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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둘도 없는 농담에 관하여

'어처구니없게 책을 구매'한 사연-오캄의 면도날에서 틸리의 서양철학사까지

by 콩코드


같잖은(!) 이유로 책을 선택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틸리 서양철학사》가 거기 해당합니다.



서양철학사에 관한 책 종류는, 돌아보면, 많이 읽었습니다. 쉬 갈증이 가시지 않는 걸 보면 각각의 철학사 서적에서 근원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덜컥 믿어버렸습니다. 제게서 비롯된 무지를 애써 피했던 거지요. 게으른 독자라는 부인할 수 없는 요소도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구요.



보건대 후자가 훨씬 설득력이 있어 보입니다. 숱한 철학자들이 얼마나 오랜 시간 그 문제에 천착했겠습니까. 남탓하기 좋기로서니 전자의 문장에 화를 돌린다면 몰매맞을 각오를 해야겠지요. 누가 적극 나설지는 모르겠습니다.



《틸리 서양철학사》는 우연한 기회에 동네 헌책방에서 느닷없이 마주했습니다. 우연한 기회란 오늘만큼은 책을 구입하지 말아야지, 하며 마음을 다잡고도 모자라 다른 한 손으로 그러잡았음에도 책방으로 향하는 걸음을 멈출 수 없었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느닷없이, 라는 부사를 무슨 방점 찍듯이 끌어다 쓴 건 계획 없이 이뤄진 일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수식임은 응당 눈치채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책을 마주하고 일단 반색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습니다. 애정을 그런 식으로 드러낸 건 좋은 전략이 아니었습니다. 애정은 필연적으로 호기심을 촉발하기 때문입니다. 이윽고 책장을 토르륵 넘긴 건 정까지 모두 준 것밖에 안 되었습니다.



거기서 정말 충격적으로(?) 느닷없이(!), 상급 여자 이름이 연상되는(오해는 마십시오. 성적 편향을 드러내는 표현이 아니니까요. 그럼, 뭔대? 뭔대?) 우연히(!) 오캄의 면도날’을 만났습니다.





이쯤에서 '우연희'가 아니고 웬 '로보캅'을 만났느냐고 나무라실 분이 계시면 달리 제가 변명할 말이 없습니다. 어떤 경우라도 제 말을 믿지 않으실 터이기 때문입니다. 혹은 제가 수염을 깎는 면도날을 상세한 설명을 붙여 글을 이어나갈 거라고 기대감을 잔뜩 내비친 분이라면 한동안 제가 붓을 꺾는다고 나무라지 말아 주시길 간곡히 청합니다.



어디서 오신 분인지 모르겠는데, 혹 오캄을 삼성과 같은 위치에 두고서, 잇따라 오캄의 면도날은 삼성의 갤럭시 같은 거라고 큰소리로 말씀하실 분이 계시면 이것만은 꼭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저 큰소리에 알레르기 있어요!



별 희한한 알레르기 다 있죠? 병명을 특정할 수 없을 깨 의사가 종종 쓰는 ‘스트레스’라는 병원용 감초를 급조한 겁니다. 말씀드리고 보니 급 민망하네요. 철회하겠습니다. 저 큰소리에 알레르기 있어요!



어떤 분께서 사래가 걸리시더라도 마지막으로 이 말씀만은 꼭 드려야겠습니다. 오캄의 면도날은 어떤 회사의 면도날 제품이 아니라고요~ 도루코 면도날을 연상하셨다면 라임에 능통한 분이시라 믿고 래퍼로 거듭 추천드립니다. 연식이 되신 분이라고는 발설하지 않겠습니다.



일전엔 천여 페이지가 넘는 철학서적을 손에 넣고 얼마나 기뻤던지. 이게 아닌데..... ㅠㅠ 오캄의 면도날은 오캄이라는 프란치스코 신부이자 학자, 신학자에서 유래합니다.



그가 사용한 면도날은 ‘경험하고 있는 두 개 이상의 이론 중에서, 더 단순한 것이 옳을 가능성이 높다’는 말로 달리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의 핵심은 ‘어떤 문제에 관해서든 진실에 도달하려면 단순함을 유지하라’는 오캄의 유훈을 담고 있습니다.



오캄은 어떤 주제에 대해서든 진실에 도달하는 가장 단순한 도구를 고안한 거로 유명합니다. 공교롭게도 저의 모 sns의 필명이 오캄의 면도날이었으니 제가 얼마나 반겼을지 상상하고도 남으실 겁니다. 부끄럽습니다만 사실 《틸리 서양철학사》에 나오는 오캄의 면도날 부분은 읽지도 않았습니다. 그곳에 실린 오캄의 사진을 보고는 단박에 결정했지요. 사고 보자!



800여 페이지에 달하는 철학사라니? 결국 운명대로 중심을 잃고 흔들리기를 여러 번 - 그러니까 청춘이라는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 겪은 뒤로 책은 제 사무실 책상 한 켠에 고이 모셔지는 특권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 책이 그런 선택을 특권으로 여길지는 장담 못합니다. 어이없는 선택에 이은 위리안치라는 형식의 매장임을 그 역시 모르지 않겠기에 그렇습니다.



‘얼마 동안’이라는 단서를 귀띔해 주었지만, 그가 만족할지 모겠습니다. 전 아니라고 본다에 10원 걸겠습니다. 이글에 ‘세상 어처구니없는 책 구매’라고 제목을 붙이고 총총히 물러가는 게 아무래도 신상에 좋겠습니다.





사진 설명: 상어 출몰 지역이라는 표지판을 본 상어가 덜덜 떱니다. 농도짙은 농담의 좋은 예라 표지 사진으로 골랐습니다. 출처는 픽사베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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