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의 가을'. 호이징가. 요즘엔 '호이징아'라고 읽던데 초판 판본이 1988년이라 이해 못 할 바가 아닐 듯. 반갑기 그지없는 건 활자체도 그 시절 활자체인 듯해서 생경하기는 하지만 나름 정감이 느껴지기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맞는지 찾아보았다. 맞다. 호이징아. 나이(?)가 들다 보니까 별걸 다 신경 쓴다. 아니면 어때, 하고 넘겨도 될 일에 신경이 자주 간다. 성품이라 쉽게 고쳐지지 않을 걸 안다.
'중세의 가을'이 문단에 끼친 영향력에 관해선 아주 오래전부터 들었다. 단, 기억이 희미할 뿐이다. 그날 머릿속을 휘감던 환희나 격정이 어제 일처럼 새롭다. 그래서 더더욱 이 책에 집착했을지 모른다.
헌책방에 들어가자마자 이 책부터 눈에 띄었다. 서가의 구성이 바뀐 탓에 이 책이 먼저 눈에 들었는지, 운명적으로 이 책과의 조우를 예견했을지는 알 수 없다. 정확한 건, 이 책을 보자마자 다른 책에는 관심의 일부라도 주지 않게 되더란 것.
서구의 중세는 극단적인 것들이 한데 혼란스럽게 어우러져있는 난해한 시대였다. 구원에의 열망과 화려함에의 정념, 기사도와 궁정식 사랑의 더없는 세련성 밑에 소박하고 분방한 어린 아이 같은 치기, 사치와 형식주의에의 탐닉과 그곁에서의 금욕과 경건에의 고집, 기독교적인 것과 고대적인 것 꿈ㆍ이상주의와현실ㆍ세속주의, 귀족적인 것과 민중적인 것, 어둠과 밝음 - 이 상치되는 것들의 얽힘은 이 시대를 암흑의 삶으로 보이게도 하며 생명감에 충일한 정열의 시절로 새로이 해석하게도 만든다.
부르크하르트와 함께 최대의 현대 사가로 꼽히고 있는 호이징가는 중세적 삶의 모습들이 농축된 15세기를 총체적인 문화사-인간사로 파고들면서, 거기서 중세의 본질을 해명하고 근대-르네상스의 여명을 발견해낸다. 오히려, 뛰어난 문학적 작품으로도 읽힐수 있는 이책은 우리에게 이제껏 숨겨져왔던 중세의 풍요한 역사에 밝은 이해 지평을 열어주면서 인간의 공동체적 심리학, 정신과 삶의, 예술과영혼의, 개인과 집단의 깊은 안식을 가능하게 한다.
- <중세의 가을>, 뒷표지 글, 최흥숙
아마도 이 책이 중세에 대한 편견을 깨는 데 중요한 시발점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그런 차원에서 권장 도서 목록에 올랐을 테고, 일찍이 이 책의 가치를 알아본 다수가 필설로 때론 구설로 입에 침이 마르게 이 책을 상찬했을 터다.
어느 틈에 대학가의 여느 허름한 책방에서 이 책의 존재를 발견하고 좁은 의자에 앉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여러 장을 읽었을 게 뻔하지 않던가.
그러다 약속에 쫓겨 혹은 강의 시간에 늦을까 서둘러 자리를 털고 일어났을 테고, 그 통에 서로를 향한 난데없는 이끌림이 그와 나란 인간 사이에 쉽게 풀지 못할 매듭으로 남았을 거라고 믿고 싶다.
소리 없는 아우성으로 서로를 목 놓아 불렀을 것이 자명한 수십 년 세월을 뒤로 하고 드디어 그와 조우하게 됐으니, 이 벅찬 감정을 무슨 말로 표현할까.
미국 화가 윈즐로 호머(1836~1910)의 걸작 ‘Gulf Stream(걸프 스트림)’
다만 시절이 여의찮아 마음에 걸린다. 차가운 들판 위에 맨몸으로 바람을 맞는 청년의 심정이 이와 같았을까 싶다. 느닷없이 불어닥친 불편한 가족관계로 심장이 찟기고 머리 속이 헤집어졌다.
손은 무엇하나 제대로 잡는 법이 없다. 기억은 멀리 줄달음쳤는지 찾을 길이 없다. 그래도 봄은 오려는지 밥은 챙겨 먹고 있다.
이 책에서 세상의 또 다른 이치를, 이치에 닿은 흐릿한 그림자만이라도 조심스레 밟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으리라. 그런 마음으로 책장을 한 장, 두 장 넘긴다.
대대로 오해에 휩싸인 중세라는 시기가 마치 이 책 이전과 이후로 갈리듯 맹렬히 앞을 가로막았다. 혼돈이 날수를 더하며 더는 맞이할 수 없는 하루를 거푸 맞는데, 마음은 역시나 가라앉을 줄 모른다.
그게 인생이라고 서둘러 갈무리하고 싶지 않다. 격동이든 미동이든 세월엔 늘 그만큼의 파동이 일어왔다는 것, 그것만이 위안이다. 그래왔으니 또 그러하리라.
이제 끝인 걸까요.
조각배를 타고 바다에 나간 남자는 폭풍을 만났습니다. 돛을 찢고 돛대를 부러트릴 정도로 강렬한 바람과 파도. 그래도 남자는 뱃전을 움켜잡은 손을 결코 놓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지났을까. 마침내 폭풍도 걷히기 시작하는 듯합니다. 하지만 그의 목숨은 여전히 위태롭습니다. 남자의 피와 살을 탐내는 식인 상어들이 몰려들어 뛰어오르기 시작했거든요. 상어 밥이 되지 않더라도 그가 말라 죽는 건 시간 문제. 그런데….
바다 저 멀리 지나가는 큰 배가 눈에 들어옵니다. 안타깝게도 남자를 발견하기엔 너무 거리가 멀군요. 과연 그는 구조될 수 있을까요? 배가 다가올 때까지 버틸 수는 있을까요?
- <美 결딴날 뻔한 '초유의 위기'…그 현장 한가운데 있던 청년 [성수영의 그때 그 사람들]>, 한국경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