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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개의 문, 하나의 도시 - 바젤

바젤에서 마주한 국경과 예술의 교차점

by 콩코드


이제 스위스 여정의 마지막 도시, 바젤로 떠나보겠습니다. 예술과 강, 국경이 만나는 곳. 그 낯선 경계에서 우리는 또 다른 여행자의 얼굴을 만나게 될 겁니다. 라인강이 흐르고, 예술이 숨 쉬며, 국경 너머의 기척이 감도는 도시. 그곳에서 우리는 또 다른 감정의 결을 마주하게 됩니다.



“도시로 들어서는 길은 세 갈래였다. 어느 쪽에서 접근해도 바젤은 낯설지 않은 얼굴로 여행자를 맞이한다. 스위스의 질서와 독일의 정갈함, 그리고 프랑스의 여유가 이 도시에 동시에 스며 있다. 하지만 그것이 겹치는 것이 아니라, 투명하게 공존하고 있다는 데에 바젤의 첫인상이 있다.


라인강은 도시의 몸을 가로지르며 흐르고, 그 위를 떠다니는 햇살은 마치 오래된 회화처럼 부드럽고 섬세했다. 도시의 중심은 광장이 아니라 강이었다. 나는 라인강을 따라 걷는 동안, 이 도시가 세 개의 문을 열고 세계를 맞이하고 있다는 사실을 조금씩 실감했다.


회화와 건축, 문명과 자연, 과거와 현재가 유려하게 교차하는 바젤은, 여행의 긴 여정 속에서도 유난히 조용한 목소리로 말을 걸어왔다. 그 목소리는 조급하지 않았고, 강요하지도 않았다. 대신 천천히, 마치 오래된 악보를 넘기듯 그렇게 나는 바젤에 도착했다.”




바젤, 강변의 미술관에서 국경을 넘다


스위스의 마지막 여정지로 향하는 기차 안, 나는 낯설고 설레는 마음으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체르마트의 산과 베른의 골목을 지나 이제 바젤. 국경을 품은 도시이자, 예술의 숨결이 강물처럼 흐르는 곳. 창밖의 풍경이 점점 평지로 바뀌고, 하늘이 넓어지는 듯했다. 왠지 이 도시에는 다른 리듬이 흐를 것만 같았다.


바젤에 도착하자 가장 먼저 느낀 것은 공기의 결이 달랐다는 점이다. 어딘가 얇고 투명한 막이 흐르는 듯한 도시. 프랑스와 독일의 경계에 있으면서도 스위스적인 절제와 품격을 잃지 않는 이곳은, 경계에 선 사람처럼 조심스럽고도 강단 있는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나는 가장 먼저 라인강으로 향했다. 바젤은 이 강을 품은 도시이고, 그 강이 도시를 두 개로 나누기도 한다. 페리선을 타고 강을 건넜다. 모터 소리 하나 없이, 줄에 매달려 강의 흐름만으로 움직이는 배. 나는 그 조용한 이동 방식이 마음에 들었다. 흘러가지만, 떠내려가진 않는. 강도 도시도 그렇게 존재하고 있었다.


건너편 언덕 위 미술관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나는 무심코 오래된 담벼락에 손을 댔다. 그 차가운 표면은 이 도시의 시간이었다. 여느 스위스 도시보다 더 다채로운 외세의 흔적과 충돌이 겹쳐진 이곳은, 어쩌면 타국에서 돌아온 여행자와 가장 비슷한 도시일지도 모른다. 늘 어딘가 걸쳐 있고, 어느 쪽에도 완전히 속하지 않은.


바젤 미술관(Kunstmuseum Basel)은 한참을 머물기에 충분했다. 건물의 외관부터 단정하고 절제되어 있었고, 안으로 들어서자 회색 벽 사이로 빛이 섬세하게 흘러들고 있었다. 전시장 하나하나가 고요한 대화를 건네는 듯했다. 홀을 걸을수록 색채는 바뀌고, 나의 감정도 조금씩 따라 물들었다.


