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근 후, 길거리에서 만난 붕어빵

by 안녕 콩코드

빌딩 숲의 불이 꺼질 때 시작되는 허기

​밤 11시, 사무실의 육중한 유리문을 밀고 나오자 텅 빈 복도에 내 구두 소리만이 외롭게 공명했다. 방금 전까지 나를 압박하던 엑셀 시트의 숫자들과 끝 보이지 않던 보고서의 문장들이 머릿속에서 잉잉거리는 이명으로 남았다. 엘리베이터 거울 속에 비친 사내는 어깨 위에 도시의 피로를 굴비처럼 엮어 짊어진 채, 초점 잃은 눈으로 층수 표시판만 응시하고 있었다.


​건물 밖으로 나서자 칼바람이 목덜미를 파고들었다. 겨울의 도심은 낮보다 밤이 더 냉혹하다. 화려한 빌딩들의 경관 조명은 하늘을 찌를 듯 당당하지만, 그 불빛 아래를 걷는 개인의 그림자는 한없이 짧고 위태롭다. 저녁 식사조차 거른 채 모니터와 씨름한 대가는 지독한 허기였다. 하지만 이 시간에 나를 반겨줄 곳은 차가운 편의점의 형광등이나, 자극적인 냄새를 풍기는 심야 식당뿐이라는 사실이 발걸음을 더욱 무겁게 했다.


​그때였다. 지하철역으로 향하는 길목 모퉁이에서 희뿌연 수증기가 피어오르는 것이 보였다. 차가운 가로등 불빛 사이로 유난히 노랗고 따스한 전구 하나가 졸 듯이 매달려 있는 곳. 가까이 다가갈수록 코 끝을 간지럽히는 달콤하고 고소한 냄새—그것은 이 계절, 이 시간 도시가 허락한 가장 다정한 유혹인 '붕어빵'의 향기였다.


​낡은 천막 안, 무쇠 틀이 달그락거리며 돌아가는 소리가 정적을 깨웠다. 주인아주머니의 투박한 손놀림에 따라 노란 반죽이 채워지고, 그 위로 검붉은 팥 앙금이 넉넉히 자리를 잡는다. 치익, 하는 소리와 함께 피어오르는 김은 마치 야근에 찌든 내 마음의 독소를 씻어내 주는 정화의 연기처럼 보였다.


​"천 원어치만 주세요."


​내 목소리는 추위에 얼어붙어 조금 갈라져 있었다. 아주머니는 말없이 갓 구워낸 붕어빵 세 마리를 종이봉투에 담아 건네주셨다. 봉투를 받아 든 순간, 손바닥을 통해 전해지는 뜨거운 온기. 아까 마신 믹스 커피가 찰나의 안식이었다면, 이 묵직한 종이봉투는 차가운 현실 속에서 내가 아직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물리적인 온기였다.


​나는 지하철역 계단에 서서 봉투 안을 들여다보았다. 서로 몸을 맞대고 누워 있는 노란 붕어빵들. 세련된 베이커리의 빵처럼 매끄럽지는 않지만, 거친 지느러미와 울퉁불퉁한 몸체에는 이 도시를 버텨내는 우리네 삶의 근육이 박혀 있는 듯했다. 나는 조심스럽게 한 마리를 꺼내 들었다. 바삭한 꼬리 끝에서부터 전해지는 열기가 꽁꽁 얼어붙었던 내 감성의 끝자락을 녹이기 시작했다.


노란 봉투에 담긴 기억의 온도

​바스락거리는 종이봉투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손가락 끝에 닿는 거칠고 뜨거운 감촉. 갓 구워낸 붕어빵은 제 몸 안에 품은 팥의 열기를 이기지 못해 봉투 안을 금세 눅눅한 증기로 채우고 있었다. 나는 가장 통통하게 살이 오른 놈의 꼬리 부분을 툭 떼어 입에 넣었다.


​'바삭-'


​경쾌한 소리와 함께 고소한 밀가루 반죽의 향이 먼저 혀를 감쌌고, 뒤이어 들어온 뜨거운 팥 앙금이 입안 전체를 부드럽게 애무했다. 지나치게 달지 않은, 투박하고 뭉근한 그 맛. 얼어붙었던 혀가 풀리면서 비로소 목구멍 뒤쪽까지 팽팽하게 긴장되어 있던 신경들이 하나둘 느슨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 맛은 참 묘하다. 에스프레소처럼 날카롭지도, 파스타처럼 화려하지도 않다. 하지만 붕어빵 한 입은 시간을 되감는 마력을 지녔다. 씹을수록 기억의 심해에 가라앉아 있던 노란 봉투의 잔상들이 떠올랐다. 어린 시절, 겨울밤이면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들어오던 아버지의 코트 냄새. 그 서늘한 코트 품 안에는 언제나 오늘처럼 김이 모락모락 나는 종이봉투가 들어 있었다.


