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대입구역에 내려 예전에 출판사에서 운영하던 북카페 방면(3번 출구)으로 나오면 길게 뻗은 길이 반색하며 달려든다. 그래도 그땐 길에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온통 마음이 콩팥, 아니 카페에 가 있던 터라 한눈 팔 새가 없었다. 북카페 가는 날이면 걸음부터 재게 밟았다.
카페가 창비사 소유였는지 아니면 민음사 거였는지 확실치 않지만, 그곳엔 해당 출판사에서 간행한 책 외에도 양서가 2층 높이는 족히 돼 보이는 서가에 빼곡히 차 있었다. 책의 상태도 꽤 좋아서 가져다 읽는 맛이 났다.
음료값은 얼추 기억해도 2명이 7천원 정도면 충분했다. 그마저도 부담되면 주인장이 내걸었음 직한 안내문에서 대단히 큰 위로를 받을 준비만 하면 되었다.
카페 콤마, 그 시절 사진.
“음료는 마시지 않아도 됩니다. 부담 갖지 마시고 책 읽으세요.“
세상이 ‘알흠답다’면 아마도 이런 글귀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알흠다움’이 끝도 없이 전염되었던 걸까? 사람들은 적당히 음료를 시켰고, 더러는 책을 샀다.
굳이 안 사도 될 책을 미안한 마음에, 때때로 주인장 마음 씀씀이가 고맙다는 이유로 주머니 사정을 상당히 ‘오바하는’ 셈을 치르고도 사람들은 표정이 밝았다. 다행히 음료를 남기고 가는 손님은 하나도 없었다.
탁자에, 거짓말 조금 보태서, 읽고 싶은 책을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몇 시간을 커피를 홀짝이며 책을 읽어도 뭐라 하는 사람 하나 없었으니, 그곳은 그야말로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성지였다.
근 2년 가까이 주말이면 그곳으로 출근했던 거 같다. 거기서 책 읽고, 글 쓰고, 남는 시간이면 연남동을 돌았다.
연남동은 와락하고 품을 파고드는 연인을 쏙 빼닮았다. 폭 안았다 싶으면 언제인가 싶게 몸을 빼내는 모양새도 연인들이 서로 주고받는 놀이와 많이 닮았다.
어디 하나 빼어나지 않은 곳이 없고, 어디 하나 재미있지 않은 곳이 없다. 시들만 하면 생판 다른 옷을 갈아입은 골목이 생겨나고, 잊었다 싶으면 눈이 번쩍 트일 변신으로 정신을 새로 가다듬게 만들었다.
비아 톨레도 에스프레소 바와 올루
요 몇달 새 연남동엔 에스프레소 바람이 불었다. 에스프레소 바가 생기나 싶더니 이젠 이 골목에도, 저 골목에도, 하다못해 주택가뿐인 길목에도 에스프레소 바가 함박웃음을 지었다.
며칠 전엔 정통 에스프레소를 배운 가게라는 간판을 단 가게가 언뜻 목욕탕 타일 같은 인테리어로 무척 생경한 느낌을 주었는데 오늘에서야 이물감 없이 자리를 잡았다. 잇달아 같은 풍의 가게가 하나 둘씩 오픈한 탓에 그 가게, 평범 이상이 되지 못한 운명을 향해 질주하더라는. 주인인 연방 웃음을 날렸다. 장사는 잘 되는 모양이었다.
앞서 "북카페 방면으로 나오면 길게 뻗은 길이 반색하며 달려든다“고 한 문장에서 ‘길게 뻗은 길’ 오른편 일대가 구 연남동이라면 그 위쪽 저 멀리 주택가 인근과 그 끝자락에 생겨난 가게들이 신 연남동의 구성원들이다. 연남동 역사의 8할은 아기자기한 골목과 그 골목 안으로 옹기종기 나앉은 가게들이 다 해냈다면 거짓말..... 아니다.
경의선 숲길
철마다 연남동 골목에선 열매껍질을 깔 때 나는 달큰한 맛과 시큼하게 배어드는 향기가 코끝으로 나곤 한다. 손님의 가슴이 여지 없이 달뜨는 그와 같은 심상에 자지러지는 건 태반 다리다. 눈이다. 입이다. 가서, 보고, 욱여넣느라. 연신 골목으로 사람들이 꾸역꾸역 모여든다. 이름하여 새로운 성지니라.
