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밤, 파리의 기억
작은 호텔방의 쪽문을 열자 싸늘한 공기가 밀려들었다. 흐릿한 불빛 속에 젖은 거리가 드러났다. 가로등이 비에 번지고, 도로 위를 스치는 차들의 불빛이 빗방울 사이로 희미하게 퍼졌다. 좁은 골목, 물기를 머금은 돌바닥, 코트를 여미며 서둘러 걸음을 옮기는 사람들. 적당한 거리를 두고 서 있던 연인들은 작은 우산 아래서 속삭였고,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걷던 남자는 천천히 발끝으로 웅덩이를 밀어보았다. 광장으로 이어지는 길목엔 고요한 우수가 감돌았다. 파리는 비를 맞으며 더욱 깊어지고 있었다.
조금 전, 나는 센 강변을 거닐었다. 가을이 거의 저문 강가의 공기는 차가웠지만, 빗방울이 뿌려지던 그 광경은 오히려 선명하게 남았다. 돌난간 위로 고인 물이 낮게 일렁였고, 스치는 바람에 낙엽이 강으로 떨어졌다. 물결 위에서 둥글게 퍼지는 작은 동심원들. 그 너머, 배 안에서 바라본 에펠탑은 습기를 머금은 공기 속에서 흐릿하게 빛났다. 반짝이는 조명과 강물에 부서지는 불빛, 그리고 하늘을 향해 우뚝 솟아 있는 그 형체가 마치 꿈속 한 장면처럼 아득했다.
그때 나는 파리를 떠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어쩌면 이 도시는, 떠날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더 강렬하게 스며드는지도 모른다. 센 강의 촉촉한 공기, 강물 위로 부서지던 빛, 광장을 오가던 사람들의 고요한 우수, 그리고 호텔방의 작은 창을 통해 바라본 젖은 거리까지. 파리는 마지막까지 내게 기억할 장면들을 남기고 있었다.
"내일이면 떠난다. 이 도시에서의 마지막 밤이다."
센 강 위를 스치던 가을의 마지막 바람, 젖은 거리 위를 서성이던 사람들, 비를 맞으며 더욱 선명해진 파리의 불빛. 호텔 창문 너머로 바라보는 이 풍경이, 지금껏 지나온 여행의 모든 순간들을 차분히 정리해 주는 것만 같았다. 내일이면 루브르 박물관의 거대한 작품들 앞에 서있을 것이고, 베르사유 궁전의 황금빛 복도를 걸을 것이다. 하지만 그 모든 장면조차도 결국 여행의 끝을 의미하는 것이라는 사실이, 이 밤을 더욱 애잔하게 만들었다.
길 위의 사람들도 어쩐지 나와 같은 감정을 공유하고 있는 듯했다. 가로등 아래에서 비를 피하며 가만히 서 있던 누군가는 생각에 잠겨 있었고, 광장 한쪽에서 지친 얼굴로 우산을 접는 여자는 마치 어디론가 떠날 준비를 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이 도시는 늘 낭만적이지만, 마지막 밤에 바라보는 파리는 그보다 더 깊은 무언가를 품고 있었다.
나는 조용히 쪽문을 닫았다. 바깥의 빗소리는 여전히 일정한 리듬으로 창틀을 두드리고 있었다. 눈을 감으면, 이 도시가 내게 남긴 것들이 마음속에서 다시 한번 반짝일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