나는 특히 호퍼(Edward Hopper)의 그림 앞에 오래 머물렀다. 사람 없는 도시 풍경, 고요한 건물의 외벽, 열려 있는 창문. 그 안에는 부재의 감정이 있었고, 어딘가 떠나려는 혹은 이미 떠나온 누군가의 기척이 담겨 있었다. 마치 내가 지금 이 도시에서 느끼고 있는 감정처럼. 도착했지만 어딘가 이미 이별을 준비하고 있는.


미술관을 나와 다시 라인강 강가로 걸어갔다. 오후의 빛이 강물에 부서지고, 맞은편 도시의 건물들이 은은한 윤곽으로 떠올랐다. 그 풍경은 마치 수채화처럼 번졌고, 나는 한참을 그렇게 서 있었다. 말없이 감탄하며, 말없이 떠나갈 것을 예감하며.


도시의 끝에서 나는 국경으로 걸어갔다. 발아래로는 스위스의 돌, 바로 옆으로는 프랑스의 표지판. 그리고 몇 걸음 뒤엔 독일어가 아닌 프랑스어가 들려왔다. 이처럼 쉽게, 부드럽게 국경을 넘을 수 있다는 사실이, 어쩐지 감정적으로 다가왔다. 여행은 늘 경계 위에 서는 일이니까.


그날 밤, 숙소 창가에 앉아 나는 생각했다. 체르마트는 나에게 웅장한 침묵을 주었고, 베른은 조용한 시간을 안겨주었고, 바젤은 감정의 경계를 보여주었다. 세 도시의 결은 모두 달랐지만, 그 안에 담긴 여행자의 마음은 닮아 있었다. 멀리서부터 이 도시들을 찾아온 내가 아니라, 오히려 이 도시들이 나를 기다려준 것처럼. 그리하여 나는 이 여행의 끝에서 조금은 더 부드러운 사람이 되어 있었다. 경계를 넘을 줄 알고, 감정을 들여다볼 줄 아는. 그리고 조용히 떠날 줄 아는.




쿤스트뮤지엄 바젤과 파울 클레


라인강을 따라 동쪽으로 걷다 보면, 어느 순간 도시의 소음이 자연스레 잦아든다. 그리고 고요함 사이로, 그림자처럼 스며드는 예술의 기척이 들려온다. 나는 그날, 쿤스트뮤지엄 바젤의 문을 조심스레 열었다. 마치 바젤이라는 도시가 가장 아끼는 이야기를 건네는 것처럼, 그 안에는 수 세기에 걸쳐 축적된 색채와 선, 시대의 숨결이 층층이 쌓여 있었다.


홀을 따라 천천히 걷다 보니, 고흐의 거친 붓질과 세잔의 조형적 긴장감이 벽면을 채우고 있었다. 회화 속에서 시간은 뭉그러지고, 나 또한 과거의 시선으로 그 풍경을 바라보게 된다. 가장 오래 멈춰 선 곳은 파울 클레의 방이었다. 색채와 기호, 음악과 시가 뒤섞인 그의 작품은 캔버스보다 마음속에서 더 오랫동안 울렸다.


파울 클레의 작품 앞에서 나는 문득 ‘고향 없는 예술가’라는 표현을 떠올렸다. 독일에서 태어나 스위스에서 자란 그는 하나의 나라보다 ‘감각의 국경’ 안에서 살았던 사람이 아닐까. 그의 선과 색은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았고, 한 폭의 그림이 여행 그 자체라는 것을 조용히 증명하고 있었다.


미술관을 나서며, 나는 이 도시의 공기에도 어딘가 파울 클레적인 결이 스며 있는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말 없는 예술이 도시에 말을 걸고, 지나가는 여행자의 마음속에 오래도록 잔상을 남긴다는 것, 바젤은 그런 도시였다.