때론 떠밀려(그 정도였는지 가늠은 안 된다. 가늠할 생각도 사실 없다), 때때로 사람의 물결로 동공에 어지럼증이 생길 때쯤 이때다 싶게 ‘흔들리니까 청춘’ 제2막을 찍기라도 하듯이. 태반은 귀신에게 홀렸을 청춘 연하는 손님들이 갓 스물을 넘긴 가게에 숨 막힐 정도로 몰리곤 했다.
빽빽하게 놓인 테이블들 어느 곳에도 사람이 들고 날 틈을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용케 자리를 잡았다. 우려했던 사정이라곤 일도 없었다. 하나같이 사람 좋은 얼굴에 행복한 표정이다. 그거면 되었다. 놀러 나왔는데 뭘.
골목 풍경
연남동 골목은 앞을 잇고 연신 뒤를 잇댄 광주리다.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무한히 이어지고 또 이어진다. 어느 날은 난생처음 보는 골목이 생겨 고개를 갸우뚱거리기도 했는데 태생이 주택가인 그곳에 골목이 새로 날리 없다. 워낙 길 자체가 오밀조밀하다보니 볼 구석을 미처 다 돌지 못한 탓이려니 생각하자. 그래야 건강에 이롭다.
골목 어디에도 군내 나듯 답답한 느낌이 나지 않는다. 소싯적 부엌문을 열 때마다 흔히 ‘달겨들던’ 뜻 모를 두려움의 정체에 곁을 내주지 않는다. 어느 골목으로 접어들던 그 골목에서 이어진 길이 거푸 마중 나오고, 그 너머 나들목에 마음에 쏙 드는 가게가 보란 듯이 모습을 드러낼 것 같은 동화 속 감성이 되살아 나곤 하는 것이다.
골목 안쪽 깊숙한 곳엔 여간해선 눈에 잘 띄지 않는 작은 시장이 있었다. 오죽 몸을 잘 숨겼던지 열에 아홉은 시장을 찾지 못했다. 반경 50미터가 채 안 돼 보이는 그 골목 어디에 ‘애써 찾으면(!) 결코 만나지 못하는’ 지역이 있게 됐는지 지금 생각해도 아리송하기만 하다.
얼추 보아도 새파란 상인들이 그곳에 좌판 비슷한 걸 깔아놓고 형형색색의 수제 액세서리를 팔았다. 사람들은 보려고만 할 뿐 잘 사지 않았다. 그래도 매주 시장이 열렸다. 밖으로 낸 쪽문을 빠져나오면 에그 타르트 가게가 있고 그 앞으로 스파게티 등속을 파는 가게, 다시 그 앞 몇 발자국 앞으로 짜장면집이 있었다.
동진시장
신 연남동은 경의선 숲길 끝자락에 있다. 성산동, 남가좌동과 머리를 맞대고, 연희동과 오른 어깨를 겨루는 위치다.
가을 햇볕이 흐드러지듯 지면 위로 퍼져가던 오후, 한낮의 피곤이 도심 숲 뒤안길로 넘어가려던 즈음 그곳 연남동은 그날의 여운을 마저 붙잡으려는 사람들로 때아닌 북새통을 이뤘다. 저 멀리서 일군의 무리가 또 다시 몰려 오고 그들은 누구라 할 것 없이 가게 안쪽을 기웃거렸다.
게으른 가게 주인은 이제야 간판을 밖으로 내고 상을 닦느라 부산을 떨었다. 비스듬히 지던 햇살이 노을로 바뀌는 동안 연남동의 속살이 서서히 열렸다. 술집은 약방의 감초였다. 그 옆으로 이탈리안 펍이 서고 의류 가게가 오픈했다.
그렇게 끝에서 안으로 걸음을 옮기며 하나씩 신 연남동의 형상을 눈매에 담는데 반가운 얼굴이 막아 섰다. 고맙다. 오래 전에 반짝 관심을 끈 뒤로 사라져간 독립서점.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서너 평 남짓한 작은 공간에 여러 종류의 책을 들여놓았다. 독립서점의 느낌만 살렸을 뿐 여느 서점과 다르지 않다. 아쉽다.
그래도 소비가 대세인 곳에 서점은 반갑다. 부러 한 시간을 머물러 시집 두 권과 소설 한 권을 샀다. 나쓰메 소세키의 《춘분 지나고까지》가 아주 잘 어울리는 거기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