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이니까 괜찮다’는 착각

공공의 피로를 부르는 방치된 육아의 민낯

by 안녕 콩코드

귀엽다고 다 용서되진 않는다

아이의 울음소리, 갑작스러운 고함, 식당을 종횡무진 뛰어다니는 작은 발소리는 이제 우리의 일상 속 풍경이 되었다. 누군가는 그 모습을 보고 미소 짓고, 누군가는 귀를 막으며 인상을 찌푸린다. 그러나 문제의 본질은 아이의 행동 그 자체에 있지 않다. 대부분의 아이는 아직 감정을 제어하는 방법을 배우는 중이고, 충동과 욕구를 통제하기 어려운 시기에 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그러한 상황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대한 보호자의 태도다.


"애가 원래 그래요. 어릴 땐 다 저래요." 이 말은 마치 아이가 공공질서를 어지럽히는 행위에 대해 면죄부를 주려는 듯하다. 하지만 그 말 속엔 다른 이의 불편함을 고려하지 않겠다는 방조와 무책임이 스며 있다. 이해를 요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타인을 향한 배려를 접고 책임을 회피하는 표현에 불과하다.


물론 아이를 돌보지 않는 부모는 없다. 그러나 '돌봄'과 '방치'는 다르다. 아이가 원하는 대로 행동하게 내버려 두고, 공공장소에서의 규율이나 타인의 감정은 무시한 채, 그 모든 것을 "우리 아이니까 괜찮다"는 말로 덮어버리는 순간, 육아는 개인의 일이 아니라 사회적 피로가 된다. 이는 단순한 허용이 아니라, 일종의 예외 논리다. 내 아이만은 그 규칙에서 벗어나도 괜찮다는 믿음. 그러나 이 믿음이 반복될 때, 공공은 더 이상 모두의 공간이 아니라, 특정인의 공간으로 변질된다.


공공은 '모두의 공간'이라는 뜻이다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고 싶은 사람, 식당에서 조용히 식사를 즐기고 싶은 사람, 병원 대기실에서 차분히 기다리고 싶은 사람, 도서관에서 집중하고 싶은 사람. 그 모든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 바로 공공장소다. 이 공간은 단지 여러 사람이 모인 물리적 장소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공공은 규범과 예절, 그리고 서로에 대한 암묵적인 배려로 유지되는 '사회적 합의의 장'이다.


공공의 가장 기본적인 전제는 누구나 함께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말에는 전제가 하나 숨어 있다. 함께 있기 위해선 '서로를 방해하지 않으려는 최소한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 문제는 그 노력의 균형이 점점 한쪽으로 무너지고 있다는 데 있다. "우리 아이는 피곤해요. 아직 어려요. 지루해요." 이 말들은 모두 사실일 수 있다. 그러나 그 사실이 다른 사람의 감정을 파괴할 정당성을 주지는 않는다.


육아는 분명 사회가 함께 감당해야 할 몫이다. 아이가 행복하고 안전하게 자랄 수 있는 환경은 공동체가 함께 만들어가야 할 과제다. 그러나 육아의 '방치'까지 사회가 감내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아이가 공공의 리듬에 맞추어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과정은 오롯이 보호자와 아이가 함께 걸어가야 하는 길이다. 공공은 타인의 피로를 해소하는 도피처가 아니라, 서로의 존재를 감안하며 살아가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무책임한 배려 요구는 피로를 낳는다

공공장소에서 아이가 소리를 지르고, 의자를 넘어뜨리며 놀고, 좁은 통로를 뛰어다니는 동안, 어떤 보호자는 오히려 주변의 불편함을 문제 삼는다. "애 키우는 거 몰라요? 좀 이해 좀 해줘요." 이 말은 상대방이 겪는 불편과 스트레스를 감수하라고 요구하는 동시에, 침묵과 인내를 일종의 도덕적 의무로 만들고자 하는 시도다.


그러나 공공에서의 배려는 자발적일 때만 의미가 있다. 타인의 인내를 요구하기 전에, 먼저 스스로가 노력하고 있다는 모습이 선행되어야 한다. 아이가 공공장소에서 처음 사회적 행동을 배우는 무대에 설 때, 그 곁에는 지도가 필요한 보호자가 있어야 한다. 아이가 잘못된 행동을 할 수 있다. 중요한 건 그때 어떻게 반응하느냐이다. 혼내라는 말이 아니다. 조용히 주의를 주고, 왜 그런 행동이 타인에게 불편할 수 있는지 설명하며, 필요하면 자리를 벗어나 아이와 대화하는 과정 자체가 교육이 된다.


공공의 질서는 규칙만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감정, 관용, 배려가 모여야 가능하다. 그러나 이 균형은 누군가가 무제한의 자유를 행사할 때 흔들릴 수밖에 없다. 공공의 장소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공간에서 모든 행동이 용인된다는 뜻은 아니다. 자유에는 책임이 따르고, 이해는 노력 위에서만 요청할 수 있는 것이다.



"남이 키워주는 아이"라는 감각의 실종

불과 한 세대 전만 해도, 아이가 공공장소에서 소란을 피우면 주변 어른들이 자연스럽게 한 마디씩 건넸다. "얌전히 해야지", "여긴 도서관이란다." 이 짧은 문장들이 교육의 일환이었고, 사회가 아이를 함께 키운다는 감각의 표현이었다. 부모는 때로 부끄러워하며 아이에게 주의를 주었고, 아이는 주변의 시선을 통해 스스로 조심하는 법을 배웠다.


