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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제전쟁의 두 전선:유전자는 몸을, 예술은 영혼을 지배

『이기적 유전자』와 『서양미술사』: 생존의 법칙, 누가 더 잔혹한가?

by 콩코드

복제자의 명령 — 모든 진화의 근원

​세상의 모든 존재는 '생존'이라는 단 하나의 지상 명령을 따릅니다. 무생물은 물론 생물까지, 그리고 인간이 만들어낸 문화와 예술까지도 이 냉정한 법칙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모든 진화의 근원에는 자신을 복제하고 퍼뜨리려는 '이기적인 명령'이 숨어 있습니다.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의 『이기적 유전자』는 생명체가 유전자라는 복제자의 생존을 위한 임시 운반체일 뿐이라는 충격적인 통찰을 던집니다. 이 관점에서, 우리의 삶은 유전자의 영원한 생존 전략에 종속됩니다.


​그런데 인간의 역사와 미적 감각을 기록한 에른스트 곰브리치(E. H. Gombrich)의 『서양미술사』를 펼치면, 또 다른 종류의 치열한 생존 경쟁을 발견합니다. 르네상스의 원근법이 고딕의 종교적 도상을 대체하고, 인상파의 색채 실험이 아카데미즘을 전복시키는 과정은, 유전자만큼이나 끈질긴 '화풍(Style)'의 생존 투쟁입니다.


​이 에세이는 이 두 개의 거대한 진화—생물학적 진화와 예술적 진화—가 공유하는 논리를 탐구합니다. 유전자와 화풍이라는 두 복제자 중, 경쟁과 선택의 환경에서 살아남고자 하는 그 이기심의 본질은 무엇이며, 무엇이 더 집요하고 냉혹하게 자신의 생존을 관철시키는지를 파헤쳐 보겠습니다.



유전자의 이기심: 『이기적 유전자』와 맹목적인 생존

​복제자(Replicator)의 등장: 존재의 궁극적인 단위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의 『이기적 유전자』는 생명에 대한 우리의 관점을 뿌리부터 흔들어 놓았습니다. 이 책의 가장 근본적인 주장은 진화의 주인공은 개체(organism)가 아니라 유전자(gene)라는 복제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인간'이나 '동물'이 생존하고 종족을 번식시킨다고 생각하지만, 도킨스에 따르면 개체는 유전자가 잠시 이용하는 일종의 '운반체' 또는 '생존 기계(Survival Machine)'에 불과합니다. 유전자는 불멸의 존재로, 복제와 복제를 거듭하며 세대를 초월하여 이어집니다. 반면, 개체는 유전자가 잠시 모여 만든 일회용 주택과 같습니다. 유전자의 유일한 관심은 영원히 자기 자신을 복제하는 것입니다.


맹목적인 이기심의 논리

​도킨스가 말하는 '이기심(Selfishness)'은 도덕적 의미의 악의나 의도적인 욕심이 아닙니다. 그것은 맹목적이고 비의도적인 생존 논리의 은유입니다. 수많은 복제자들 중, 자신의 복제 확률을 조금이라도 높이는 방식으로 행동하는 유전자만이 살아남아 다음 세대로 전달됩니다.


​이러한 유전자의 맹목적인 복제 경쟁은 생물 세계의 모든 복잡한 현상을 설명합니다. 겉으로 보기에 고귀한 이타적 행동마저도, 사실은 유전자가 자신의 사본(예: 형제자매의 몸속에 있는 유전자)을 살려 복제 확률을 높이려는 장기적인 이기심의 전략으로 해석됩니다.


유전자 진화의 냉혹한 환경

​유전자의 생존 환경은 지극히 냉혹합니다. 그들은 무작위적인 변이(Mutation)를 통해 새로운 생존 전략을 시험하며, 자연 선택이라는 엄격한 심판대에 오릅니다. 이 과정에는 의도나 자비가 없습니다.

​생존 기준: 오직 '더 잘 복제하는 능력'만이 유전자의 성공을 결정합니다.

​속도와 시간: 유전자는 수백만 년에 걸쳐 극도로 느리지만 확실하게 진화하며, 환경 변화에 대응합니다.


