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폐된 합의

다수가 동의하는 듯 보이는 강요된 동의의 구조

by 콩코드


합의라는 이름의 평화

우리는 ‘합의’라는 말을 들으면 흔히 평화로운 장면을 떠올린다.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이 머리를 맞대고 치열하게 논의하다가, 결국 모두가 만족할 만한 결론에 이르는 모습 말이다. 이런 장면은 성숙한 민주주의와 협력의 상징처럼 보인다.


하지만 현실에서의 합의는 꼭 그렇게 아름답지 않다. 특히 우리 사회에서 합의란 종종 조용히 침묵한 다수의 동의로 포장된다. 겉보기에는 평화로워 보이지만, 그 안에는 말하지 못한 생각과 삼켜진 말들이 가득하다.


회의실 한쪽 구석에서 누군가는 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린다.

“나 사실 찬성하지 않는데… 그냥 조용히 넘어가자.”


그렇다면 이 침묵은 정말 ‘동의’일까, 아니면 두려움과 체념에서 비롯된 ‘강요된 동의’일까?


침묵은 정말 동의일까

회의실에서 자주 들리는 말이 있다.

“이의 없으시죠?”

잠시 정적이 흐르고, 아무도 손을 들지 않는다. 그러면 사회자는 말한다.

“그럼, 모두 동의하신 걸로 알고 넘어가겠습니다.”


그 짧은 순간에 수많은 감정들이 오간다. ‘이건 좀 아닌데…’라는 생각이 스치지만, 손을 들었다가 괜히 분위기를 깨거나 미움을 살까 두려워 결국 입을 다문다. 이 침묵은 진짜 동의가 아니라, 말하지 못한 반대일지도 모른다.


이렇게 형성된 합의는 사실상 결론을 미리 정해 놓고 확인하는 절차에 불과하다. 겉으로는 갈등이 사라진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갈등을 깊숙이 밀어 넣었을 뿐이다. 그리고 억눌린 갈등은 어느 날 갑자기 폭발한다.


우리 주변에서 만나는 은폐된 합의

직장 회의에서의 ‘형식적인 합의’

많은 직장인들이 경험해 본 장면이다. 상사가 이미 마음속으로 결론을 정해두었는데, 회의 말미에 “다들 의견 없으시죠?”라고 묻는다. 누군가 다른 의견을 내면 분위기가 싸늘해지고, 그 사람은 ‘괜히 일을 복잡하게 만드는 사람’으로 낙인찍힌다. 결국 아무도 말하지 않고,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며 회의가 끝난다. 그리고 그 결과는 보고서에 이렇게 기록된다.


‘전원 합의.’


하지만 그건 두려움에서 비롯된 침묵이지, 진짜 합의가 아니다.


마을 개발 사업의 ‘다수 주민 찬성’

어느 마을에 대규모 개발 사업이 추진된다고 하자. 주민 설명회가 열리고 몇몇 주민들이 반대 의견을 내지만, 대부분은 조용히 앉아만 있다. 괜히 나섰다가 불이익을 당하거나 관계가 틀어질까 두려워서다. 그러면 사업자는 이렇게 말한다.


“대다수 주민이 찬성했습니다.”


하지만 그 ‘대다수의 찬성’은 사실 무관심, 피로, 두려움 속의 침묵일 가능성이 크다. 겉으로는 평화로워 보이지만, 그 속에는 쌓이고 쌓인 불만과 불신이 숨어 있다.


SNS에서의 ‘좋아요’ 합의

온라인 공간에서도 이런 모습은 쉽게 볼 수 있다. 어떤 사건에 대한 특정 해석이 주류가 되면, 다른 의견을 내기 어려워진다. 비판적인 말을 했다가는 댓글 공격을 받거나, 친구 목록에서 삭제될 수도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조용히 ‘좋아요’를 누른다. 겉으로는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압박이 만든 가짜 합의다.


갈등을 지워버리는 사회

합의는 원래 서로 다른 생각을 드러내고 조율하는 과정이어야 한다. 부딪치고 싸우더라도, 함께 살아가기 위해 최소한의 지점을 찾아내는 것. 그게 진짜 합의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합의는 종종 갈등을 드러내는 대신 지워버리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겉으로는 평화롭지만, 그 속에는 서로의 상처와 분노가 고스란히 남는다. 마치 깨끗이 정리된 방처럼 보이지만, 실은 이불 속에 온갖 쓰레기를 몰래 밀어 넣은 것과 같다.


감춰진 갈등은 반드시 터져 나오기 마련이다. 한동안 잠잠하던 공동체가 갑작스레 격렬하게 분열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진짜 합의를 향해

그렇다면 진정한 합의란 무엇일까? 그것은 모두가 같은 생각을 갖게 되는 상태가 아니다. 오히려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불편함을 감수하면서도 함께 살아가기 위한 최소한의 약속을 찾아내는 과정이다.


침묵을 동의로 착각하지 않아야 한다.

소수의 목소리가 記錄되고 존중받아야 한다.

다수가 동의하더라도 다른 의견이 안전하게 표현될 수 있어야 한다.


이 원칙들이 지켜질 때, 합의는 억눌린 갈등을 덮는 덮개가 아니라, 갈등을 새로운 가능성으로 바꾸는 힘이 될 수 있다.


침묵 속의 진짜 목소리를 찾아서

겉으로 보기엔 모두가 평화롭게 고개를 끄덕이는 듯하지만, 그 속에는 수많은 목소리가 삼켜져 있다. 그 침묵 속에는 두려움과 분노, 그리고 어쩌면 희망까지도 숨어 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 침묵을 진짜 목소리로 바꾸는 것이다. 갈등을 덮어 숨기는 대신, 안전하게 드러낼 수 있는 자리를 만드는 것. 그럴 때 합의는 더 이상 거짓된 평화가 아니라, 함께 살아가기 위한 살아 있는 약속이 될 것이다.




심층학습

다음은 심층 탐구를 원하는 독자를 위한 추천 읽을거리다. 이 주제에 대한 생각을 더 넓히고 깊게 하고 싶다면 아래의 책들을 참고해 보자.


위르겐 하버마스(Jürgen Habermas) – 《의사소통 행위 이론》

합의가 어떻게 가능해지는지를 철저히 파헤친 책이다. 하버마스는 사람들이 서로의 말과 행동을 이해하고 조율하며, 그 과정에서 합리적인 소통이 이뤄질 수 있다고 본다. 다만 권력의 불평등이나 현실 정치의 복잡성을 충분히 담아내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있다.


샹탈 무페(Chantal Mouffe) – 《민주주의의 역설》

무페는 민주주의를 단순히 ‘합의’의 정치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사회의 다양한 갈등을 인정하고, 그것을 제도 안에서 안전하게 다루는 **‘갈등의 제도화’**가 민주주의의 핵심이라고 주장한다.


찰스 테일러(Charles Taylor) – 《다문화주의와 인정의 정치》

합의가 언제나 모두를 위한 결과를 낳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은 특히 소수자의 목소리가 다수의 합의 속에서 어떻게 지워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사회적 인정이 왜 중요한지도 깊이 성찰하게 만든다.


최장집 –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한국 민주주의의 현실을 비판적으로 바라본다. 절차만 남고 내용이 빠진 ‘합의 정치’가 어떻게 우리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는지를 구체적인 사례와 함께 짚어낸다.


→ 이 책들은 합의의 본질, 갈등의 의미, 그리고 민주주의가 현실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다양한 시선에서 탐구할 수 있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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