 맡기고, 마음에서 지워버리게 되었을까? 그 질문의 실마리는, 지금 당신이 지하철에서 마주하는 바로 그 분홍색 좌석에 놓여 있다.


‘지정석’이라는 발상의 태생적 한계


배려는 자발성에서 비롯될 때에만 진실하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마음이 먼저 움직여야 한다. 그러나 임산부석은 이 배려의 감각을 제도 속에 격리시켰다. 사람들에게 ‘여기 말고는 배려하지 않아도 된다’는 무언의 면죄부를 준 셈이다.


임산부를 위한 좌석을 따로 지정한다는 발상은 겉으로 보기엔 분명 선의다. “힘들 테니 앉을 수 있게 하자.” “눈치 주지 말고, 당당히 앉을 수 있게 하자.” 그러나 그 선의는, 실제 일상 속에선 오히려 반작용을 불러온다. 모든 배려가 오직 그 한 자리로 수렴되면서, 나머지 좌석과 사람들 사이에서는 배려라는 말조차 사라진다.


사람들은 이제 오로지 두 가지만 묻는다. “여기가 임산부석인가?” 그리고 “지금 임산부가 눈에 보이는가?” 이 두 질문 모두 ‘아니오’라면, 그 순간부터 그곳은 ‘앉아도 되는 자리’가 된다. 겉보기엔 단순한 공간의 문제 같지만, 실은 공공 윤리와 타인 감지 능력의 붕괴를 상징한다.


더 심각한 문제는, 배려를 위한 지정석이 ‘의무’가 아닌 ‘선택지’로 여겨진다는 점이다. 앉지 않으면 ‘배려했다’는 도덕적 우월감에 잠기고, 앉으면 ‘정당한 권리를 행사했다’는 자기 합리화로 스스로를 설득한다.

이제 배려는 도덕적 판단의 영역이 아니라, 개인의 심리적 선택 문제로 점점 밀려난다.


게다가 그 자리에 임산부가 나타나는 순간조차 사람들은 망설인다. ‘내가 지금 일어나야 하는가’, ‘진짜 임산부 맞나?’, ‘배에 뭐라도 붙이고 다녀야 하냐’ㅡ이 모든 의심과 계산은 결국 제도가 사람의 민감성을 마비시켰다는 반증이다.


배려를 지정하면 배려가 쉬워질 줄 알았다. 그러나 오히려 그 지정이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 머리와 마음을 멈추게 만든 것이다. ‘임산부석은 그쪽에 있으니 거기로 가세요’라고 말하는 순간, 공공장소 어디에도 배려는 존재하지 않게 된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배려하지 않는다. 배려를 ‘위임’할 뿐이다. 그리고 그 위임의 결과가 무엇인지, 지하철은 매일 우리에게 답하고 있다.


왜 ‘양보’가 아닌 ‘권리’가 되었는가?


지하철 임산부석 앞에서 벌어지는 갈등의 핵심에는 하나의 질문이 있다. “나는 지금 이 자리에 앉을 권리가 있는가?”


이 질문은, 원래 우리가 해야 했던 질문과 다르다. “혹시 이 자리가 누군가에게 더 필요하지 않을까?”라는 물음은 사라졌고, 그 자리를 대신한 건, 내 권리가 침해당하지 않았는가에 대한 불만이다.


지하철 좌석은 모두에게 열려 있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서로의 상태와 필요를 살피는 윤리적 공간이었다.

임산부, 노인, 몸이 불편한 이들은 목소리 없이도 눈치로 감지되었고, 자리는 말없이 양보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섬세한 감각은 권리 담론이 과도하게 확산되면서 빠르게 마모되고 말았다.


오늘날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그 자리에 앉지 말라는 법 있나요?”

“임산부도 아닌데, 왜 비워둬야 하죠?”

“그럼 빈자리는 아무도 앉지 말라는 건가요?”


이 말들은 겉으로 보기엔 이성적이고, 법적으로도 문제가 없다. 하지만 공공장소는 법 이전에 ‘타인을 감지하는 능력’으로 작동하는 공간이다. 법이 허용한다고 해서 모든 행동이 정당화되는 곳은 더 이상 공공이 아니라, 야만이다.


