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권, 생명, 예외상태의 정치철학
20세기 말과 21세기 초, 정치철학은 두 가지 키워드를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하나는 푸코가 제기한 ‘생명정치(biopolitics)’이며, 다른 하나는 슈미트가 강조한 ‘주권과 예외상태’이다. 이 두 사유의 궤적을 하나의 틀 안에서 결합하여 현대 정치의 심층 구조를 드러낸 철학자가 조르조 아감벤이다.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 주권 권력과 벌거벗은 생명》(Homo Sacer: Sovereign Power and Bare Life, 1995)은 그의 사유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저작이다. 그는 로마법의 낡은 개념인 호모 사케르를 다시 불러내어, 현대 정치가 어떻게 특정한 인간을 ‘죽일 수는 있으나 희생 제물로 바칠 수 없는 자’로 만든다고 말한다. 즉, 법의 보호에서 배제된 채 생물학적 존재로만 남겨지는 자의 형상이야말로 근대 정치의 은밀한 진실이라는 것이다.
이 책은 단순히 고대 로마 법제사에 대한 해석이 아니다. 그것은 민주주의, 인권, 시민권을 자랑하는 현대 정치가 어떻게 또 다른 방식의 폭력을 작동시키는지를 드러내는 작업이다. 그리고 이로써 아감벤은 우리 모두가 언제든지 ‘호모 사케르’가 될 수 있는 조건 위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환기한다.
(1) 호모 사케르: 배제 속의 포함
로마법에서 호모 사케르는 특이한 법적 지위를 지닌 존재다. 그는 범죄나 금기 위반으로 공동체에서 추방당한 자로, 누구나 그를 죽일 수 있지만, 신에게 제물로 바칠 수는 없다. 이는 그가 법적 질서에서 배제되었지만 동시에 ‘죽일 수 있음’이라는 방식으로 법의 영역에 여전히 묶여 있음을 보여준다.
아감벤은 이 인물을 근대 정치의 은유로 끌어온다. 시민권을 상실한 난민, 국적 없는 자, 수용소의 수감자, 혹은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기본권을 박탈당한 개인은 모두 호모 사케르의 현대적 버전이다. 그들은 법의 밖으로 밀려났지만, 바로 그 배제를 통해 정치 질서를 떠받친다.
(2) 예외상태(State of Exception)
슈미트는 “주권자는 예외를 결정하는 자”라고 했다. 즉, 정상 상태를 규정하고 그것을 중단시킬 권한을 가진 자가 곧 주권자다. 아감벤은 이를 확장하여, 예외상태가 더 이상 일시적 비상조치가 아니라, 근대 국가의 통치 방식 그 자체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예외상태는 법이 정지되는 순간이지만 동시에 법이 가장 강력하게 작동하는 순간이다. 법은 자신의 유효성을 드러내기 위해 예외를 만들어 내고, 그 예외를 관리한다. 이는 ‘법의 외부이면서 동시에 내부’라는 역설적 공간을 형성한다.
(3) 벌거벗은 생명(Bare Life, zoē)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삶을 두 가지로 구분했다. bios는 정치적·윤리적 삶, 즉 공동체적 삶이고, zoē는 단순한 생물학적 삶이다. 근대 이전의 정치학은 bios를 중심으로 했다. 그러나 근대에 들어 국가 권력은 zoē, 즉 인간의 생물학적 삶 자체를 직접 관리하기 시작했다.
푸코는 이를 ‘생명정치’라 불렀다. 아감벤은 이 논의를 급진화하여, 정치와 생명이 완전히 중첩되는 공간, 즉 인간이 오직 벌거벗은 생명으로만 존재하는 상태를 포착한다. 호모 사케르는 바로 이 벌거벗은 생명의 화신이다.
(1) 주권과 법의 모순
아감벤은 법의 권위가 예외상태에서만 드러난다고 지적한다. 법은 평상시에는 그저 ‘기계적 규칙’처럼 보이지만, 비상시에는 주권자가 법을 중단시키며 법의 힘을 노출한다. 법은 스스로를 정지시키는 능력을 통해서만 권위를 유지한다.
이때 배제된 자는 법적 권리에서 소외되지만, 동시에 법 질서의 필수 조건이 된다. 호모 사케르는 법적 권리의 바깥에 있지만, 법 질서가 작동하기 위해 반드시 존재해야 하는 ‘경계적 인물’이다.
(2) 호모 사케르와 근대 정치
로마의 호모 사케르가 근대에 다시 나타나는 공간은 수용소다. 나치의 아우슈비츠, 전쟁 포로 수용소, 무국적 난민 캠프 등은 모두 ‘법이 정지된 공간’이다. 이곳에서 인간은 더 이상 시민도, 권리의 주체도 아니며, 단순한 생물학적 존재로만 남는다.