하지만 지금은 그 한마디가 갈등의 씨앗이 되곤 한다. "왜 남의 아이에게 뭐라 하느냐"는 말이 먼저 나온다. 그 결과, 타인의 개입은 간섭이 되었고, 공공의 규율은 무너졌다. 이제는 누구도 말하지 않으며, 아이는 그 공간에서 어떤 행동도 제지받지 않은 채 자란다. 배려는 조용히 물러나고, 무례함은 더 큰 목소리로 자리를 차지한다.


이런 변화는 단지 육아 방식의 변화가 아니다. 사회가 공동체로서의 기능을 상실해가고 있다는 신호일지도 모른다. 규율을 공유하지 않는 사회는 갈등을 피할 수 없다. 그리고 갈등을 회피하기 위해 모두가 침묵할 때, 공공의 공간은 점점 더 피로해지고 무질서해진다. 결국 피해를 입는 것은 아이 자신이다. 어떤 제지나 안내도 받지 못한 채 자란 아이는, 타인의 감정이나 공간에 대한 감각 없이 성장하게 된다.


아이를 위한 사회, 어른을 위한 책임

아이를 위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선 무엇이 필요할까? 단순히 아이의 모든 행동을 허용하는 것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 아이가 사회에서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건, 일정한 질서와 타인에 대한 감각이다. 이 감각은 하루아침에 생기지 않는다. 반복된 안내와 보호자의 태도, 그리고 사회적 경험을 통해 조금씩 쌓이는 것이다.


아이에게 '공공 속에서 살아가는 법'을 가르친다는 것은, 그가 타인의 시선과 감정을 인식하게 만드는 과정이다. 예컨대 아이가 소리를 지를 때, 보호자가 차분하게 설명하며 행동을 제지한다면, 아이는 그 순간을 통해 배우게 된다. 이 배움은 강요가 아닌 경험을 통해 형성된다. 그리고 이 경험은 아이가 성장한 뒤, 타인을 배려하는 성인의 모습으로 이어진다.


"내 아이도 언젠가는 타인의 입장이 된다." 이 감각이야말로 육아에서 가장 중요한 통찰 중 하나다. 지금의 배려는 결국 미래의 사회를 위한 씨앗이다. 반대로 이 감각이 사라질 때, 아이는 타인의 감정을 고려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자란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 많아질수록, 사회는 피로해지고 불편해진다.


보호란 무작정 감싸는 것이 아니다. 때론 조용히 자리를 벗어나야 하고, 부드럽게 이끌어야 하며, 설명을 위해 걸음을 멈출 줄도 알아야 한다. 이 모든 것이 아이를 위한 진짜 보호다. 육아는 아이와 사회를 연결하는 다리이며, 이 다리는 보호자의 책임이라는 기둥 위에 놓여 있다.


함께 있는 공간, 함께 감당해야 할 책임

공공장소에서 아이를 돌본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누구나 그 어려움을 알고 있으며, 대부분은 공감한다. 아이가 울음을 터뜨리는 순간, 보호자는 눈치를 살피고, 주변 사람들은 조용히 한숨을 내쉰다. 이런 불편한 순간들이 반복될 때, 사람들에게 쌓이는 감정은 육아 자체에 대한 반감이 아니다. 진짜 문제는 그 상황을 마주하는 보호자의 태도에 있다.


다른 사람들은 아이가 소란을 피운다고 해서 바로 불만을 표출하지 않는다. 대부분은 보호자의 태도를 본다. 보호자가 아이를 제지하려 노력하고, 다른 사람에게 눈빛으로라도 미안함을 표현할 때, 그 감정은 관용으로 바뀐다. 그러나 보호자가 아무런 조치 없이, 오히려 당당하게 행동할 때, 피로는 누적된다. "내 아이니까 괜찮다"는 태도는, 결국 다른 사람들의 배려를 갉아먹는다.


공공은 누군가에게만 열린 공간이 아니다. 함께 사용하려면, 함께 책임져야 한다. 이 책임은 단지 아이를 조용히 시키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아이와 함께 공공의 감각을 배우고, 타인을 존중하는 법을 익히는 과정 전체가 필요하다. 그럴 때만이 도시는 아이와 어른 모두에게 안전한 공간이 될 수 있다.


도시란, 수많은 타인과 함께 살아가는 공간이다. 그 안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타인의 존재를 의식하며 살아간다. 그 의식이 불편함을 줄이는 최소한의 조건이다. 그리고 이 감각은 어릴 때부터 배워야 한다. 보호자는 아이가 그런 사회적 감각을 익히도록 돕는 첫 번째 안내자다.


결국 변화는 작은 시작에서 비롯된다. "우리 아이니까 괜찮다"는 말에서 물러서는 일. 그 말 대신, "우리 아이도 함께 배워가는 중이에요"라는 태도. 이 작은 전환이 쌓이면, 우리는 피로 대신 배려가 살아 있는 사회를 만들 수 있다. 함께 있는 공간은, 함께 책임지는 마음에서부터 출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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