‘배려’라는 말이 낯설어지고, ‘양보’가 ‘패배’나 ‘호구’로 치부되는 시대. 그 한가운데에는 ‘권리’라는 이름의 무기가 서 있다.


권리는 본래 타인과의 경계 위에서 조율되는 개념이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의 권리는 고립된 자기 주장, 즉 “내가 맞다”는 감정적 진술로 퇴화하고 있다.

지하철 좌석은 더 이상 ‘나눔의 공간’이 아니라, 주인 없는 권리 다툼의 전장으로 변해가고 있다.


더 무서운 것은, 이런 태도가 ‘정당함’으로 포장되어 공유된다는 점이다. SNS에는 “임산부석에 내가 왜 못 앉냐”는 주장이 당당하게 올라오고, 공감과 ‘좋아요’가 쏟아진다. 배려는 시대착오가 되고, 배려 요구는 ‘억지’가 되었다.


이제 임산부석은 아무나 앉을 수 있는 자리가 되었다.

하지만 그 ‘아무나’가 앉는 자리는 더 이상 누구도 안심하고 앉지 못하는 자리로 변해버렸다.



형식만 남은 배려, 거꾸로 도덕을 무너뜨리다


지하철 안 분홍색 좌석은 이제 ‘배려’라기보다 ‘표식’에 가깝다. 하지만 그 표식은 어느 순간부터 형식적인 의미를 잃었다. 사람들은 의자에 붙은 안내문을 읽지 않고, 피곤하면 그냥 앉으며, 눈치만 살핀다. 중요한 것은 누가 보는가, 누구의 시선이 불편해지는가다. 이는 배려가 아니라, 드러난 죄책감을 피하는 행위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그 자리를 보며 조심스레 선다. 또 다른 이들은 대놓고 앉아 임산부가 다가와도 시선을 외면한다. 더러는 “내가 임산부인지 어떻게 아느냐”며 무관심을 가장하고, “배지도 안 찼으면서”라는 말로 책임을 떠넘긴다. 이 모든 상황 밑바닥에는, 배려가 더 이상 자연스러운 윤리가 아니라 ‘요구되어야 하는 의무’로 전락한 현실이 놓여 있다.


하지만 배려는 누군가가 요구해서 실현되는 것이 아니다. 배려란 상대방이 말하기 전에 감지하고, 행동으로 옮기는 감각의 윤리다. 그런데 우리는 그 감각을 임산부석이라는 특정 공간에 전적으로 위임해 버렸다.


배려의 실천이 좌석 하나에 갇히자, 도덕은 공간과 함께 격리되었고, 그 공간 밖에서는 배려하지 않아도 된다는 묵시적 합의가 생겨났다.


이 모순은 매우 기이하다. ‘배려가 법처럼 제도화되는 순간, 오히려 진짜 배려는 사라진다.’ 형식이 도덕을 대신할 수 없다는 진실은 임산부석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게다가, 이런 형식적인 배려조차 지켜지지 않을 때 그 배신감은 더욱 깊어진다. 임산부가 양보받지 못하는 상황은 단순한 자리 문제를 넘어선다. 그 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이 일어나지 않는 것도 분명 고통스럽다.

하지만 더 아픈 것은, 그 순간을 지켜보는 주변 모두가 아무 말 없이 외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침묵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선언처럼 들린다. 당신의 존재는 여기서 감지되지 않는다고, 당신은 이 사회에서 보이지 않는 사람이라고.


결국 배려는 껍데기만 남고, 공공의 도덕은 지켜야 할 가치가 아니라 피하고 싶은 짐이 된다. 자리는 남았지만, 의미는 사라졌다. 분홍색 좌석은 비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정작 비어 있는 것은, 우리 마음속 배려의 자리인지도 모른다.


침묵하는 다수, 사라지는 목소리들

― 말하지 못하는 사회, 듣지 않는 사람들


지하철 안, 누군가 임산부석에 앉아 있다. 그 앞에는 누가 봐도 임신한 여성이 서 있다. 하지만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그 자리에 앉은 사람도, 옆에 서 있는 사람도, 그 장면을 지켜보는 사람도. 모두가 침묵한다. 너무도 조용하다.


왜 아무도 말하지 않을까? 왜 누구도 “자리 좀 양보해 주세요”라는 말 한마디를 건네지 못할까?


