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의 기술 ― 피하려는 순간 드러나는 사회의 균열

by 콩코드

불편함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일상에서 수없이 많은 ‘불편함’을 경험한다. 지하철에서 시끄럽게 통화하는 사람을 만날 때, 회의 중 누군가 부당한 말을 던질 때, 가족 모임에서 정치 이야기가 나오며 공기가 얼어붙을 때, 길거리에서 무례한 행동을 목격했을 때도 마찬가지다.


그 순간, 우리의 본능은 회피다.

“괜히 말 꺼내서 분위기 깨지 말자.”

“내가 굳이 나설 필요 있나.”

“그냥 모른 척하고 넘어가자.”


겉보기에는 그저 갈등을 피하고 싶어서 내리는 선택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모른 척’ 속에는 사회적, 심리적 구조가 숨어 있다. 불편함을 피하는 선택은 단순한 개인적 편의가 아니라, 사회적 압력과 관습이 만든 결과물이다. 즉, 우리가 불편함을 회피하는 순간, 사회의 균열은 드러나지 않고 은폐된다.


불편함은 단순히 불쾌감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속한 사회의 규범, 권력 구조, 관계의 긴장을 보여주는 신호다. 우리가 이 신호를 읽고 회피하느냐, 직면하느냐에 따라 사회는 다른 방향으로 움직인다.


침묵의 기술, 사회가 길러낸 습관

우리는 어려서부터 ‘불편함을 드러내지 않는 법’을 배운다. 가족 안에서, 학교 안에서, 직장에서. ‘예의’, ‘배려’, ‘성숙함’이라는 이름으로 훈육된다.


화가 나도 “괜찮아요”라고 말해야 성숙한 어른처럼 보인다.

억울해도 웃으며 넘어가는 것이 관계를 지키는 길이다.

다른 의견을 내면 ‘분위기 파괴자’라는 꼬리표가 붙는다.


회의 시간, 상사의 부당한 발언에도 누구도 말하지 않는다. 학교에서 학생이 부당한 처우를 받아도 눈치만 본다. 이런 환경 속에서 우리는 점점 불편함을 삼키는 것이 당연하다고 믿게 된다.


그 삼킴은 단순히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사회는 갈등을 보이지 않게 관리하기 위해 사람들에게 침묵을 학습시킨다. 사람들이 불편함을 드러내지 않을수록, 조직은 외형적 안정과 조화를 유지할 수 있다. 즉, 속으로는 불편하지만 겉으로는 아무 문제 없는 상태가 만들어진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권력의 구조를 내면화한다. 불편함을 참는 것이 ‘성숙함’으로, 참는 사람이 ‘좋은 사람’으로 평가된다. 하지만 이 내면화는 곧 사회적 불평등과 불균형을 지속시키는 장치가 된다.


‘평화’의 이름으로 덮이는 균열

회의에서 한 명이 잘못된 결정을 지적하려 한다. 하지만 주위를 둘러보면 모두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 그때 느껴지는 미묘한 압박감.


“내가 말하면 분위기만 깨질 텐데…”

“다른 사람도 다 동의하는 것 같으니, 그냥 넘어가자.”


겉으로는 합의가 이루어진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강요된 침묵이다. 그 평화는 진짜 평화가 아니라 균열을 덮어두는 가짜 평화다.


이때 느껴지는 내적 긴장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표면적으로는 모두가 동의하는 듯 보여도, 속으로는 불만과 불신이 쌓인다. 그 불만은 결국, 조직이나 집단에서 숨겨진 갈등으로 남아 장기적으로 폭발할 가능성을 품는다.


사회학자들은 이를 ‘잠재적 긴장’이라고 부른다. 한국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직장 내 회식 문화, 권위주의적 상명하복, 정치적 침묵 등도 모두 이러한 구조적 긴장을 만드는 환경이다.


불편함을 피할수록 깊어지는 갈등

불편함을 피하는 선택은 잠시 상황을 덮는 것에 불과하다. 갈등은 사라지지 않고, 더 깊고 보이지 않는 곳으로 숨어든다.


직장에서 성희롱 발언을 들었지만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 침묵은 가해자를 더 대담하게 만들고, 피해자를 고립시킨다.

정치적 폭력이나 혐오 발언을 목격했지만 외면한다.

이때의 침묵은 차별을 제도화시키는 힘으로 작동한다.

가족 안의 불공평한 역할 분담을 참으며 ‘평화로운 가정’을 유지한다.

→ 그 침묵은 결국 누군가의 삶을 장기적으로 억누른다.


