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통 붕어빵의 철학

by 안녕 콩코드


찬 바람이 몰고 온 노란 유혹, 삼천 원의 실존

​계절은 달력이 아니라 코끝이 먼저 알아챈다. 달력의 숫자가 아무리 겨울의 문턱을 가리켜도, 외투 깃을 파고드는 바람에 실린 '냄새'가 바뀌지 않으면 계절은 아직 저만치 머물러 있는 법이다. 그러다 어느 날 퇴근길, 차가운 공기의 입자 사이로 달큰하면서도 고소한, 말로 형언할 수 없는 밀가루 익는 향기가 스며들기 시작하면 우리는 비로소 겨울의 정중앙에 서 있음을 실감한다. 회색빛 도시의 모퉁이, 가로등 불빛도 비껴가는 어둑한 골목 어귀에는 어김없이 작고 낡은 수레 하나가 자리를 잡는다. 뿌연 수증기를 연신 내뿜으며 침묵 속에 서 있는 그곳, 바로 우리들의 겨울철 안식처인 붕어빵 노점이다.


​오늘날의 도시는 '비접촉'과 '비대면'의 견고한 성벽 위에 세워져 있다. 스마트폰 액정을 가볍게 두드리거나 카드 한 장을 탭하는 행위만으로 우리는 세상의 모든 재화와 교환한다. 숫자로만 존재하는 화폐의 이동 속에서 우리는 물질이 가진 특유의 저항감과 질감을 잃어버렸다. 내가 무엇을 내어주고 무엇을 얻었는지 체감하기도 전에 거래는 종료되고, 남는 것은 영수증이라는 이름의 종이 조각뿐이다. 이 효율적이고 매끄러운 디지털의 질서 속에서 인간의 온기는 설 자리를 잃고 표류한다.


​하지만 시장통 붕어빵 노점 앞에 서는 순간, 이 현대적 질서는 잠시 작동을 멈춘다. 이곳은 여전히 '현금'이라는 구시대적 유물이 힘을 발휘하는 성역이다. 코트 안주머니 깊숙한 곳, 세탁소에 맡기기 전 우연히 발견했거나 혹은 오늘을 위해 일부러 챙겨두었던 꼬깃꼬깃한 천 원짜리 지폐 세 장. 나는 이 '가슴 속 삼천 원'을 단순한 비상금이 아니라, 겨울을 나기 위한 최소한의 존엄이자 실존적 보험이라 부르고 싶다.


​삼천 원은 대형 프랜차이즈 카페의 아메리카노 한 잔 값에도 미치지 못하는 가벼운 금액이다. 하지만 붕어빵 노점에서의 삼천 원은 그 무게가 다르다. 그것은 찬 바람을 뚫고 집으로 돌아가는 고단한 발걸음을 멈추게 하고, 낯선 타인과 나란히 서서 쇠틀이 뒤집히는 소리를 견디게 하는 '기다림의 입장권'이다. 우리는 그 삼천 원을 건네며 단순히 밀가루 반죽을 사는 것이 아니다. 지독하게 차가운 도시의 온도 속에서, 내 주머니 속에 누군가를 위해 혹은 나를 위해 쓸 수 있는 '따뜻한 여지'가 남아 있다는 안도감을 구매하는 것이다.


​노점의 주인장은 말을 아낀다. 대신 낡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지직거리는 음악 소리와, 쇠틀이 부딪히는 둔탁한 금속음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나는 붕어빵이 구워지는 시간을 묵묵히 지켜본다. 쇠틀 밖으로 삐져나와 바삭하게 익어가는 반죽의 '날개'들을 보며, 문득 생각한다. 우리는 언제부터 이토록 사소한 풍경에 마음을 빼앗기게 된 것일까. 아마도 그것은 우리가 잃어버린 '정직한 노동의 냄새' 때문일 것이다. 불길 위에서 제 몸을 익혀 누군가의 허기를 달래주는 저 노란 물고기들의 행렬은, 화려한 네온사인보다 훨씬 더 강렬한 생명력을 내뿜는다.


