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시골집 부뚜막의 누룽지

by 안녕 콩코드

아스팔트 끝에서 만난 흙냄새와 시간의 퇴적

​속도계의 바늘이 0으로 떨어지고, 수백 킬로미터를 달려온 엔진의 거친 숨소리가 잦아들 무렵, 나는 비로소 도시라는 이름의 거대한 환각에서 깨어났다. 차 문을 열자마자 밀려온 것은 매캐한 매연 대신, 비에 젖은 흙과 마른 짚 풀이 뒤섞인 고향 특유의 짙은 공기였다.


​구두 끝에 닿는 흙의 감촉은 낯설고도 다정했다. 대리석 바닥과 아스팔트 위만 디디며 살아온 내 발바닥은 지면의 굴곡을 그대로 전하는 흙길 위에서 잠시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다. 그것은 마치 너무 높이 올라가 버려 발밑이 보이지 않던 내 삶의 위태로움에 대한 대지(大地)의 경고 같기도 했다.


​골목 끝, 이끼 낀 돌담을 끼고 돌자 퇴색된 나무 대문이 고집스럽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시골집이 보였다. 수십 년의 세월 동안 비바람을 맞으며 은회색으로 변해버린 대문은, 세련된 아파트의 스마트 도어락처럼 즉각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삐걱거리는 비명 같은 소리를 내며 열리는 그 문은, 내가 두고 온 시간의 겹을 하나씩 들춰내야만 비로소 안쪽의 공간을 허락했다.


​마당에 들어서자마자 시선이 향한 곳은 집의 심장부라 할 수 있는 부뚜막이었다. 현대식 부엌에 밀려나 이제는 박물관에서나 볼 법한 그 낮은 공간. 가마솥 아래 아궁이에서는 희미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누군가 나를 기다리며 미리 불을 지펴놓았다는 무언의 영접이었다.


​도시에서의 나는 언제나 '새로운 것'과 '빠른 것'에 집착했다. 최신형 스마트폰, 실시간으로 변하는 주가 그래프, 남들보다 앞서가야 한다는 강박이 나를 숨 가쁘게 몰아붙였다. 하지만 이곳의 시간은 가마솥 아래 타오르는 장작불처럼 느릿하고 정직했다. 나무가 타서 숯이 되고, 그 숯이 다시 재가 되는 순리를 거스르지 않는 시간. 그 정적인 풍경 앞에 서자, 내가 짊어지고 온 화려한 명함들과 무거운 책임감들이 한낱 덧없는 연기처럼 느껴졌다.


​나는 가방을 마루 끝에 던져두고 부뚜막 근처로 다가갔다. 그을음이 앉은 벽면과 반질반질하게 닦인 솥뚜껑. 거기엔 유행에 뒤처질까 전전긍긍하던 도시인의 불안이 끼어들 틈이 없었다. 가마솥 안에서 무언가 구수하게 익어가는 냄새가 났다. 밥알이 눌어붙으며 내는 그 소박하고도 깊은 향기—누룽지의 냄새였다.


​그것은 변하지 않는 가치에 대한 가장 정직한 기록이었다. 쌀이 밥이 되고, 그 밥이 마지막까지 열기를 견뎌내어 스스로를 태우며 완성하는 최후의 정수. 나는 부뚜막 앞에 쪼그려 앉아, 장작불이 내뿜는 붉은 온기를 온몸으로 받아들였다. 도시의 냉난방기에서는 결코 느낄 수 없는, 생명을 품은 불꽃의 온기였다. 이 낡고 오래된 공간에서, 나는 비로소 내가 어디서 왔는지, 그리고 무엇을 위해 그토록 달리고 있었는지를 스스로에게 묻기 시작했다.


무쇠 솥바닥에 새겨진 할머니의 경전

​무거운 무쇠 솥뚜껑을 양손으로 받쳐 들자, 묵직한 금속의 저항감이 손목을 타고 전해졌다. '드르륵' 소리를 내며 열린 솥 안에서는 뽀얀 수증기가 한바탕 축제처럼 피어올랐다. 안개가 걷힌 솥 바닥에는 황금빛으로 잘 구워진 누룽지가 마치 대지의 살점처럼 단단하고도 정갈하게 붙어 있었다.