강변 산책, 대성당 풍경, 국경 지대의 감각, 소소한 일상의 정취


미술관을 나와 다시 라인강 쪽으로 향했다. 오후의 햇살은 물 위에 부서져 반짝였고, 바람은 느릿한 템포로 도시의 귀퉁이를 쓰다듬었다. 강에는 모터가 없는 작은 페리, 페에리(Fähri)가 느리게 움직이고 있었다. 강의 흐름만을 이용해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사람을 실어 나르는 이 낡은 나룻배는, 마치 시간의 흐름도 그렇게 저항 없이 따르라는 무언의 메시지처럼 보였다.

그 배를 바라보며, 나는 바젤이라는 도시가 우리에게 알려주는 ‘조용한 이동’의 미학을 떠올렸다. 서두르지 않고, 그러나 방향은 분명하게.


라인강을 건너 오르면, 도시를 내려다보는 자리에 바젤 대성당(Basler Münster)이 자리한다. 붉은 사암으로 지어진 성당은 외관부터 따스한 기운을 품고 있었고, 고딕과 로마네스크가 혼재된 첨탑 사이로 고요한 하늘이 열려 있었다.


성당의 뒤편으로 나 있는 테라스에서 나는 한참을 머물렀다. 저 멀리 독일과 프랑스로 뻗어가는 풍경, 그 경계 없는 시야를 바라보다 보면, ‘국경’이라는 단어가 얼마나 상대적인지 실감하게 된다. 여기 바젤에선 세 나라의 시간이 함께 흐르고 있었다.


도시를 다시 내려와 구시가지로 접어들자, 마르크트 광장(Marktplatz)에 이르렀다. 붉은 시청사가 눈에 띄었고, 광장 한쪽에선 소박한 시장이 열리고 있었다. 진열대 위에는 이른 봄의 허브와 과일, 치즈와 올리브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고, 상인들은 자연스레 여러 언어를 오가며 대화를 나눴다. 독일어와 프랑스어, 때때로 영어, 스위스 독일어까지. 그 소리 속에 섞여 있으니, 나는 어느새 한 도시가 아니라 ‘작은 세계’를 걷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근처의 작은 카페에 앉아 진한 에스프레소를 한 모금 마셨다. 창밖으로 보이는 건 사람들의 표정, 느릿하게 흘러가는 오후, 그리고 커피 향 너머로 어렴풋이 감지되는 도시의 리듬이었다.


바젤은 크지 않지만, 결코 단순하지 않은 도시다. 그 조용한 결 속엔 수많은 이야기가 겹겹이 쌓여 있다. 국경의 도시에서 만난 예술과 일상, 고요와 색채. 그 모든 것들이 하나의 도시로 수렴될 때, 나는 문득 이 도시가 왜 ‘세 개의 문, 하나의 도시’인지를 온전히 이해하게 되었다.



/여행자 노트1: 바젤에서 기억할 것들

1. 뷔로(Basel Card)를 꼭 챙기세요.

바젤에 숙박할 경우 무료로 제공되는 ‘바젤 카드’를 잊지 마세요. 이 카드를 소지하면 대중교통이 무료이며, 주요 박물관과 관광지에서 입장료 할인이 적용돼요.

특히 쿤스트뮤지엄과 Tinguely Museum을 함께 둘러보고 싶다면 더욱 유용합니다.


2. 라인강을 건너는 작은 페리(Fähri)는 놓치지 마세요.

엔진 없이 물의 흐름만으로 이동하는 전통 나룻배. 탑승 시간은 짧지만, 바젤만의 고요하고 느린 리듬을 체험하기에 이보다 더 좋은 방식은 없을 거예요. 총 네 곳의 페리가 있으며, 한 번쯤 모두 타보는 것도 쏠쏠한 재미가 있습니다.


3. 월요일은 미술관이 대부분 쉽니다.

예술 감상이 여행의 중심이라면 꼭 요일을 체크하세요. 월요일에는 주요 미술관들이 휴관하는 경우가 많아 헛걸음할 수 있어요. 대신 월요일엔 강변 산책이나 카페, 시장 탐방을 중심으로 일정을 짜보는 것도 좋아요.


4. 국경의 도시답게 다양한 언어가 공존합니다.

