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인이 말을 걸어왔다. 카페에서였다. 힌두사상의 핵심은 ○○○이래. (건성으로 들은 탓이다. 말의 취지조차 인용하지 못하다니.) 어떤 말이든 덧붙여야 할 것 같아 쓰던 글을 멈추고 지인을 바라보았다. 동양의 종교는 대부분 윤회를 근간으로 하고 있어. 인도도 마찬가지였겠지.
역사관을 예로 들면 탄생을 거쳐 소멸하는 대단히 단선적인 역사관과 달리 동양의 역사관은 소멸 이후의 세계를 예정하고 그 틀 안에서 현 삶을 규정하는 한편 재탄생이라는 순환 구도로 죽음에 내장된 소멸을 다른 관점에서 이해한다. 영화에 비유하면 열린 결말, 열린 실마리라는 대단히 느슨한 미장센을 의도한 것. 반대로 이데올로기 차원에서 윤회가 현실 순응 혹은 자족적 수단으로 기능하는 측면을 무시하기 어렵다.
단선적인 역사관에선 인간이 직면한 고통스러운 장면이 투쟁을 통한 극복의 대상인 반면 윤회관에선 현실 고통이 다음 세상에서 높은 신분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한 단계, 곧 견딜만한 질곡으로 여겨질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어느 쪽이 흠 없이 맞는다거나 다른 한쪽이 전부 틀렸다고 할 수 없다. 탄생 전의 세계와 소멸 이후를 경험할 재간이 우리에겐 없기 때문이다. 시작과 끝을 가늠하기보다 시작 이후와 끝의 앞자락, 곧 과정을 중시하는 관점과 거기 고박된 실천에 주력하는 것이 현명하다. 시작과 끝은 우리가 알 수 없고 같은 맥락에서 제어할 수 없지만, 출발과 도달 사이의 전 과정만큼은 눈에 선하고 노력에 따라 얼마든지 핸들링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그렇다.
과정에 눈길 정도는 줄 정도로 우리 사회가 성장한 것은 고무적이다. 고무적인 현상에도 불구하고 결과론 우위와 승자독식에 여전히 뒷덜미를 잡힌 사회 현실은 막막하다. 올바른 과정을 거쳐 소정의 결론에 도달하기가 유독 어려운 까닭은 우리가 목도한 ‘목적과 수단의 전도’가 워낙 많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유혹을 떨어낼 만큼 우리 안의 이성이 견고하지 못한 탓도 있다.
여기서 목적을 시초(시작)라 보면 수단은 결론에 이르는 과정으로 바꿔 부를 수 있을 듯하다. 과정의 의미, 다른 말로 적절한 수단의 축적은 역사 또는 인생이라는 큰 틀의 평가와 직결된다는 점을 잊지 말자. 우리로선 생멸의 시작과 끝을 경험할 수 없지만, 과정이 줄곧 적절할 때 우리에게 부여되는 평가는 넉넉히 가늠할 수 있다. 지티 공인 해 없는 달콤한 유혹이라면 백 번 천 번 뛰어들 용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