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은 맑다. 구름 한 점 없다. 햇살이 비치는 들녘으로 한줄기 바람이 게으른 걸음을 내딛고 있다. 정오를 20분 넘긴 시각.
A.
추위를 얼마간 벗은 하늘이 유독 맑다. 그날 오전 H가 울면서 관리자에게 갔다. 그 자리에서 H가 직원들이 일을 제대로 가르쳐주지 않으면서 시종 모욕적인 말투를 써 모멸감을 느꼈다, 더는 못 다니겠다는 말을 쏟아냈다. A를 포함해 사무실 내 다수가 H의 행동에 날 선 반응을 보였다. H가 당사자나 중간관리자를 거치지 않고 상급 관리자에게 가서 주로 사실과 다른 얘기를 고자질했다는 게 이유였다. 실제로 하고 싶은 말은 따로 있었다. 그들은 H가 자신들에게 자기 형편을 토로하거나 자신들에게 필요한 해명의 기회를 주지 않은 것을 성토했다. 종합하면 상급 관리자가 자신들을 영 나쁜 존재들로 오해하게 되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십수 년 전 어느 날, A가 사무실에서 울면서 더는 일 못 하겠다고 소리쳤다. J가 복리후생 관련 기획안을 내면서 그 안에 당연히 예산 집행 계획을 넣었다는 게 이유였다. 기획의 대강은 J가 추진하겠지만 예산 집행은 직무 상 A가 담당할 일이었다. A는 당시 부서 회계를 맡고 있었다. 어처구니가 없던 J가 물었다. 기획안에 따라 집행만 하면 되기에 따로 책임질 일도 없고 당신이 예산 담당자인데 무슨 태도인지 모르겠다. A는 막무가내였다. 급기야 A는 내가 할 일이 아니라는 투로 말했다. 사리에 어긋난 말을 하는 A가 석연치 않았지만 그땐 자세한 내막을 몰랐다. A는 사무실을 나가 들어오지 않았다. 다음날 A는 휴직을 냈다. 앞서 등장한 A와 뒤의 A는 동일 인물이다. 몇 개월 후 A는 J가 떠난 다음날, 사무실로 복귀했다.
당시 중간관리자는 J의 기획안에 노골적으로 반기를 들었다. 기획안을 올리는 건 좋은데, 결재하지 않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켕기는 게 있었던지 자신을 빼고 위로 결재를 올리라고 말을 바꿨다. 예상과 달리 중간관리자는 순순히 기획안에 결재했다. 중간관리자 주도 하에 중간관리자와 끈끈한 인맥을 형성한 D, 그리고 이들의 문밖에 나지 않으려던 A가 한통속으로 은밀히 꾸민 일임은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내용을 조금만 주의해서 보면 H가 울며 상급 관리자를 찾아 자신의 심경을 토로한 일에 적어도 A가 손가락질할 입장이 아니라는 것이다.
세상은 돌고 돈다. 물리적으로 그럴 뿐만 아니라 생황시 또한 그와 비슷한 궤적을 그린다. 그렇다 보니 자기가 한 말에 자신이 갇히는 일이 허다하다. 오늘 J는 H와 A를 보면서 새삼 사람인가 무엇인지 생각에 잠겼다. 반성은 고사하고 덜 익은 사과조차 할 줄 모르는 인간군상들이 빤한 얼굴로 오고 간다. 그렇게 스스로 망가져 가는 줄은 꿈에도 모른 채.
B.
수년 전 어느 날, J에게 독살스럽게 대하는 S가 말했다. 난 당신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들어서 알아. S는 자신이 무슨 실수를 했는지 알아채지 못했다. 1년 후 함께 조사 나가던 길에 SG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 G가 그러던데요. J가 아침마다 커피를 타달라고 해서 커피 대느라 힘들다고.
J는 G가 가져온 커피를 고맙게 마셨을 뿐 강요한 적 없었다. 더욱이 미안해서 인제 그만 줘도 된다는 말을 여러 번 했었다. 어떤 때는 아예 J가 시중에서 커피를 사 와 책상에 두기까지 했다. 그때마다 G는 제가 먹을 커피 타는 김에 J 것도 타는 거니까 마음 쓰지 마세요,라고 덧붙였다. 그렇게 호의로 받아들인 일이 하루아침에 파렴치한 짓으로 둔갑했다. 사실을 모르는 직원들은 직원에게 커피 타기를 강요한 몰상식한 인간으로 J를 그들 입길에 올렸을 것이다. 뒷맛이 씁쓸했다.
J는 G와 직전 6개월 여 같은 사무실에 있었다. 그 후로 G는 휴직을 냈다. G가 J가 근무하는 사무실로 오기 전 G는 S 밑에 있었다. 그 시절 S와 G가 어떤 관계를 맺었는지 알 수 없다. S는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이 인사를 좌우할 정도의 능력이 있다는 투의 말을 자주 내뱉었었다. 중앙 인사들과의 친분도 과시했다. 직원들은 S의 말을 철석같이 믿는 눈치였다. 그 점을 간파한 S는 압력의 강도를 높이며 특히 수하 직원들을 가차 없이 가스라이팅했다. G도 그 희생자였을 것이다.
G가 다시 J 밑으로 왔을 때 G는 전에 하던 대로 커피를 탔었다. 무안한 기색이라곤 없었다. 여기에 더해 J와 같이 있는 동안 G가 S에게 J의 동태를 보고했을 것이다. S가 자신만만하게 J에게 난 당신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들어서 알아,라고 한 말의 배경이었다. 그 G를 또 다른 사무실에서 만났다. G가 J 밑으로 들어왔다.
J는 커피 타지 말라는 말부터 했다. G가 답했다. 제가 먹을 커피 타는 김에 J 것도 타는 거니까 마음 쓰지 마세요. J가 말했다. 타지 말라니까. G가 말했다. 그럴 거 없어요. 따로 타는 게 아니니까요. 기어코 G는 해명하지 않았다. G와 오래 같이 만난 걸 생각해서 J는 G가 변명이라도 하기를 바랐다.
몇 달 전 G가 인사에서 밀려났다. G는 고급 관리자에게 달려갔다. 따지러 갔단다. J가 G와 로비 의자에 마주 보고 앉았다. J가 말했다. 상급 관리자와 고급 관리자가 다 벌인 일인데 거길 찾아가? G가 답했다. 전 부탁할 곳이 없어요. G의 말에 J는 머리를 세게 맞았다. S에게 없는 말을 하면서 자리를 보전하고 상급관리가 전횡을 거듭할 때조차 자신을 그 부분을 제어할 권한이 없다고 하면서 상급 관리자가 바라는 대로 다 했었다.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G는 자신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상급 관리자에게 그야말로 간도 쓸개도 다 내주었다. 그러고도 G는 승진 명단에 빠졌다. 뻔한 말부터 해보자.
목적을 위해 수단이 정당화될 수 없다. 특히 없는 말로 상대를 수렁으로 모는 행위는 자신의 그런 짓을 상대가 조금도 모를 거라는 전제 위에 하는 것이라 죄질이 몹시 나쁘다. 반성할 기회조차 차버릴 정도라면 더는 볼 일 없다고 J는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