​부뚜막 옆에 놓인 무딘 쇠주걱을 들었다. 서늘한 솥 바닥을 긁어낼 때 나는 '벅벅' 소리는 도시의 어떤 세련된 음악보다도 리드미컬했다. 주걱 끝에 전해지는 누룽지의 저항감은 삶의 바닥을 지키는 존재들이 내는 단단한 고집 같았다. 한 귀퉁이를 조심스럽게 들어 올리자, 마침내 솥에서 떨어져 나온 누룽지 조각들이 투박한 그릇 위로 툭툭 떨어졌다.


​나는 그중 가장 두툼한 조각 하나를 입에 넣었다.


​'오도독.'


​첫 맛은 딱딱하고 무심했다. 하지만 이내 혀 위에서 침과 섞이며 퍼지는 고소함은 상상을 초월하는 깊이를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설탕의 인위적인 달콤함이나 소금의 자극적인 맛과는 차원이 달랐다. 쌀알이 뜨거운 불길 위에서 스스로를 태우고 깎아내며 마침내 도달한, 고난 끝에 얻은 순수한 결실의 맛이었다.


​눈을 감자, 아득한 유년의 풍경이 누룽지의 고소한 향기를 타고 흘러 들어왔다. 이 부뚜막에는 늘 할머니가 계셨다. 굽은 등을 더 굽혀 아궁이에 불을 때시던 할머니는, 밥솥에서 가장 좋은 쌀밥은 자식과 손주들에게 퍼주고 당신은 늘 이 솥 바닥에 남은 누룽지를 긁어 드셨다.


​어린 마음에는 그게 그저 할머니가 누룽지를 좋아해서인 줄만 알았다. 하지만 도시에서 닳고 닳아 다시 돌아온 지금에서야 나는 깨닫는다. 누룽지는 버려진 찌꺼기가 아니라, 가장 뜨거운 곳에서 가족의 허기를 채우고 남은 '마지막 사랑'의 증거였다는 것을. 솥 바닥에 눌어붙어 타버릴지언정, 위에 얹힌 밥알들이 희고 고운 쌀밥이 되도록 온몸으로 열기를 받아낸 희생의 기록이었음을.


​"얘야, 누룽지는 천천히 씹어야 제맛이 난다."


​환청처럼 들려오는 할머니의 목소리에 씹는 속도를 늦추었다. 도시의 식탁은 늘 급했다. 샌드위치를 우물거리며 이메일을 확인하고, 커피를 들이켜며 회의 자료를 넘기던 내게 '씹는다'는 행위는 그저 연료 보충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 누룽지는 허락하지 않는다. 급하게 삼키려 하면 목을 찌르고, 대충 씹으면 본연의 고소함을 내어주지 않는다. 천천히, 아주 오래도록 저작(咀嚼)해야만 비로소 곡물이 품은 깊은 평화에 가닿을 수 있다.


​누룽지를 씹는 동안 내 마음속에 쌓여 있던 독기들이 조금씩 부서져 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높은 직급, 화려한 인맥, 남들보다 화려한 연봉 같은 것들이 사실은 가마솥 위의 뽀얀 김처럼 금방 사라질 것들이었음을, 정작 나를 지탱해주는 힘은 이 솥 바닥처럼 낮고 단단한 곳에 있었음을 누룽지는 투박한 맛으로 웅변하고 있었다.


​부뚜막 바닥에 주저앉아 고개를 드니, 천장에 매달린 메주 사이로 오후의 햇살이 긴 창처럼 내리쬐고 있었다. 밖은 여전히 춥고 세상은 여전히 시끄럽겠지만, 적어도 이 부뚜막 안에서 누룽지를 씹는 이 순간만큼은 나는 세상에서 가장 안전하고 평온한 인간이었다. 할머니가 긁어주던 그 투박한 누룽지 조각 속에, 내가 잃어버렸던 삶의 경전(經典)이 오롯이 새겨져 있었다.