아감벤은 수용소를 “근대의 노모스(nomos)”라 부른다. 즉, 영토와 법 질서를 규정하는 가장 핵심적 공간이라는 것이다. 민주주의든 독재든, 모든 근대 정치 체제는 결국 이 수용소의 논리를 잠재적으로 품고 있다는 것이 아감벤의 급진적 주장이다.
(3) 생명정치의 급진화
푸코에게 생명정치는 근대 권력이 인구와 건강, 출산과 죽음을 관리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아감벤은 이를 더 나아가 ‘법과 정치가 생명을 직접적으로 포획하는 지점’에 주목한다. 푸코의 생명정치가 관리적 측면을 강조했다면, 아감벤은 그 배제적·폭력적 측면을 부각한다.
이로써 인권 담론의 한계가 드러난다. 인권은 보편적 인간을 전제하지만, 실제로는 시민권에 의해 보장된다. 국적 없는 자나 난민은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인권을 보장받지 못한다. 즉, 인권은 시민권과 분리될 수 없으며, 따라서 언제든지 붕괴할 수 있는 취약한 제도라는 것이다.
(4) 예외상태의 일상화
아감벤의 가장 도발적인 명제 중 하나는 ‘예외상태의 일상화’이다. 전쟁이나 쿠데타 같은 특별한 상황에서만 발동되는 줄 알았던 비상조치가, 이제는 평시의 통치 수단이 되었다는 것이다.
9·11 이후의 테러 대응법, 2020년 이후의 팬데믹 방역 체제, 전자감시와 드론 전쟁은 모두 이를 증명한다. 시민의 기본권은 안전과 보안이라는 명분 아래 제한되고, 언제든지 예외가 선포될 수 있는 ‘영구적 비상사태’ 속에서 삶은 관리된다.
(1) 아감벤의 공헌
호모 사케르라는 개념을 통해 근대 정치의 보이지 않는 구조를 드러냄.
민주주의가 항상 인권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불편한 진실을 환기.
법, 정치, 생명 사이의 긴장을 하나의 사유 체계로 통합.
(2) 비판 지점
과도한 보편화: 아감벤은 모든 정치 상황을 ‘수용소’ 논리로 환원하는 경향이 있다. 그 결과 실제 제도와 맥락의 차이가 희석된다.
역사적 사례 해석: 아우슈비츠 모델을 근대 정치의 보편적 구조로 일반화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실천 전략의 부재: 아감벤은 비판은 날카롭지만, 대안을 제시하지 않는다. 그가 보여주는 세계에서는 정치적 저항의 가능성이 희박하다.
(3) 현대적 적용
난민 문제: 국경에서 억류된 난민들은 법적 보호에서 배제된 호모 사케르다.
팬데믹 통치: 격리, 통행 제한, 백신 의무화 등은 ‘벌거벗은 생명’을 직접적으로 관리하는 사례다.
AI와 바이오테크: 생명공학과 인공지능의 결합은 인간의 생물학적 조건을 더욱 직접적으로 통치 대상화한다.
결론: 오늘의 함의
《호모 사케르》는 법과 생명, 정치의 경계를 해체하며, 우리가 당연히 누린다고 생각한 권리와 자유가 얼마나 취약한 조건 위에 서 있는지를 폭로한다.
아감벤의 메시지는 단순하다. 우리는 모두 언제든지 호모 사케르가 될 수 있다. 국가가 예외를 선포하고, 법을 정지시키는 순간, 시민은 단순한 생명으로 환원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과제는 무엇일까?
첫째, ‘인간의 권리’와 ‘시민권’을 다시 연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둘을 분리해 보편적 권리가 실질적으로 보장되도록 재구성해야 한다.
둘째, 예외상태의 일상화를 감시하고, 비상조치가 상시화되지 않도록 민주적 견제를 강화해야 한다.
셋째, 생명 자체가 정치의 장이 된 시대에, 생명을 어떻게 존엄하게 보호할 수 있을지에 대한 새로운 철학적·정치적 사유가 요청된다.
아감벤은 비관적이지만, 동시에 철저하게 현실을 직시하는 철학자다. 그의 저작은 민주주의가 여전히 우리 손으로 새롭게 만들어가야 할 과제임을 일깨운다.
참고문헌 및 확장 독서
Giorgio Agamben, Homo Sacer: Sovereign Power and Bare Life, 1995.
Michel Foucault, Il faut défendre la société (사회는 방어되어야 한다), 1976.
Michel Foucault, Sécurité, territoire, population (안전, 영토, 인구), 1978.
Carl Schmitt, Politische Theologie (정치신학), 1922.
Hannah Arendt, The Origins of Totalitarianism (전체주의의 기원), 1951.
Slavoj Žižek, Violence (폭력이란 무엇인가),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