​그때 아버지는 지금의 나보다 젊으셨을까, 아니면 더 고단하셨을까. 자식들이 입을 벌려 붕어빵을 받아먹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시던 아버지의 눈가에 맺혀 있던 피로를, 나는 이제야 내 어깨에 얹힌 무게로 이해하게 된다. 아버지가 사 오셨던 것은 단순한 간식이 아니었다. 그것은 차가운 세상에 맞서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지켜낸 한 남자의 '무사 귀환' 보고서였고, 말로 다 전하지 못한 서툰 사랑의 온도였다.


​지하철역 플랫폼에 서서 다음 열차를 기다리며 남은 반쪽을 마저 입에 넣었다. 내 주위를 바삐 지나치는 사람들도 저마다의 가슴 속에 이런 노란 봉투 하나쯤은 품고 살아갈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그것이 사랑하는 이의 목소리일 것이고, 누군가에게는 내일의 꿈일 테다.


​지금 이 순간, 붕어빵의 팥 앙금이 주는 온기는 단순한 열역학적 에너지가 아니다. 그것은 '나'라는 개인이 이 거대하고 차가운 도시 기계의 부속품이 아니라, 누군가의 소중한 아들이었으며, 여전히 온기를 갈구하는 뜨거운 심장을 가진 존재임을 일깨워주는 신호였다.


​머리 위 전광판에 '열차 진입'이라는 붉은 글씨가 깜빡인다. 차가운 금속성 소음을 내며 들어오는 열차를 향해 발을 내디디며, 나는 마지막 붕어빵의 온기를 손바닥 전체로 감싸 쥐었다. 기억 속 아버지의 냄새와 지금의 붕어빵 냄새가 섞여드는 지하철역의 밤. 야근 후의 지독한 허기는 어느덧 가라앉고, 그 자리에 해묵은 그리움과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은 작은 용기가 팥 앙금처럼 달콤하게 차오르고 있었다.


덜컹거리는 열차 속, 온기를 나누는 투명한 연대

​지하철 문이 열리고 차가운 금속성 마찰음과 함께 열차 안으로 발을 들였다. 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객차 안은 저마다의 전장에서 퇴각하는 병사들처럼 지친 기색의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나는 빈자리를 찾지 못한 채 출입문 옆 구석에 자리를 잡고 서서, 아직 온기가 남아 있는 붕어빵 봉투를 가슴팍에 소중히 끌어안았다.


​봉투 틈새로 새어 나오는 달콤한 향기는 이 무채색의 공간에서 유일하게 생동감 있는 색채였다. 문득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내 앞에는 스마트폰 화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 무표정하게 서 있는 청년이 있었고, 옆자리에는 낡은 서류 가방을 무릎에 올리고 꾸벅꾸벅 졸고 있는 중년의 사내가 있었다. 그들의 얼굴 위로는 가차 없는 형광등 불빛이 내려앉아, 하루 동안 쌓인 피로의 골을 더욱 깊게 드러내고 있었다.


​그 순간, 붕어빵의 향기가 공기를 타고 퍼졌는지 옆에 서 있던 청년이 코를 씰룩이며 살짝 고개를 돌렸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그의 눈동자에는 본능적인 허기와 함께 아주 잠깐의 그리움 같은 것이 스쳐 지나갔다. 나는 왠지 모를 민망함에 봉투 입구를 여미려다 멈췄다. 어쩌면 이 좁은 객차 안에 퍼진 소박한 냄새가, 저들에게도 잠시나마 차가운 현실을 잊게 해주는 마취제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열차는 어두운 터널을 질주하며 덜컹거렸다.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터널의 벽면은 마치 우리가 매일 마주하는 거칠고 반복적인 일상의 단면 같았다. 하지만 내 가슴에 닿아 있는 봉투의 온기는 그 어둠 속에서도 뚜렷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이 온기는 비단 나만의 것이 아니었다.


​졸고 있는 저 사내의 가방 안에도, 혹은 스마트폰을 쥔 저 청년의 주머니 속에도, 누군가는 가족을 위해 산 눅눅해진 만두 봉지가, 누군가는 내일을 기약하며 적어 내려간 다짐의 메모가 들어있을 것이다. 우리는 서로 말 한마디 나누지 않는 타인이지만, 이 늦은 밤 같은 열차에 몸을 싣고 각자의 '따스함'을 지켜내기 위해 분투하고 있다는 점에서 투명한 연대감을 공유하고 있었다.


​도시라는 거대한 기계 안에서 우리는 익명의 부품으로 존재하지만, 붕어빵 봉투를 품에 안은 이 순간만큼은 우리 모두가 누군가의 온기를 필요로 하는 연약하고도 뜨거운 인간임을 느꼈다. 덜컹거리는 열차의 진동은 마치 거대한 도시가 내뱉는 심장 박동처럼 느껴졌고, 그 박동에 맞춰 내 품 안의 온기도 조금씩 주변으로 퍼져 나가는 것 같았다.