영혼의 갈증을 씻어내는 맑은 숭늉 한 사발

​바닥까지 닥닥 긁어낸 가마솥은 이제 그을린 맨살을 드러내고 있었다. 나는 양동이에 담긴 시원한 샘물을 솥 안으로 쏟아부었다. '촤아-' 하는 소리와 함께 남아있던 열기가 마지막 비명을 지르며 하얀 수증기를 뿜어냈다. 아궁이 속에서 아직 사그라지지 않은 장작불을 한데 모으고, 마른 나뭇가지 몇 개를 더 얹었다. 이제 기다림의 시간이다.


​솥 안의 물이 서서히 달궈지며 바닥에 붙어있던 미세한 누룽지 조각들이 물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맑았던 물은 점차 연한 보랏빛이 감도는 갈색으로 변해갔다. 그것은 삶의 찌꺼기가 아니라, 곡식이 불과 물을 만나 자아낼 수 있는 가장 깊고 맑은 '정수'였다. 솥뚜껑 사이로 구수한 김이 새어 나오기 시작할 무렵, 나는 커다란 사발에 숭늉을 가득 펐다.


​사발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거친 옹기그릇의 표면을 통해 전해지는 온기는 찌릿할 정도로 뜨거웠지만, 기분 좋은 안도감을 주었다. 나는 후후 불며 그 맑은 액체를 한 모금 들이켰다.


​"아..."


​낮은 감탄사가 절로 새어 나왔다. 그것은 도시의 카페에서 마시던 자극적인 아메리카노나, 스트레스를 잊기 위해 들이켰던 차가운 술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액체였다. 숭늉은 목줄기를 타고 내려가며 내 안에 켜켜이 쌓여 있던 독소들을 씻어내기 시작했다. 누군가를 이기기 위해 품었던 날 선 마음, 인정받지 못해 괴로워했던 자격지심, 그리고 화려한 포장지 속에 감춰두었던 초라한 자기비하까지.


​숭늉의 맛은 '용서'의 맛이었다. 가마솥 바닥에서 타버리고 눌어붙었던 고통의 흔적들이 물을 만나 부드러워지고, 마침내 타인을 이롭게 하는 따뜻한 음료가 되듯, 내 삶의 상처들도 이 맑은 국물 안에서는 더 이상 날카롭지 않았다. 고난을 겪어본 사람만이 낼 수 있는 깊고 그윽한 맛. 숭늉은 나에게 말하고 있었다. 타버린 것 같아도 괜찮다고, 그을린 자국조차 결국은 누군가의 영혼을 데워줄 깊은 맛이 된다고.


​나는 사발 바닥이 보일 때까지 숭늉을 마셨다. 도시에서의 갈증은 늘 무언가를 채워야 해소되는 종류의 것이었다. 더 많은 돈, 더 높은 명예, 더 넓은 집. 하지만 그럴수록 갈증은 지독해질 뿐이었다. 그러나 이 낡은 부뚜막에서 마시는 숭늉 한 사발은 오히려 나를 '비워냄'으로써 갈증을 해소해주었다.


​사발을 내려놓자 온몸에 기분 좋은 땀이 배어 나왔다. 마음의 응어리가 녹아내린 자리에 고향의 평화가 고이기 시작했다. 창밖으로는 어느덧 노을이 시골집 마당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도시의 인공 조명이 만들어내던 가짜 황금빛과는 비교할 수 없는, 대지가 스스로 내뿜는 장엄한 빛이었다.


​나는 비로소 고개를 들어 부엌 천장의 그을린 서까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수많은 세월 동안 연기를 먹고 검게 변한 저 나무들은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인생이라는 가마솥 안에서 우리가 겪는 뜨거운 불길은 우리를 태워 없애려는 것이 아니라, 가장 깊은 맛을 내는 누룽지와 숭늉으로 완성하기 위한 필연적인 과정이었음을. 숭늉 한 사발에 담긴 이 소박한 진리를 깨닫는 순간, 내 영혼의 지독했던 가뭄은 비로소 끝이 났다.


