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8월에 부임한 무 부장은 와 과장이 줄곧 지켜본 바로는 직책에 대한 책임 의식이 조금도 없었다. 부임한 첫날 그는 과장 이하 직원들의 근태관리에 신경 쓰지 않겠다는 말부터 뱉었다. 과장이 몰래 사무실을 빠져나가도 가타부타 지적하지 않겠다고도 했다.
상부에게 걸리면 경을 칠 텐데 자신이 나서서 제재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었다. 알아서들 자기관리를 하라는 말로 무 부장은 자신 몫의 근태관리를 개인 몫으로 돌렸다.
와 과장은 잘못 들은 게 아닌지 귀를 의심했다. 근태관리는 부장이 챙겨야 할 가장 기초적인 업무였다. 연말 퇴직을 앞둔 무 부장이 모를 리 없었다. 행사해야 할 권한과 져야 할 책임을 부장 스스로 내다 버리는 발언을 무 부장이 조금의 가책 없이 하는 것에 와 과장은 깊은 모멸감을 느꼈다.
이후로도 무 부장은 상식 이하의 행동을 멈추지 않았다. 경박한 언어 습관조차 바꿀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마저 특권인 양 굴었다. 와 과장은 조만간 무 부장의 행태를 자세히 기록할 기회를 얻으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어느 날 와 과장은 직원들이 쭈뼛거리며 무 부장에게 결재를 부탁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같은 장면이 여러 날 계속되었다. 전례 없는 상황을 기이하게 여긴 와 과장은 무 부장의 결재 패턴을 확인하고 아연실색했다.
무 부장은 결재 시스템에 올라오는 결재를 모았다가 특정 시각에 결재했다. 쌓여있는 문서 내용을 일일이 살폈을지 알 길이 없었다. 의문을 푸는 열쇠는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무 부장이 결재한 문서 수와 실제 결재 시각을 비교하면 되었다.
과연 결재한 시각을 기점으로 불과 수 분 만에 무 부장은 문서함에 쌓인 그 많은 결재를 단박에 해냈다. 일괄 결재라는 수단을 통해서였다. 어련히 알아서 직원들이 잘 처리했겠느냐는 입에 발린 말 뒤에 교묘히 숨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 말을 직원들이 능력이 출중해서 자신이 자세히 볼 필요가 없다는 칭찬으로 들으면 오산이다. 무 부장에게 그 말은 알아서들 실수 없이 잘 올리라는 무언의 압력 같은 것이었다. 직원의 능력이 출중하더라도 확인 책임은 ‘항상’ 부장에게 있다.
그러고도 부장들은 틈만 나면 남들 들으라는 듯 자신들이 결재할 문서량이 많다고 너스레를 떨곤 했다. 과연 그런지 확인할 기회가 와 과장에게 찾아왔다. 무 부장이 여러 날 휴가를 내면서 와 과장을 대리 결재자로 지정한 것이다.
와 과장은 문서가 올라오는 대로 내용을 확인하고 결재했다. 무 부장과 달리 와 과장은 부장을 대신해서 결재해야 하는 문서 외에도 휘하 직원들이 올리는 결재를 해야 했다. 이는 부장이 결재할 문서 수보다 과장이 결재할 문서의 양이 훨씬 많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특정 시각을 정해 결재하지 않으면 충분히 문서 내용을 읽은 후 결재할 수 있었다.
부장들이 결재할 문서량이 많다고 떠벌리는 건 그들이 몰아서 결재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습성으로는 내용 확인은 고사하고 무분별하게 결재할 가능성이 아주 높았다.
부장이 결재한 문서 중 여러 건이 초미의 관심사로 부상한 적이 있었다. 부장은 부끄러운 줄 모르고 직원에게 따져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