​가슴 속 삼천 원의 무게는 정직하다. 그것은 디지털 숫자가 줄 수 없는 물리적 안정감을 준다. 손끝에 잡히는 지폐의 서늘한 감촉이 주인장의 따뜻한 손을 거쳐 눅눅하고 뜨거운 종이봉투로 변환될 때, 비로소 우리는 '교환'이라는 행위 이면에 숨겨진 '인정'의 가치를 발견한다. 거스름돈을 주고받으며 나누는 짤막한 인사, 봉투 틈새로 피어오르는 달큰한 수증기. 이 모든 것들이 어우러져 시장통의 밤은 비로소 완성된다. 나는 이제 그 소중한 삼천 원을 건네고, 내 몫의 온기를 손에 넣으려 한다. 찬 바람이 불수록 더욱 선명해지는, 그 노란 유혹의 정체는 결국 사람과 사람 사이를 잇는 낮은 온도의 사랑이었음을 고백하면서 말이다.


쇠틀 안에서 견디는 뜨거운 변신, 연대의 질감

​노점의 주인장은 마치 숙련된 지휘자나 연금술사처럼 움직인다. 그는 쓸데없는 말을 아끼는 대신, 리드미컬하게 무거운 쇠틀을 뒤집으며 침묵의 서사를 써 내려간다. 주전자의 좁은 입구에서 쏟아지는 하얀 반죽물은 아무런 형태도, 의지도 없는 무채색의 액체에 불과하다. 그것은 아직 무엇도 되지 못한 가능성의 덩어리이자, 외부의 자극 없이는 결코 단단해질 수 없는 연약한 존재다. 그러나 섭씨 수백 도에 달하는 뜨거운 불길 위, 붕어 모양의 시커먼 형틀에 닿는 순간, 반죽은 비명을 지르듯 ‘치이익’ 소리를 내며 제 몸을 굳히기 시작한다.


​여기서 가장 극적인 지점은 ‘팥’이 안치되는 순간이다. 주인장은 나무 주걱으로 거무스름하고 달큰한 팥 앙금을 듬뿍 떠서 반죽의 정중앙에 내려놓는다. 이것은 붕어빵의 영혼을 채우는 의식과 같다. 너무 적으면 빈약한 맛에 실망하고, 너무 과하면 뜨거운 압력을 이기지 못해 옆구리가 터져버리는 역설. 이것은 마치 우리네 인생의 ‘중심 잡기’와 소름 끼치도록 닮아 있다. 욕망이 너무 과하면 삶의 형태가 일그러지고, 내면의 채움이 너무 부실하면 겉모습만 번지르르한 빈 껍데기가 되고 만다. 붕어빵 한 마리가 완성되기 위해서는, 외형을 지탱하는 밀가루의 인내와 내면을 채우는 팥의 겸손함이 완벽한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닫힌 쇠틀 안에서 반죽은 지독한 열기를 견딘다. 밖에서는 보이지 않는 그 폐쇄된 어둠 속에서, 흐물거리던 액체는 바삭한 질감을 얻고, 차가웠던 팥은 뜨거운 열정을 품는다. 우리는 결과물인 노란 붕어빵만을 보지만, 정작 붕어빵의 가치를 결정짓는 것은 그 좁고 뜨거운 틀 안에서 보낸 인고의 시간이다. 작가인 내가 원고지 앞에서 문장과 씨름하며 나를 깎아내고 채우는 시간 또한, 이 쇠틀 안의 열기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설익은 문장은 독자의 마음을 체하게 만들고, 너무 태워버린 사유는 쓴맛만을 남기기에, 나는 오늘도 적정 온도를 찾기 위해 마음의 불꽃을 세밀하게 조절한다.


​재미있는 것은 쇠틀 밖으로 삐져나온 ‘지느러미’들이다. 주인장은 굳이 그 불규칙한 조각들을 깔끔하게 잘라내지 않는다. 오히려 그 ‘덤’으로 붙은 바삭한 조각들이 붕어빵의 식감을 완성하는 별미가 된다. 규격화된 공장의 빵들이 도저히 따라올 수 없는 이 투박한 개성들. 그것은 인생이라는 거친 틀을 통과하며 우리가 얻게 된 상처이자 흔적들이다. 남들과 똑같은 모양이 되기 위해 애쓰기보다, 시련의 흔적을 바삭한 훈장으로 남겨둔 붕어빵의 태도는 어쩐지 우리를 안심시킨다. “조금 모나고 비뚤어져도 괜찮다, 그것이 너를 더 맛있게 만들 테니까”라고 말해주는 것만 같다.