기본은 독일어지만, 영어와 프랑스어도 널리 통합니다. 특히 마르크트 광장 주변이나 박물관에서는 영어로도 무리 없이 소통할 수 있어요. 표지판도 여러 언어로 병기되어 있어 여행하기 한결 수월합니다.


5. 바젤을 걷는 여행을 추천합니다.

바젤의 진면목은 천천히 걷는 골목과 계단, 강변과 언덕 위 풍경 속에 숨어 있어요. 구시가를 중심으로 한 하루의 도보 여행만으로도 충분히 도시의 결을 느낄 수 있답니다.


6. 파울 클레를 좋아한다면 근교의 베른까지도 추천!

바젤에서 기차로 1시간 남짓이면 스위스의 수도 베른에 도착할 수 있어요. 그곳에는 파울 클레 센터(Paul Klee Zentrum)가 자리하고 있어 그의 예술 세계를 더욱 깊이 만날 수 있습니다.


/여행자 노트2: 바젤에서 꼭 봐야 할 것들

1. 마르크트 광장의 색채와 정취

바젤의 심장부라 할 수 있는 마르크트 광장(Marktplatz)은 여행자에게 두 가지 인상을 동시에 줍니다. 하나는 화려함. 붉은 외벽에 황금 장식이 돋보이는 시청사(Rathaus)는 중세의 화려한 권위를 고스란히 보여주며, 누구나 발걸음을 멈추게 하죠. 다른 하나는 생동감. 광장 한편에는 아침 일찍부터 장이 열려, 현지의 허브, 꽃, 치즈, 빵, 제철 과일들이 선을 보입니다. 상인들의 목소리, 아이들 웃음소리, 알프스에서 실려 온 바람까지 어우러져 도시의 진짜 리듬을 경험할 수 있어요.

☆♧ 팁: 오전 7시~13시 사이가 가장 활기찬 시간대. 시장에서 산 간식거리나 과일은 인근 벤치에서 여유 있게 즐겨보세요.


2. 라인강 페리(페에리) 체험과 강변 산책

라인강을 건너는 페에리(Fähri)는 네 곳에 있으며, 각각 이름도 다르고 출발지의 분위기도 미묘하게 달라요. 흐름에 몸을 맡긴 채 조용히 강을 가로지르는 이 짧은 항해는, 바젤에서만 가능한 독특한 경험이죠. 물 위를 걷는 것 같은 착각이 들 만큼 고요한 이동은, 도시의 풍경을 새롭게 각인시켜 줍니다. 강변은 걷기 좋게 잘 정비돼 있어 아침 산책이나 해 질 녘의 여유로운 산보 코스로 제격이에요. 여름에는 강물 속으로 뛰어들며 헤엄치는 사람들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 팁: 페에리 탑승은 약간의 기부금(CHF 2~3)으로 운영돼요. 현금 잔돈을 챙겨 가면 좋아요. 그리고 강변 카페에서 맥주 한 잔과 함께 노을을 바라보는 것도 놓치지 마세요.


3. 바젤 대성당에서 내려다본 도시의 풍경

라인강을 따라 조망할 수 있는 언덕 위의 바젤 대성당(Basler Münster)은 단순한 종교 건축 그 이상입니다. 고딕과 로마네스크 양식이 어우러진 붉은 사암의 외관, 천장을 향해 솟은 첨탑, 그리고 내부 스테인드글라스에서 스며드는 빛까지…. 하나하나가 사색을 부르는 공간이죠. 무엇보다 성당 뒤편의 뮌스터플라츠(Münsterplatz) 테라스에 서면, 라인강과 도시, 그리고 멀리 독일과 프랑스로 이어지는 풍경이 한눈에 펼쳐집니다.

& 팁: 일몰 무렵에 방문하면, 강물에 반사된 붉은 햇살과 고요한 도시의 모습이 어우러져 가장 로맨틱한 순간을 선사합니다. 성당 내부는 무료입장이며, 첨탑을 오를 수 있는 날엔 꼭 시도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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