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나를 삼켜버릴 것 같아”

에드바르 뭉크, 《절규》

by 안녕 콩코드


1. 침묵은 어디로 갔을까

고야는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총구 앞의 남자는 두 팔을 벌린 채, 그저 서 있었죠. 절규하지 않았고, 비명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더 무서웠습니다. 소리 없는 그 순간에, 무언가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으니까요.


그 침묵은 어디로 갔을까요. 총성이 울린 뒤, 누군가는 살아남았고, 어딘가는 여전히 두려움 속에 숨을 쉬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마침내, 뭉크의 캔버스에서 그 감정은 터져 나옵니다.


2. 들리는 그림

노르웨이의 황혼, 붉은 하늘은 활활 타오르고, 그 사이에 한 사람이 있습니다. 양손으로 귀를 막고, 입을 벌린 채, 세상의 모든 소리를 삼켜버린 것 같은 얼굴로.


뭉크의 《절규》.

미술사에서 가장 유명한 입 모양. 가장 쓸쓸한 ‘아’의 소리.


그런데, 정말로 절규하고 있는 건 그 인물일까요? 아니면… 풍경일까요?


3. 울부짖는 자연

에드바르 뭉크는 이 그림을 남기고, 일기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나는 두 친구와 길을 걷고 있었다.
해가 지고 있었고, 하늘은 핏빛으로 물들었다.
나는 몹시 피곤하고 병들어 있었다.
갑자기 하늘이 피처럼 붉게 타오르는 것을 느꼈다.
나는 멈췄고, 울부짖는 자연의 소리를 들었다.”
— 《뭉크의 일기》 중에서


여기서 주목할 것은, 절규하는 사람이 자신이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그 소리는 자연이 내는 울음이라는 것. 그림 속 인물은 두려움에 질려 귀를 틀어막고 있지만, 우리는 그 고요한 저항 속에서 자연과 세계가 내는 엄청난 비명을 듣게 됩니다.


4. 불안이라는 이름의 그림자

이 그림은 단순한 공포의 표현이 아닙니다. 뭉크는 ‘세상 자체가 불안하다’고 느낀 사람이었죠. 그에게 현실은 결코 안전한 배경이 아니었습니다. 정신은 늘 금이 가 있었고, 몸은 병들어 있었으며, 사랑은 파국으로 끝났고, 죽음은 일상처럼 곁에 있었습니다.


뭉크는 열다섯 살에 어머니를,
그로부터 9년 뒤에는 누이 소피에를 폐결핵으로 잃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병과 죽음과 광기는, 내 요람을 지키는 천사였다.”


《절규》는 그 모든 경험이 응축된 결과였습니다. 우리가 이 그림을 ‘공포’로 기억하는 이유는, 거기서 무언가 낯익은 감정을 느끼기 때문이겠지요. 누군가에게는 불안, 누군가에게는 우울, 어떤 이에게는 아직 다 이름 붙이지 못한 감정들.


5. 감염된 감정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이 그림을 보고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건, 보는 그림이 아니라 들리는 그림, 그리고 느끼는 그림입니다.


이 그림은 세상이 만들어낸 공포에 대한 개인의 반응입니다. 고야가 목격한 것은 외부에서 주어진 폭력이었지만, 뭉크는 내부에서 자라나는 불안을 그렸습니다.


둘 다 무서운 침묵이 있었고, 둘 다 결국 말이 터져 나올 수밖에 없는 어떤 순간을 담고 있었죠.


고야의 남자는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침묵했고, 뭉크는 삶을 온몸으로 견디며 비명을 질렀습니다. 하나는 외부로부터의 억압, 하나는 내부로부터의 침식.


그리고 어느새, 그 비명이 우리에게 들립니다.


그림 밖으로 새어 나오는 ‘절규’를 들은 우리는, 마치 그 인물처럼 귀를 틀어막고 싶어지죠. 하지만 늦었습니다. 우리는 이미 이 감정에 감염되어버렸으니까요.


다음 화 예고

3화 ― “그림 속에선 아직 죽지 않았다”

파울 클레, 죽은 자의 기억 속을 걷는 사람


비명 뒤에 남는 정적.

그 침묵의 안쪽에서, 한 화가는 ‘죽은 자의 시점’으로 세상을 바라봅니다. 기억은 어떻게 형상을 얻고, 그림은 어떻게 사라진 자의 목소리를 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