불편함을 두려워하는 순간, 우리는 갈등을 해결하지 않고 권력자에게 유리한 질서를 유지하게 된다. 이때 사회는 겉으로는 안정적이고 평화로워 보이지만, 내부적으로는 점점 긴장과 불신이 누적된다. 이 누적된 긴장은 폭발할 때 더욱 큰 사회적 비용을 초래하며, 개인과 집단 모두를 지치게 한다.


한국 사회의 ‘불편함’

한국 사회는 특히 불편함을 참는 문화가 강하다.

유교적 전통 속에서 ‘화목’과 ‘체면’이 강조되어 왔기 때문이다.


가족 안에서는 장유유서가 절대적인 규범이 된다.

→ 어른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은 불효가 된다.

직장에서는 회식 문화가 강요되며, 거절은 팀워크를 해치는 행동으로 간주된다.

정치적 문제에서 중립을 지키라는 압박이 강하다.

→ 입장을 밝히는 순간 ‘극단주의자’로 낙인찍힌다.


이러한 문화 속에서 ‘불편함’은 개인의 성격 문제가 아니라, 집단이 유지되기 위해 설계된 장치가 된다. 즉, 우리는 불편함을 참고 견디는 것이 사회적 존재로 살아가는 기본 규범처럼 교육받는다. 그 결과, 갈등은 드러나지 않지만, 사회적 구조의 왜곡과 불균형은 더 깊어지게 된다.


역사적으로도 한국 사회에서는 불편함을 직면하지 않고 회피하는 문화가 반복되었다. 1960~80년대 권위주의 시절, 학생이나 시민이 부당함을 드러내는 순간 ‘문제아’로 낙인찍혔다. 그때의 침묵과 회피는 개인의 삶을 억누르는 동시에, 사회 전체의 균열을 더 깊게 만들었다.


불편함을 직면하는 용기

우리가 진짜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불편함을 없애는 기술이 아니라, 불편함을 직면하는 기술이다.


불편함을 피하지 않고 그 자리에 머무르기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않고 솔직하게 표현하기

갈등을 ‘누군가의 잘못’으로만 돌리지 않고 구조적 문제를 질문하기


예를 들어, 직장에서 부당한 일이 있을 때 “이건 개인의 성격 문제”로 축소시키지 않고 “왜 이런 말과 행동이 반복될까?”라고 질문하는 것이 중요하다.


처음에는 불편하고 두려울 수 있다. 하지만 이 불편함을 견딜 때, 우리는 단순한 갈등 회피자가 아니라, 사회적 변화를 촉진하는 적극적 행위자가 된다.


불편함을 직면하는 행동은 개인적 용기를 넘어 사회적 책임이다. 그 순간 우리는 가짜 평화가 아닌, 진짜 평화를 만드는 과정에 참여하게 된다.


불편함이 만드는 가능성

불편함은 고통스럽지만, 동시에 변화를 위한 에너지다.

역사 속의 많은 사회운동은 누군가의 불편함을 드러내는 행위에서 시작됐다.


여성 참정권 운동은 가부장제의 ‘평화’를 깨뜨렸다.

노동자 파업은 기업의 ‘조화’를 뒤흔들었다.

학생운동은 권위주의 정권의 ‘질서’를 무너뜨렸다.

시민 불복종과 환경운동은 기존 정책과 권력 구조를 흔들었다.


불편함은 기존의 틀을 깨고, 새로운 질서를 만들기 위한 균열의 씨앗이다. 우리가 불편함을 피하지 않을 때, 그 균열은 더 이상 두려움이 아니라 희망의 가능성으로 바뀐다. 결국, 불편함을 직면하는 행위는 단순한 개인적 용기가 아니라 사회적 진보의 동력이 된다.


불편함을 피하지 않는 사회

우리가 진정으로 바꾸어야 할 것은 갈등 그 자체가 아니라, 갈등을 피하려는 우리의 습관이다.


불편함을 두려워하지 않고 말할 때, 우리는 처음으로 서로의 진짜 얼굴을 마주할 수 있다.


불편함을 피하는 기술에서 불편함을 직면하는 기술로의 전환이 이루어질 때, 비로소 우리는 표면적 평화를 넘어, 진짜 평화로 나아갈 수 있다.


진짜 평화란, 갈등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불편함 속에서도 서로를 이해하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관계와 구조를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우리가 불편함을 직면하는 순간, 사회는 더 깊이, 더 단단히 변화할 가능성을 갖게 된다.




심층 공부를 위한 이야기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수많은 불편함을 경험한다. 그리고 그 불편함을 어떻게 이해하고 직면하느냐가, 개인의 삶뿐 아니라 사회적 구조와 정의를 바꾸는 힘이 될 수 있다. 이를 깊이 탐구하고자 한다면, 다음 사상가들의 저작을 참고할 수 있다.