​이처럼 유전자 진화는 물질적 기원과 생물학적 필연성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다음 장에서 다룰 예술적 진화는 이 유전자가 만든 가장 복잡한 생존 기계, 즉 인간의 뇌라는 환경 속에서 어떻게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는지를 탐구할 것입니다.



​화풍의 진화: 『서양미술사』와 미적 환경 선택압

​예술적 복제자, 화풍(Style)의 탄생

​1장에서 유전자(Gene)가 생물학적 복제자라면, 에른스트 곰브리치(E. H. Gombrich)의 『서양미술사』에서 우리는 또 다른 종류의 끈질긴 복제자, 즉 화풍(Style)을 만납니다. 화풍이란 특정 시대나 지역, 또는 예술가 그룹이 공유하는 미적 표현 방식, 즉 시각적 아이디어 덩어리입니다.


​유전자가 자기 복제를 위해 생존 기계를 만들 듯, 화풍은 인간의 뇌라는 복잡한 환경 속에서 인식과 모방을 통해 끊임없이 자신을 복제하려 합니다. 한 화가가 새로운 구도나 색채 사용법을 발견하면, 다른 화가들이 이를 채택하고 변형하며, 그 아이디어는 문화적 유전자처럼 확산됩니다.


​모방, 변이, 그리고 미적 선택압

​화풍의 진화 과정은 유전자 진화와 놀라울 정도로 유사합니다.

​모방 (Replication): 학생 화가들이 스승의 스타일을 배우고 복제합니다.

​변이 (Variation): 복제 과정에서 실수나 의도적인 시도를 통해 새로운 기법(변이)이 발생합니다.

​선택 (Selection): 이 수많은 변이 중 '미적 환경 선택압(Aesthetic Environmental Selection Pressure)'을 통과한 스타일만이 살아남습니다.


​유전자의 생존을 결정하는 것이 자연환경이라면, 화풍의 생존을 결정하는 것은 인간의 문화 환경입니다. 주요 선택압은 다음과 같습니다.

​후원: 왕실, 교회, 또는 신흥 부르주아 계층이 어떤 스타일을 원하는지에 따라 화풍의 운명이 결정되었습니다.

​기술: 유화 물감의 발명, 카메라의 등장 등 새로운 기술은 화가들에게 새로운 표현의 자유를 주어 진화의 촉매제가 되었습니다.

​비평: 평론가와 대중의 취향, 그리고 미술 아카데미의 인정 여부 역시 화풍의 생존에 강력한 압력으로 작용했습니다.


이상적 재현에서 주관적 감각으로

​서양미술사의 핵심적인 진화는 '현실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대한 화풍 간의 경쟁입니다.


​르네상스 화가들이 원근법과 인체 해부학을 통해 수학적이고 이상적인 현실 재현이라는 화풍을 확립했다면, 이후 인상주의 화가들은 카메라에 의해 현실 재현의 역할을 빼앗긴 후 '빛과 색채를 통한 주관적 감각의 포착'이라는 새로운 화풍을 창조하여 생존했습니다. 이처럼 화풍은 외부 환경의 변화에 맞서 끊임없이 전략을 바꾸며 생존하려는 욕구를 보여줍니다.


​이러한 화풍의 진화는 유전자 진화와 달리 의도적이고 빠른 속도로 진행됩니다. 다음 장에서는 이 두 복제자가 가진 이기심의 본질과, 유전자가 만든 환경(인간의 뇌) 속에서 화풍이 어떻게 생존 투쟁을 벌이는지 비교할 것입니다.


​복제자들의 경쟁: 유전자 vs. 화풍의 생존 전략

​생존 환경의 근본적 차이: 몸 vs. 뇌

​우리는 유전자(Gene)와 화풍(Style)이라는 두 종류의 복제자가 각자의 방식으로 '이기적인 생존 투쟁'을 벌이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하지만 두 복제자가 마주한 환경과 생존 전략은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유전자: 물질적 환경에서 생존하며, 복제 속도가 느리고(세대 단위), 성공의 기준은 개체의 생식적 성공(biological fitness)입니다.