​나는 봉투를 조금 더 세게 안았다. 얇은 종이 너머로 느껴지는 붕어빵의 형체는 마치 작고 따뜻한 생명체의 박동 같았다. 차가운 현실은 우리를 끊임없이 고립시키려 하지만, 길모퉁이 노점의 전구 불빛과 거기서 피어오르는 수증기, 그리고 천 원짜리 몇 장으로 살 수 있는 이 소박한 위로가 우리를 다시 인간의 영역으로 불러모으고 있었다.


​어느덧 내가 내려야 할 역의 안내방송이 들려왔다. 문이 열리기 전, 나는 옆에 선 청년과 짧은 시선을 나누었다. 그는 여전히 무표정했지만, 아까보다 조금은 부드러워진 눈매로 내 봉투를 한 번 쳐다보고는 가볍게 목례를 하듯 고개를 숙였다. 그것은 이 삭막한 도시의 밤을 함께 버텨내고 있는 전우끼리 나누는 무언의 인사였다.


식지 않는 마음을 식탁 위에 올리며

​지하철역 출구를 빠져나오자, 아까보다 한층 더 깊어진 밤의 정적이 동네 어귀를 감싸고 있었다. 가로등은 드문드문 졸린 눈으로 길 위를 비추고, 아파트 단지의 창문들은 하나둘 불이 꺼져 고요한 거대 요새처럼 서 있었다. 나는 코트 깃을 여미며 품 안의 종이봉투를 다시 한번 매만졌다. 그새 온기는 조금 사그라들었지만, 눅눅해진 종이 너머로 느껴지는 묵직한 질감은 여전히 내 심장 근처를 든든하게 지탱해주고 있었다.


​집으로 향하는 오르막길을 오르며 나는 문득 이 붕어빵의 일생에 대해 생각했다. 차가운 무쇠 틀에 갇혀 뜨거운 불길을 견디고 나서야 비로소 완성되는 존재. 겉은 바삭하게 익어 세상의 풍파를 견디고, 속은 달콤한 앙금을 품어 타인의 허기를 달래주는 그 모습이, 어쩌면 매일 아침 정장을 차려입고 세상이라는 틀 속으로 뛰어드는 우리들의 모습과 닮아 있었다.


​현관문 앞에 서서 번호키를 누르는 손가락이 가볍게 떨렸다. 띠리릭, 경쾌한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자 익숙한 집 안의 공기가 훅 끼쳐왔다. 낮게 켜진 거실 등 아래로 정갈하게 놓인 슬리퍼와 고요한 가구들. 아까의 치열했던 사무실과는 전혀 다른, 무장해제가 허락된 유일한 영토였다.


​나는 식탁 위에 조심스럽게 종이봉투를 내려놓았다. 봉투는 이미 기름기와 수분에 젖어 투명하게 변해 있었지만, 그 안에 담긴 세 마리의 붕어빵은 여전히 은은한 단내를 풍기며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접시를 꺼내 붕어빵을 옮겨 담았다. 전자레인지에 넣어 살짝 데우자, 죽어가던 온기가 다시 살아나며 주방 전체에 고소한 향기가 퍼졌다.


​식탁 의자에 앉아 마지막 붕어빵 한 입을 베어 물었다. 아까 길 위에서 먹었던 첫 맛이 '생존'의 맛이었다면, 지금 이 식탁에서 느끼는 맛은 '위로'의 맛이었다. 차가운 현실 속에서 우리가 길을 잃지 않는 이유는 대단한 성공이나 화려한 보상 때문이 아니다. 퇴근길 우연히 만난 붕어빵 노점의 불빛, 품 안의 온기를 나누고 싶어지는 누군가의 존재, 그리고 하루를 무사히 마친 나 자신에게 건네는 이 소박한 간식 한 조각 같은 것들이 우리를 살아가게 한다.


​"오늘도 고생했어."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나직하게 뱉은 말 한마디가 식탁 위로 흩어졌다. 붕어빵의 팥 앙금은 목을 타고 내려가며 마음의 구석구석에 남은 잔여 피로를 깨끗이 씻어내 주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도시의 야경은 여전히 차갑고 거대했지만, 이제 더 이상 위협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내일 아침, 나는 다시 저 차가운 회색 숲으로 나갈 것이다. 하지만 내 마음속에는 오늘 밤 길거리에서 만난 그 노란 전등 불빛과 따뜻한 붕어빵 한 봉지의 기억이 단단한 방패가 되어줄 것이다.


​식사를 마치고 빈 접시를 치우며 나는 창밖의 푸른 새벽을 내다보았다. 차가운 현실은 결코 변하지 않겠지만, 그 속을 살아가는 우리의 마음은 언제든 따뜻하게 데울 수 있다는 사실을 이제는 안다. 나는 식지 않은 마음을 가슴 깊은 곳에 간직한 채, 내일이라는 또 다른 전투를 위해 고요한 안식의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