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화에서는 파울 클레의 《죽은 자의 기억 속을 걷는 사람(Wanderer in the Memory of the Dead)》을 중심으로, 고야와 뭉크가 남긴 감정의 잔해 위에
‘기억’이라는 또 다른 정서를 덧입혀 보겠습니다.
1화에서는 죽음 앞의 침묵,
2화에서는 삶에 깃든 불안,
그리고 이제 3화는 죽은 자의 시선으로 본 세계,
‘추상과 기억의 회화’입니다.
3화 ― “그림 속에선 아직 죽지 않았다”
파울 클레, 《죽은 자의 기억 속을 걷는 사람》
1. 죽음 이후의 시점
비명은 사라지고, 정적만이 남았습니다. 고야의 침묵과 뭉크의 절규가 지나간 자리에 이제,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걷고 있습니다. 죽은 자의 기억 속을.
파울 클레의 그림은 그렇게 시작됩니다. 《죽은 자의 기억 속을 걷는 사람》. 이 제목은 너무 조용해서 무서울 정도죠. 우리는 보통 '기억하는 자'를 상상하지, ‘기억 속을 걷는 자’를 떠올리진 않거든요.
그는 누구일까요? 산 자일까요, 죽은 자일까요? 아니면 그 사이 어딘가, 경계에 선 자일까요?
2. 선으로 그린 저 너머
파울 클레는 “나는 죽은 자의 기억 속을 걷고 있다”는 듯한 그림을 그렸습니다. 실제로 그는 삶과 죽음 사이의 ‘중간지대’ 같은 화가였죠.
그는 1916년 1차 세계대전에 징집됐고, 편지에 이렇게 썼습니다.
“죽음은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어요. 하지만 그 느낌은 평온합니다. 나는 이미 사후(死後)에 사는 것 같습니다.”
이 말, 좀 이상하죠? 죽음을 앞둔 병사가 “나는 이미 죽은 뒤에 살고 있다”고 말하다니. 그건 단순한 공포도 아니고, 절망도 아닙니다. 클레는 삶의 이면을 아주 조용히 응시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의 선은 떨리지 않고, 색은 절망 대신 따뜻하거나 중립적이고, 구성은 거의 음악적입니다.
그림은 감정의 절정이 아니라, 그것이 가라앉은 후의 여운 같은 것입니다.
3. 추상 속의 존재들
《죽은 자의 기억 속을 걷는 사람》에서 우리는 어떤 특정한 형상보다도 기운을 먼저 느낍니다. 이름 붙일 수 없는 도시, 흐릿한 거리, 그리고 기호처럼 단순화된 사람.
그 사람은 걷고 있습니다. 다른 그림처럼 뛰거나 절규하거나 팔을 벌리거나 하지 않아요. 그저 무심한 걸음. 그 안에 담긴 건 공포도, 희망도 아닌 ‘존재의 상태’ 자체입니다.
이것이 클레의 미학입니다. 추상적이지만, 인간적이고
감정은 희미하지만, 지극히 진실한.
4. ‘기억’은 누구의 것인가
그림의 제목은 여전히 찜찜합니다. “죽은 자의 기억 속을 걷는 사람”이라니. 그건 기억하는 자가 아니라, 기억당하는 자, 혹은 기억 그 자체를 떠도는 자일 수도 있죠.
우리가 그림을 본다는 건 사실상 타인의 감정을 빌려 걷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고야의 공포, 뭉크의 불안, 클레의 여운… 그 모든 감정들이 지금 우리의 시선을 통해 다시 살아나는 거니까요.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나 죽은 자들의 기억 속을 걷고 있는 셈입니다. 그림이라는 세계 안에서 말이죠.
5. 이쪽과 저쪽 사이
클레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세상이 너무 복잡해서 단순하게 정리한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선을 몇 개만 남겨두고, 색을 몇 칸만 칠해두고, 나머지는 우리에게 맡긴 거죠. 그래서 그의 그림 앞에서는, 생각보다는 느낌이 먼저 다가옵니다.
《죽은 자의 기억 속을 걷는 사람》은 삶과 죽음, 시간과 감정, 기억과 망각 사이에서 딱 한 걸음만 내딛고 있는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그 한 걸음이 끝내 도착하지 못한 걸음일지라도, 그건 여전히 살아 있는 걸음입니다.
그림 속 그는 죽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아직입니다. 아직, 느낄 수 있고, 바라볼 수 있으니까요.
다음 화 예고
4화 ― “누군가는 당신을 지켜보고 있다”
에곤 실레, 죽음을 응시하는 자화상
죽은 자의 기억을 지나, 우리는 다시 살아 있는 시선으로 돌아옵니다. 하지만 그 시선은 더 이상 순진하지 않습니다. 어떤 시선은, 우리를 꿰뚫고 지나가죠. 이토록 벌거벗은 시선으로, 예술은 어떻게 자기를 응시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