​화풍: 문화적 환경(인간의 뇌)에서 생존하며, 복제 속도가 매우 빠르고(모방, 학습 단위), 성공의 기준은 문화적 공명(cultural resonance)과 기억력입니다.


​결국 유전자는 자신을 복제할 '운반체(인간)'를 만들었지만, 화풍은 그 운반체의 '가장 복잡한 기관(뇌)'을 새로운 환경 삼아 기생하며 번성합니다. 화풍은 유전자가 창조한 생존 기계를 이용해 자신의 복제와 확산을 꾀하는 2차 복제자인 셈입니다.


​이기심의 충돌: 무엇이 더 변덕스러운가

​에세이의 핵심 질문, '유전자와 화풍 중 무엇이 더 이기적인가?'에 답하기 위해 우리는 그 이기심의 '변덕스러움'을 비교해야 합니다.


​유전자의 이기심은 맹목적이지만 수백만 년간 검증된 안정적인 전략을 따릅니다. 반면, 화풍의 이기심은 훨씬 변덕스럽고 파괴적일 수 있습니다.

​빠른 폐기율: 유전자가 수십 세대에 걸쳐 서서히 변한다면, 화풍은 몇 년 만에 시대착오적이라며 버려질 수 있습니다. 문화적 복제자들은 살아남기 위해 끊임없이 새로움(novelty)을 추구하며, 이는 종종 선대의 화풍을 극단적으로 전복시키는 방식으로 나타납니다.

​생물학적 불필요성: 예술적 이기심은 때로 유전자의 생물학적 명령(에너지 절약, 안전)을 무시합니다. 거대한 예술품을 만들기 위한 막대한 노동력 투입, 생존에 직접적인 도움을 주지 않는 추상 미술의 창조 등은 화풍이라는 복제자가 유전자의 이기심을 잠시 지배하거나 조종하는 것처럼 보이게 합니다.

유전자 위에 새겨진 문화적 가치

​궁극적으로, 두 복제자는 상호 의존적입니다. 화풍이라는 복제자는 유전자가 만들어낸 정교한 인식 능력과 감정 구조 위에서만 생존할 수 있습니다. 유전자의 성공적인 진화는 인간에게 미와 의미를 추구하는 능력을 부여했고, 이는 문화적 복제자가 생존할 수 있는 비옥한 토양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이기심'의 크기는 유전자가 더 근원적이지만, '변이와 생존 경쟁의 치열함' 측면에서는 화풍이 인간의 변덕스러운 지성을 숙주로 삼아 더 예측 불가능하고 격렬한 투쟁을 벌이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역사는 유전자가 낳은 몸과 뇌 위에서 화풍이 펼쳐낸 두 번째 진화의 드라마입니다.


공존하는 진화 — 의미를 부여하는 예술

​우리는 『이기적 유전자』와 『서양미술사』를 통해, 생명과 문화라는 전혀 다른 두 영역이 복제와 생존이라는 하나의 근원적인 논리로 엮여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유전자의 이기심은 맹목적이고 물질적인 불멸을 추구합니다. 반면, 화풍의 이기심은 인간의 변덕스러운 인식을 숙주로 삼아 끊임없이 새로움을 추구하며, 때로는 생물학적 생존의 명령마저 거스르는 고차원적 경쟁을 펼칩니다.


​궁극적으로 예술적 진화는 유전자가 성공적으로 복제되어 낳은 가장 정교한 산물(인간의 뇌) 위에서만 펼쳐질 수 있는 드라마입니다. 유전자가 우리에게 존재(Being)를 부여했다면, 화풍은 그 존재에 의미(Meaning)를 부여합니다.


​예술은 단순한 유전자 복제의 부산물이 아니라, 유전자의 궁극적인 목표인 '생존'을 넘어 '왜 생존하는가?'라는 질문에 답하려는 인간의 위대한 시도입니다. 인간은 끈질긴 유전자의 생존을 발판 삼아, 유전자의 이기심보다 더 강력한 아름다움의 힘을 창조하며 진화를 완성해 나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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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 목, 토, 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