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출 - 대학 시절 얘기를 잠깐 해볼까요? 어리숙했을 초년생 시절을 거쳐 2년 차에 접어들자, 공부 패턴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가더군요. 1학년 때부터독서에 시간을 많이 할애하려고 계획을 세웠는데 그건 아주 잘한 일이었습니다. 읽을 책을 손에 넣을 계산이 신통치는 못한 것만 빼면 그렇습니다.
그 시절 대학생 용돈이란 겨우 밥값 얼마와 차비 얼마가 전부였던 터라 교재 외에 책을 사서 읽을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차비는 고정비로 아낄 수 없는 처지여서 조금 더 싼 면 종류로 점심을 대신해 책 살 돈을 마련하는 게 고작이었으니까요. 그렇다 보니 한 달에 책 한 권 사기조차 버겁더군요.
구내식당의 백반이 1000원이었던 시절입니다. 가락국수는 500원에 먹을 수 있었습니다. 아마 더 쌌을 수도 있습니다. 책값은 페이지 수에 10을 곱하면 되었습니다. 지금은 거의 60을 곱해야 책값이 되니까 책에 관한 한 물가상승률이 대단히 높다고 할 수 있습니다.
책을 안 읽을 순 없어서 주로 대학 도서관에 책을 빌려 읽었습니다. 한창 속도가 붙을 땐 하루에 6권을 읽었던 거 같습니다. 4시간 자고 아침, 점심, 저녁 시간으로 3시간을 빼면 하루 24시간 중 17시간이 확보되었습니다. 권당 3시간을 잡으면 그 시간에 6권을 읽을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평일에는 수업으로 불가능하지만, 방학이라면 다르죠.
특히 1, 2학년 때가 책을 읽기에는 가장 좋은 시기입니다. 호기심이 왕성한 시기여서 흡수 속도가 굉장히 빠르죠. 다방면으로 책을 읽을 수 있다는 장점도 있습니다. 혹 그 시기에 진입했거나 그 시기를 지나는 대학생이라면 그때 많이 읽어두시길 권장합니다. 3, 4학년이 되면 방학 때라도 교재 외에는 책을 읽을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직장을 다니면서는 마음껏 책을 구입할 수 있는 게 너무 좋더군요. 힌 번에 서너 권을 사는 호기도 누렸습이다. 필요할 때 척척 돈을 내는 기분이 최고였죠. 지금도 그 점에서는 무척 감사히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무 때나 지갑을 열 수 있다는 건 큰 행복입니다.
잠적 - 책을 읽는 데는 얼마간 동기가 필요합니다. 인류애와 같은 원대한 동기야 물론 나무랄 데 없이 훌륭하죠. 제 경우엔 어이없는 동기를 발판으로 책을 탐독하게 되었는데요. 그때 게걸스럽게 읽은 덕에 특히 문학은 각 작가의 작품 전체와 작가론까지 두루 섭렵할 수 있었습니다. 사회문제에 관해서도 비판적인 시각을 견지할 수 있었는데 당시로선 몰두할 대상이 극도로 필요해서 본의와 다르게 독서의 ‘독한’ 맛을 보게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문제의 동기는 '여자친구의 잦은 잠적'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 시절 여자 친구는 내적 갈등(그에 관해 전 묻지 않았고, 여자친구는 답하지 않았습니다.)이 심화하면 연락 없이 칩거에 들어가곤 했습니다. 특히 방학 직전에 그 빈도수가 높았는데 방학만 되면 여자친구와 놀러 다닐 꿈에 부푼 제 계획을 번번이 좌절시켰습니다.
학기 중에야 정규 수업을 빠질 수 없으니까 그 시간만큼은 그래도 고민에 휩싸이지 않아 견딜 만했습니다. 방학 기간은 예외였죠. 눈만 뜨면 별생각이 다 났으니까요. 이러다 폐인이 되겠다 싶어 몰두할 어떤 것을 간절히 찾게 되었고, 제게 그 대상이 독서였습니다.
몰두 - 특히 소설은 읽을 만했습니다. 좋은 점은 결말이 궁금해서라도 한 번 손에 든 소설은 내처 읽게 되더란 것입니다. 그렇게 권당 3시간씩 하루 6권의 소설을 읽게 되었죠. 30일로 환산하면 180권입니다. 두 달에 360권이니까 웬만한 작가의 작품 전체를 읽게 되는 소득을 얻게 되죠. 여자친구를 잊어보려고 시작한 독서로 제게 별의 순간이 오게 된 걸 안 시점은 한참 뒤의 일입니다.