​붕어빵 노점 주위로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든다. 서로 모르는 타인들이지만, 쇠틀이 뒤집히는 소리와 달콤한 향기 속에서 묘한 유대감을 공유한다. 같은 온도의 기다림을 나누는 것, 그것은 삭막한 도시에서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가장 낮은 단계의 연대다. 주인장이 쇠틀을 열 때 쏟아져 나오는 하얀 김은, 그간의 열기를 견뎌낸 붕어빵들이 내뱉는 안도의 한숨이자, 기다리던 이들에게 건네는 따뜻한 환대다. 노란 빛깔로 잘 구워진 붕어빵들이 나란히 놓일 때, 우리는 비로소 알게 된다. 평범했던 반죽이 뜨거운 시간을 거쳐 누군가의 가슴을 데울 위로로 변모했음을. 이제 나는 주인장의 손끝에서 완성된 그 단단하고도 부드러운 존재를 향해 손을 뻗는다.


디지털 숫자로는 환산할 수 없는 온기의 가치

​이제 '가슴 속 삼천 원'이 빚어낸 실존적 무게를 논할 차례다. 주인장이 갓 구워낸 붕어빵 여섯 마리를 누런 종이봉투에 담아 건네는 순간, 내 손바닥을 타고 전해지는 그 눅눅하고도 강렬한 열기는 단순한 물리적 온도를 넘어선다. 봉투의 입구를 여미지 않은 채, 나는 그것을 코트 안쪽 가슴팍 깊숙한 곳으로 밀어 넣는다. 그 찰나, 차갑게 식어있던 나의 흉골 주위로 서서히 훈풍이 불기 시작한다. 이것은 비대면 결제가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물질의 감각’이 선사하는 경이로운 회복이다.


​우리는 모든 가치가 데이터로 치환되는 ‘0과 1’의 세계를 산다. 카드를 긁거나 스마트폰을 탭하는 행위에는 화폐의 물리적 저항감이 없다. 숫자는 허공을 떠돌다 사라지고, 우리는 내가 무엇을 내어주고 무엇을 얻었는지 체감하지 못한 채 소비의 관성에 젖어 든다. 디지털의 세계에서 삼천 원은 그저 클릭 한 번에 사라지는 휘발성 데이터에 불과하지만, 가슴팍에 품은 이 붕어빵 봉투는 내 걸음걸이의 속도와 호흡의 깊이를 바꾼다. 가슴으로 전해지는 이 뜨거운 압박은 나에게 끊임없이 경고한다. “여기에 살아있는 온기가 있으니, 식기 전에 서둘러야 한다”고 말이다.


​붕어빵 봉투에서 새어 나오는 수증기는 안경알을 뿌옇게 흐리게 하지만, 역설적으로 우리 내면의 시야는 맑게 깨운다. 만원 지하철의 소음과 고단했던 직장 상사의 꾸지람, 그리고 오늘 하루 나를 괴롭혔던 모든 뾰족한 감정들이 이 붕어빵 봉투의 온기 앞에서는 조금씩 흐릿해진다. 이것은 일종의 ‘정서적 복사열’이다. 내가 품은 온기가 나의 피부를 데우고, 그 데워진 마음이 다시 주변을 향해 부드러운 빛을 내뿜는다. 붕어빵은 입으로 들어오기 전, 이미 품 안에서 우리의 차가운 이성을 녹이고 감정의 온도를 인간 본연의 체온인 36.5도 위로 끌어올린다.


​길가에 서서 혼자 홀랑 먹어버릴 수도 있지만, 굳이 품에 안고 집까지 가져가는 이유는 그 온기를 ‘나눔’이라는 이름으로 완성하고 싶어서다. 붕어빵은 혼자 먹을 때보다 누군가와 나누어 베어 물 때 그 맛의 농도가 짙어진다. 봉투 속에서 서로 몸을 맞대고 열기를 나누는 여섯 마리의 붕어처럼, 우리 또한 이 작은 간식을 매개로 서로의 안부를 묻고 고단함을 다독인다. 현관문을 열고 “붕어빵 사 왔다”라고 외치는 순간, 집안의 공기는 순식간에 활기를 띤다. 김이 살짝 서려 눅눅해진 붕어빵을 나누어 먹으며 나누는 소소한 대화들. 삼천 원이라는 가벼운 금액으로 우리는 가족의 웃음과 평온한 저녁이라는, 세상에서 가장 값비싼 사치를 누리는 셈이다.