다시 세상을 향해 띄우는 구수한 약속

​비워진 사발을 개숫물에 씻어 엎어놓고 나니, 부엌 안에는 아궁이에서 남은 장작이 타닥거리며 타 들어가는 소리만이 남았다. 나는 부뚜막 가장자리에 묻은 흰 쌀가루 한 점까지 손바닥으로 정성스레 훔쳐냈다. 도시의 테이블은 언제나 다음 사람을 위해 서둘러 닦여졌지만, 이 부뚜막은 오직 나라는 한 사람의 상처를 닦아내기 위해 온종일 기다려준 듯한 온기를 품고 있었다.


​부엌을 나와 툇마루에 걸터앉았다. 어느덧 하늘은 짙은 남색으로 내려앉았고, 도시에서는 결코 볼 수 없던 별들이 하나둘 고개를 내밀었다. 저 별들은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그리고 내가 도시의 소음 속에서 길을 잃고 방황하던 그 밤에도 변함없이 이 시골집 마당을 비추고 있었을 것이다. 변하는 것은 언제나 나였을 뿐, 고향은 단 한 번도 나를 재촉하거나 변덕스럽게 대하지 않았다.


​나는 안방으로 들어가 빳빳하게 풀이 죽은 이불을 펴고 누웠다. 아궁이의 열기가 구들장을 타고 올라와 등을 따스하게 지졌다. 도시의 아파트에서 느끼던 건조한 온풍기와는 차원이 다른, 땅의 온기였다. 눈을 감자 입안에 감돌던 누룽지의 구수함이 온몸의 혈관을 타고 퍼지는 듯했다. 그 맛은 이제 단순한 기억이 아니라, 내일의 나를 지탱해 줄 단단한 뼈대가 되어 있었다.


​"그래, 다시 시작할 수 있겠다."


​어둠 속에서 내뱉은 혼잣말은 더 이상 떨리지 않았다. 내일 아침이면 나는 다시 시동을 걸고 아스팔트 길을 달려 회색빛 도시로 돌아갈 것이다. 여전히 회의실에는 날 선 반박들이 오갈 것이고, 모니터 속 숫지들은 나를 압박하겠지만, 이제 나는 안다. 내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는 언제든 돌아와 누룽지를 긁어먹을 수 있는 이 낡은 부뚜막이 살아 숨 쉬고 있다는 것을.


​도시의 삶이 나를 뜨거운 불길 위에 올려놓고 까맣게 태우려 할 때마다, 나는 오늘 마신 맑은 숭늉의 온기를 떠올릴 것이다. 타버린 부분조차 깊은 맛을 내기 위한 과정임을 믿는다면, 세상의 어떤 냉대도 나를 완전히 무너뜨릴 수는 없다. 고향은 나에게 '성공'하는 법이 아니라, '견디고 정화되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다음 날 새벽, 물안개가 자욱한 길을 따라 마을을 나서며 나는 백미러에 비친 시골집의 작아지는 모습을 눈에 담았다.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연기가 마치 잘 다녀오라는 손짓처럼 보였다. 나는 차창을 열고 고향의 흙내음을 마지막으로 깊게 들이마셨다.


​주머니 속에는 할머니가 싸주신 신문지에 둘러싸인 누룽지 한 봉지가 묵직하게 들어 있었다. 이것은 도시의 빌딩 숲에서 내가 인간임을 잊지 않게 해줄 영혼의 부적이자, 가장 투박하지만 가장 확실한 위로였다. 나는 가속 페달을 밟았다. 이제 내 앞의 길은 더 이상 막막한 경쟁의 전장이 아니었다. 그것은 구수한 누룽지 향기를 품고 다시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뜨겁고도 평화로운 복귀의 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