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함의 폭력, 그리고 외경이라는 이름의 면죄부

by 안녕 콩코드

​우리는 흔히 '공정'과 '평등'을 노래한다. 하지만 그 아름다운 가치들이 때로는 집단이라는 이름 아래 교묘한 폭력으로 변질되기도 한다. 나무 아래 모여 낮은 곳의 열매만 핥던 소들의 무리, 그리고 그들 중 하나가 돌을 굴려와 남들보다 한 발 먼저 열매에 손을 뻗었을 때 벌어진 '응징'. 이 기묘하고도 서늘한 우화는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뼈아픈 질문을 던진다. 왜 우리는 동료의 성취에는 돌을 던지면서, 압도적인 타자의 권능 앞에는 무릎을 꿇는가.


돌을 굴린 소, '다름'이라는 죄목

​배고픈 소들이 나무 아래 모여 있다. 모두가 고개를 치켜들고 열매를 갈구하지만, 열매는 야속하게도 높은 곳에 매달려 있다. 이때 한 마리의 소가 행동한다. 그는 단순히 입을 벌리고 기다리는 대신, 주변의 커다란 돌을 굴려오는 수고를 감내한다. 그리고 그 돌 위에 올라가 마침내 달콤한 열매를 한 입 베어 문다.


​상식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이 소는 '혁신가'다. 도구를 활용하고 환경을 극복한 지혜로운 존재다. 만약 이 집단이 건강했다면, 다른 소들은 그를 본받아 각자 돌을 찾아 나서거나, 혹은 그에게 열매를 나누어 달라고 협상을 제안했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무리는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응징'을 가했다.


​여기서 우리는 '동족 혐오'의 본질을 목격한다. 무리 속의 소들에게 그 돌 위에 올라간 동료는 더 이상 배고픔을 해결할 희망이 아니었다. 그는 '우리와 같아야만 하는' 평등의 질서를 깨뜨린 반역자였다. "네가 감히 우리와 같은 소이면서 어떻게 우리보다 높이 서느냐"는 질투 섞인 분노가 정의의 탈을 쓰고 쏟아진다. 집단의 평균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는 종종 집단 전체에 대한 모욕으로 받아들여진다. 낙오된 자의 슬픔보다 앞서나가는 자에 대한 증오가 더 큰 힘을 발휘하는 순간, 공동체의 진보는 멈춘다.



코끼리의 등장, 거부할 수 없는 압도

​그 소란스러운 응징의 현장에 코끼리가 나타난다. 코끼리는 돌을 굴릴 필요도 없다. 그저 타고난 거대한 몸과 긴 코를 이용해 가볍게 열매를 딴다. 소들이 그토록 갈구하던, 그리고 동료를 피투성이로 만들면서까지 지키려 했던 그 열매를 코끼리는 너무나 손쉽게 취한다.


​이때 소들의 반응은 반전이다. 분노는 온데간데없고 칭찬과 찬양이 쏟아진다. 방금 전까지 동료 소에게 뿔을 휘두르던 기세는 사라지고, 코끼리의 위엄 앞에 고개를 숙인다. 왜일까? 코끼리는 처음부터 '우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의 심리는 기묘하다. 나보다 조금 나은 동료에게는 시기심을 느끼지만, 도저히 범접할 수 없는 압도적인 존재에게는 경외감을 느낀다. 코끼리의 성공은 소들의 자존감을 해치지 않는다. "그는 코끼리니까 당연히 할 수 있는 일이야"라는 자기합리화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코끼리를 찬양함으로써 소들은 자신의 무능함을 '종의 차이'로 치부하며 마음의 평온을 얻는다. 이는 경쟁을 포기한 자들이 선택하는 가장 비겁한 안식처다.


​우리 안의 '게를 담은 양동이'

​서구에는 '양동이 속의 게(Crab Mentality)'라는 말이 있다. 양동이에서 탈출하려는 게가 있으면 다른 게들이 집게로 그 게를 끌어내려 결국 모두가 죽게 된다는 비극적인 비유다. 소들의 응징 역시 이와 다르지 않다.


​우리는 일상에서 끊임없이 '돌을 굴리는 소'를 만난다. 남들보다 일찍 출근해 업무 프로세스를 개선하려는 동료, 모두가 포기한 프로젝트에 매달려 해법을 찾아내는 친구, 혹은 기존의 관습에 의문을 제기하며 새로운 길을 제시하는 이들. 그들이 성취를 맛보려는 찰나, 주변에서는 "유난 떤다", "혼자 잘난 척한다", "조직의 화합을 해친다"는 비난이 화살처럼 날아온다.


​그 비난의 이면에는 공포가 숨어 있다. 저 소가 열매를 따는 순간, 가만히 서 있던 나의 게으름이 증명될까 봐 두려운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를 다시 진흙탕으로 끌어내린다. 모두가 굶을지언정 나보다 배부른 동료는 참을 수 없다는 심보, 이것이 바로 우리가 '평등'이라는 이름으로 저지르는 가장 흔한 죄악이다.


숭배라는 이름의 도피

​반면, 우리가 재벌가나 천재적인 예술가, 혹은 세계적인 운동선수들에게 보내는 열광은 어떤가. 그들은 소 무리 속의 코끼리다. 우리는 그들의 성공을 찬양하며 마치 내가 성공한 듯한 대리만족을 느낀다. 하지만 정작 내 곁에서 묵묵히 노력해 작은 결실을 맺은 이웃에게는 인색하다.


​코끼리를 찬양하는 소들의 목소리에는 일종의 '면죄부'가 섞여 있다. "우리는 소라서 못 하는 게 당연해. 저 위대한 코끼리처럼 될 수 없으니 우리는 여기서 이대로 있어도 괜찮아." 이 논리는 성장을 멈추게 하는 독약이다. 코끼리를 숭배하는 행위는 결국 스스로를 보잘것없는 존재로 박제하는 일과 같다.


​진정한 성장은 코끼리를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돌을 굴려온 동료의 손을 잡아주는 데서 시작된다. 그가 굴려온 돌 위에 나도 올라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달라고 말하는 용기, 혹은 나도 나만의 돌을 굴려오겠다는 의지가 필요하다.


다시, 나무 아래에서

​우화의 끝에서 소들은 여전히 배가 고프다. 코끼리는 열매를 따 먹고 유유히 사라질 것이고, 응징당한 소는 상처 입어 다시는 돌을 굴리지 않을 것이다. 남은 소들은 여전히 높은 곳의 열매를 바라보며 코끼리가 다시 오기만을 기도하거나, 혹은 누군가 또 돌을 굴려오지는 않는지 감시하며 시간을 보낼 것이다.


​이 우울한 풍경을 바꿀 방법은 단 하나뿐이다. 무리 중 누군가 돌을 굴려올 때, 뿔을 세우는 대신 박수를 보내는 것이다. 그의 성공이 나의 실패가 아님을 인정하는 성숙함이 필요하다. 타인의 성취를 나의 동기부여로 삼는 '건강한 질투'는 우리를 코끼리보다 더 높은 곳으로 이끌 수 있다.


​우리는 지금 어떤 소인가? 돌을 굴리고 있는가, 아니면 돌을 굴리는 동료를 끌어내리고 있는가. 그것도 아니라면 멀리 있는 코끼리만 바라보며 헛된 찬양을 내뱉고 있는가. 나무 아래의 비극은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사회 곳곳에서 반복되고 있다. 이제는 그 돌을 응징의 도구가 아닌, 모두가 함께 딛고 올라설 디딤돌로 바꿔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