​이 지점에서 붕어빵은 단순한 간식을 넘어, 사람과 사람 사이를 잇는 붉은 인주 같은 인장이 된다.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흔한 재료로, 가장 뜨겁게 우려낸 이 소박한 인정이 식탁 위에 꽃처럼 피어난다. 화려한 만찬이 주는 포만감과는 비교할 수 없는, 영혼의 깊은 곳을 채우는 묵직한 포만감. 그것이 바로 우리가 삼천 원이라는 작은 돈에 기대어 지켜내고 싶었던 인간의 품격이다. 찬 바람을 뚫고 도착한 집에서, 붕어빵 봉투를 여는 그 찰나의 전율은 오늘 하루를 살아낸 우리 모두에게 주어지는 가장 따뜻한 훈장과도 같다.


가슴 속 삼천 원이 지켜낸 품격

​겨울이 지나고 찬 바람이 잦아들면, 시장통 한구석을 지키던 그 낡은 수레도 어느덧 자취를 감출 것이다. 하지만 우리 가슴 속에 남아 있는 '삼천 원의 기억'은 계절이 바뀌어도 쉽게 바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가 아무리 팍팍하고 비정한 세상을 살아내더라도, 내 안의 가장 깊숙한 곳에 타인을 향해 건넬 수 있는 최소한의 온정과 여유를 멸실하지 않았다는 실존적 증거이기 때문이다. 삼천 원이라는 가벼운 화폐의 무게가, 역설적으로 우리 삶의 가장 묵직한 품격을 지탱하고 있었음을 우리는 붕어빵 한 봉지를 비워내고서야 깨닫는다.


​나는 나의 문장들이 당신의 가슴 속에 품은 꼬깃꼬깃한 삼천 원처럼 느껴지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수억 원을 호가하는 화려한 보석이나 눈을 멀게 하는 찬란한 성취는 아닐지라도, 차가운 눈보라가 치는 퇴근길에 우연히 마주쳐 당신의 시린 손마디를 데워줄 수 있는 그런 글. 한 문장마다 수 천 자의 정성을 꾹꾹 눌러 담아 긴 호흡의 글을 마다하지 않는 이유는, 화려한 미사여구로 독자를 압도하거나 지적 우월감을 뽐내기 위함이 아니다. 오로지 그 문장이 내뿜는 소박한 잔열이 당신의 고단한 사유를 잠시 쉬게 하고, 얼어붙은 마음의 빗장을 녹여 기꺼이 세상과 다시 교환하고 싶은 '다정한 용기'가 되길 바라기 때문이다.


​붕어빵 노점의 불빛이 꺼진 뒤에도 그 자리에 남은 인주의 붉은 흔적처럼, 우리의 삶도 누군가에게 지워지지 않는 온기를 남겨야 한다. 효율과 속도라는 거대한 톱니바퀴에 맞물려 돌아가느라 내가 나를 잃어버릴 것 같은 순간마다, 주머니 속 삼천 원의 감촉을 떠올려보자. 그것은 당신이 언제든 누군가에게 노란 물고기 한 마리의 위로를 선물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고귀한 신호다. 붕어빵의 달콤한 팥 앙금이 겉모양보다 더 중요한 본질이듯, 우리 삶의 구석구석에 숨겨진 소박한 인정들이 결국 이 차가운 지구를 조금 더 살 만한 온도로 유지하고 있음을 나는 믿는다.


​현관문 밖으로 다시 찬 바람 소리가 들려온다. 하지만 붕어빵 한 봉지로 온 가족이 나누어 가진 이 훈훈한 여운은 오늘 밤의 잠자리를 유난히 포근하게 적셔줄 것이다. 나는 이제 창문을 닫고, 다음 화에서 당신의 영혼을 채워줄 또 다른 '삶의 재료'를 준비하려 한다. 노점의 주인장이 정성을 다해 쇠틀을 뒤집듯, 나 또한 문장의 앞뒤를 살피며 가장 노릇하고 구수한 사유를 구워내겠다. 당신의 가슴 속 삼천 원이 헛되지 않도록, 나의 펜 끝은 늘 낮은 곳의 온기를 향해 있을 것이다.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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