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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에 장끼를 본 듯합니다. 포획자가 나타나면 도망갈 생각은 하지 않고 땅에 머리부터 박고 보는 족속. 내 눈에 안 보이면 어디에도 나를 사로잡을 포획자가 없다는 저 무지몽매한 확신에 경의를 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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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눈 밖에 두면 누구도 그곳에 눈길을 주지 않으리라는 설픈 기대로 돌아서서 머리뿐만 아니라 아예 상체를 바닥에 처박습니다. 자신의 몸에 스스로 새긴 주홍글자를 이번에야말로 남김없이 지울 태세입니다. 장끼가 별의 순간을 잡기라도 한 듯 한껏 젠체하는 모양이 멀리서 봐도 투명합니다. 현대 의학이 워낙 출중하니 혹 지울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어쩌겠습니까. 흔적은 결코 흔적 없이 지우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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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둔하기로는 과연 장끼만 한 게 없습니다. 누구 하나 장끼를 말릴 뜻이 없어 보입니다. 다들 장끼에 버금갈 뜻을 접은 지 오래된 듯합니다. 우산 아래. 폭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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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얼굴을 처박은 것보다, 상체를 숙인 것보다 많은 부분을 가릴 수 있습니다. 기어코 장끼가 온 몸으로 마른 대지를 온몸으로 덮친 결과입니다. 워낙 확신에 찬 장끼라 그곳이 풀 한 포기 나지 않은 맨땅인 줄은 미처 챙기지 못한 모양입니다. 워낙 똑똑해서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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폼만 잔뜩 든 장끼를 잡는 일이란 아주 쉽습니다. 손만 뻗으면 거기 장끼가 있습니다. 멀리 줄행랑을 쳐도 시원찮을 판에 겨우 한 발짝 뗐을 뿐입니다. 자기 확신이 그렇게 무섭습니다. 자칭 천하를 내다보는 자라면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얄팍한 수에 순간 눈이 멀면 제 몸 하나 간수하기 어려운 게 세상 이치입니다. 이제 그만 포획. 장끼 잡는 소리 시끄러울 테니 귀마개 단단히 하시라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