이 침묵은 겸양이 아니다. 그건 위험을 피하기 위한 자기 검열이고, 도덕을 실천하지 않기 위한 집단적 묵인이다.


우리는 이제, 누군가에게 정당한 요구를 하거나 당연한 도리를 말하는 데조차 용기와 손익 계산이 필요한 시대에 살고 있다.


임산부가 자리를 요구하면 ‘눈치 없는 사람’이 되고, 제삼자가 나서면 ‘꼰대’나 ‘선비’로 몰린다. 항의는 곧 불쾌함을 만들고, 그 불쾌함은 반격이 되어 나에게 돌아온다. 그래서 우리는, 침묵하는 쪽을 선택한다. 점점 더 자주, 점점 더 깊이.


이 침묵은 쉽게 퍼져나간다. 도덕은 언어를 통해 작동하지만, 그 언어가 사라지면 함께 사라지는 것들이 있다. 공동체의 기준, 타인을 향한 존중, 감정을 나누는 능력. 배려는 더 이상 언급되지 않고, 불쾌함은 표현되지 않으며, 부당함은 더 이상 문제화되지 않는다.


이 과정에서 사회는 두 개로 나뉜다. 자기 목소리만 키우는 사람과, 조용히 불쾌해하는 유령. 임산부석을 둘러싼 풍경은 그 단면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한쪽은 “비었으니 앉는다”는 논리로 태연하고, 다른 한쪽은 배려받지 못한 채 조용히 견디다 말없이 다음 역에서 내린다. 그리고 그 모든 장면을 지켜본 대다수는 스마트폰으로 시선을 피하며 침묵한다.


말하지 않는 사회는 윤리를 잃고, 듣지 않는 개인은 타인을 지운다. 그 침묵이 쌓인 결과는 점점 더 거칠고 둔감해진 공공의 얼굴로 나타난다.


우리가 지금, 지하철이라는 밀폐된 공간 안에서 마주하고 있는 것은 단순한 자리를 둘러싼 사소한 불편이 아니다. 그것은 배려를 말할 수 없고,

타인을 지적할 수 없으며, 도덕을 실천하기조차 두려워진 사회의 얼굴이다. 그리고 그 얼굴은, 침묵이라는 이름 아래 우리 모두를 비추고 있다.


의자보다 사람을 바꿔야 한다


임산부석은 ‘배려’라는 단어를 시각화한 공간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 사회에서 그것은 비어 있는 형식, 비워진 윤리, 그리고 비켜 앉은 책임의 상징이 되었다.


문제는 의자에 있지 않다.

문제는 우리 자신에게 있다.


제도를 만든다고 사람이 달라지지 않는다. 색을 칠한다고 감정이 생기지 않는다.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표식과 시스템에 맡긴 채, 가장 중요한 것—타인을 감지하는 감각, 불편을 함께 나누려는 태도, 그리고 공존에 대한 책임감ㅡ을 잃었다.


임산부석은 그저 몇 개의 좌석일 뿐이다. 그러나 그 몇 개의 좌석조차 지켜지지 않는 사회라면, 더 크고 복잡한 배려의 구조는 어떻게 지탱될 수 있을까?


이제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나는 여전히 누군가의 불편을 감지하려는 마음을 갖고 있는가?” “나의 자유는, 타인의 고통과 어떻게 공존할 수 있는가?” 그리고 무엇보다, “도덕은 여전히 살아 있는가?”라는 질문을 회피하지 말아야 한다.


배려는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다. 눈치가 아니라, 공감과 책임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임산부석을 그저 '아무도 앉지 않는 공간'으로 남겨두기보다, 그 앞에서 '아무도 말하지 않는 사회'를 바꾸는 공간으로 회복해야 한다.


이 사회가 바뀌려면, 좌석이 아니라 사람이 바뀌어야 한다. 배려를 의무가 아닌 일상의 감각으로 되살릴 수 있는 사람들. 조용히 일어나 자리를 내어주되, 그 침묵 속에서도 타인을 품을 수 있는 사람들.


그럴 수 없다면, 분홍색 좌석은 앞으로도 그저 텅 빈 마음의 색으로 남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매일 아침, 그 좌석 앞에 서서 무언가를 잃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또 하루를 그렇게 지나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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