처음엔 재미있을 거 같은 소설을 무작위로 골라 읽었습니다. 어느 정도 이력이 붙자, 이번엔 작가별로 작가의 작품 전체를 읽어보자는 욕심이 났습니다. 그렇게 먼저 한국 작가의 작품 대부분을 읽었고 어느 순간 작가의 작품 경향에 생각이 미치면서 내친김에 작가론까지 읽게 되었습니다.
방학 때만큼의 양은 아니었지만, 방학이 끝난 뒤에도 드문드문 소설을 읽으며 헛헛한 심정을 달래곤 했죠. 그쯤 여자친구가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3학년 때까지 여자 친구가 같은 패턴을 따랐던 거 같습니다. 4학년 때야 짬을 낼 틈이 없어 방학 때 여자친구와 놀러 갈 엄두를 내지 못했죠.
근육 - 그러고 보면 대학 4년 내내 여자친구에게 휘둘린 셈이 되는데 그 덕분에(!) 세계문학을 거쳐 사회문제, 경제 분야의 책을 상당수 접하는 행운을 얻었습니다. 분명 웃픈 순간을 지나왔는데, 그렇지 않았다면 기대하지 않은 소득을 그 수준까지 얻기가 힘들었을 터라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어리둥절하기는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여자친구의 실망스러운 태도를 빼면 제 독서력에 여자 친구가 미친 영향이 가히 지배적이라는 말이 틀리지 않습니다. 어디서든 혹 만나리란 기대는 하지 않지만, 경우야 어떻든 고마웠다는 말은 해야겠습니다. 제 독서력의 8할은 여자친구의 칩거가 기여한 게 맞으니까요.
그 뒤로 독서 근육이 붙어 지금까지 5만여 권을 읽었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읽어 갈 걸 전제로 하면 독서 부문에서 절반은 성공한 셈입니다. 그 여파로 이렇게 글줄이라도 쓰게 된 걸 보면 사실 종일 여자친구를 업어줘도 시원치 않을 것입니다. 나머지 절반 동안은 그 정도 분량의 책을 읽을 수 없다는 걸 잘 압니다. 변수도 많겠고요. 어느 틈에 몸도 따라 주지 않을 것입니다. 아직 확정하지는 않았지만, 서가에 꽂힌 책을 주섬주섬 가려내 읽는 정도가 다음 시기 독서 패턴이 되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진단하고 있습니다.
경중 – 돌아보면 손해 나는 장사는 없다는 것. 죽을 것만 같은 시기를 거쳐오더라도 숨 쉴 구멍은 그 한복판에도 매양 있었다는 것. 혹 수렁에 빠져 고투를 거듭하더라도 희망과 장래를 쉽게 놓아서는 안 된다는 것. 나의 미래가 어떻게 그려질지는 그 미래에 당도해야 제대로 볼 수 있다는 것. 그래서 우리에겐 어떤 경우라도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것. “다 지나가리라”는 언명으로 유명한 철학자의 말이 생각납니다. 어떤 고통에 비하면 언급한 '여자친구의 잠적'은 고통 같지도 않은 것, 맞습니다. 개개인이 받아들이는 고통의 크기에 견주면 다를 수 있지만 말이죠. 표면적으로야 자식을 잃는 고통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고통의 크기는 그 고통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상태, 주변인과의 관계, 그날의 분위기에 많이 좌우됩니다. 누군가에게는 쥐꼬리만 한 고통이라도 누군가에게는 세상 무너지는 고통일 수 있으니까요. 그런 점에서 고통은 상대적입니다. 고통의 경중은 고통받는 각 개인이 측정하게 되는 성질의 것이니까요.
그런 점에서 고통도 독서와 마찬가지로 일정 근육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감정에 쉽게 요동치지 않게 말이죠. 어떤 고통은 이쯤이야, 하고 가볍게 넘길 잔근육도 필요해 보입니다. 작은 고통에 큰 근육 전부를 쓰느라 기진맥진해서는 안 되니까요. 살다 보니까 싸울 일이 많더군요. 고통은 익숙해지지 않아서 맞짱 뜨기가 사실 버거운 상대 중 하나죠. 때론 직면해야 할 고통이 있는 반면 다른 것으로 관심을 돌려 고통을 이겨내는 지혜도 필요합니다. 내가 좋아하는 어떤 걸 해보는 건 어떨까요? 지금 당장 말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