주디스 버틀러 – 《위태로운 삶》(Precarious Life)

핵심 논지: 인간의 삶은 본질적으로 취약하며, 이러한 취약성을 직면하는 것이 사회적 저항과 윤리적 행동의 출발점이다.


사회적 맥락: 테러와 전쟁, 폭력 상황 속에서 인간 삶의 취약성을 분석한다.


구조적 취약성: 취약성은 개인적 약함이 아니라 사회적·정치적 구조 속에서 형성되는 조건이다.


실천적 의미: 직장 내 차별, 사회적 불평등, 권위적 조직 구조 등에서 나타나는 불편함을 단순히 개인 문제로 축소하지 않고, 구조적 문제로 질문하고 행동으로 이어갈 수 있다.


윤리적 용기: 불편함과 취약성을 직면하는 것은 단순한 자기보호가 아니라, 행동하는 주체로서의 존재를 의미한다.


→ 버틀러는 불편함을 회피하지 않고 직면할 때, 단순한 피해자가 아니라 사회적 변화를 이끄는 주체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사라 아메드 – 《감정의 문화정치》(The Cultural Politics of Emotion)

핵심 논지: 감정은 개인적 심리 상태가 아니라, 사회적 규범과 권력 관계를 유지·재생산하는 장치다.


불편함과 사회적 신호: 불편함, 분노, 혐오 등의 감정은 사회가 무엇을 허용하고 금지하는지, 어떤 규범을 강제하는지를 보여주는 신호다.


침묵과 합의의 문제: 감정이 사회적으로 허용되지 않거나 억압될 때, 사람들은 강요된 침묵 속에 가짜 평화를 만들어낸다.


권력과 구조: 불편함을 참는 습관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권력 구조가 만들어낸 사회적 기술임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실천적 의미: 불편함을 감정적 경험에서 끝내지 않고, 사회적 구조와 연결하여 문제를 직면할 때, 감정은 변화를 촉진하는 윤리적 동력이 된다.


→ 아메드는 개인적 감정을 사회적 분석 도구로 전환하는 방법을 제공한다. 불편함은 사회적 균열을 드러내는 중요한 신호다.


마사 누스바움 – 《타인에 대한 연민》(Compassion and Justice)

핵심 논지: 타인에 대한 연민(compassion)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사회적 정의와 윤리적 행동으로 연결되는 사회적 동력이다.


감정의 윤리적 전환: 불편함, 분노, 억울함 등은 행동으로 연결될 때, 사회 구조의 문제를 직면하게 만든다.


실천적 의미:


직장 내 차별적 발언이나 부당한 대우를 마주했을 때, 단순 회피 대신 연민을 기반으로 문제의 구조적 원인을 질문.


사회적 불평등을 목격할 때, 연민을 행동으로 전환하여 변화를 촉진.


사회적 연결: 연민은 개인적 감정을 넘어서, 사회적 책임과 정의를 실현하는 윤리적 도구가 된다.


→ 누스바움은 불편함과 연민을 단순한 개인 감정이 아니라, 사회적 변화를 위한 실천적 동력으로 재정의한다.


한나 아렌트 – 《예루살렘의 아이히만》(Eichmann in Jerusalem)

핵심 논지: 갈등이나 부조리, 폭력에 대한 순응과 침묵이 사회적 폭력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경고한다.


순응의 문제: 사람들은 종종 갈등을 피하거나 구조적 문제를 개인 탓으로 돌린다.


악의 평범성: 나치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 사례를 통해, 극단적 악이 반드시 괴물적 존재에서 나오지 않고, 순응과 침묵 속에서 평범하게 발생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현대적 함의: 직장, 정치, 사회적 집단에서 불편함을 피하는 습관이 권력 남용과 부조리를 강화하는 구조적 기제로 작동할 수 있다.


→ 아렌트는 불편함을 회피하는 습관이 개인적 문제가 아닌, 사회적 폭력을 재생산하는 구조적 원리임을 이해하도록 돕는다.


불편함을 직면하는 심층적 의미

주디스 버틀러: 취약성을 직면함으로써 사회적 저항의 주체가 됨


사라 아메드: 감정과 불편함을 사회 구조 분석의 신호로 활용


마사 누스바움: 연민을 윤리적 행동과 사회적 정의로 연결


한나 아렌트: 침묵과 순응이 사회적 폭력을 강화함을 경고


이 네 명의 사상가는 불편함을 피하는 습관을 넘어, 직면과 분석, 행동으로 전환할 때 사회적 균열이 희망과 변화를 만드는 씨앗이 된다는 점에서 《불편의 기술》의 핵심 메시지와 맞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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