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봄의 문턱에서
봄은 언제나 조용히, 그러나 단호하게 찾아온다. 겨우내 메마르고 얼었던 땅에 물기가 스며들고, 가지 끝에서 잊고 지낸 이름들이 피어난다. 산수유꽃이 먼저 노란 입술을 열고, 이내 개나리가 골목마다 노란 물결을 퍼뜨린다. 그 틈을 타 진달래며 벚꽃도 서로 다투듯 피어난다. 봄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 사위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올해도 봄은 어김없이 문턱을 넘었다. 아직 찬바람이 아침저녁을 스치지만, 볕은 따스하고 바람은 부드럽다. 대지는 기지개를 켜고, 사람들은 일상의 고단함 속에서도 한 움큼의 설렘을 품는다. 봄은 그렇게 모든 것을 일으키는 계절이다. 생명, 사랑, 기억, 그리고 희망까지.
하지만 그 희망의 그림자 속에, 믿기 힘든 비극이 일어났다.
2. 연기 속에서 깨어난 재앙
경상도 일대. 봄볕 아래 고요했던 산과 들이 갑작스레 검은 연기에 휩싸였다. 강풍을 타고 번진 산불은 나무를 삼키고, 마을을 덮쳤다. 한두 곳에서 시작된 불씨는 이내 통제 불능의 화마가 되어 사람들의 삶을 집어삼켰다. 기적 같은 구조 소식과 함께, 안타까운 사망자와 실종자 소식이 이어졌다. 삶의 터전을 잃은 이재민들의 절규는 봄바람 속에 멍울진 메아리처럼 맴돌았다.
뉴스 화면 속, 검게 그을린 나무 기둥들과 반쯤 무너진 가옥들, 잿더미 위에 덩그러니 놓인 의자 하나. 그 위에 앉은 노인의 표정은 이 계절과 어울리지 않게 지독히도 겨울 같았다. 봄은 분명 도착했건만, 그들의 시간은 한겨울의 절망에 머물러 있었다.
3. 자연의 역설, 인간의 숙명
봄은 생명의 계절이지만, 그 생명은 늘 위험과 나란히 존재한다. 따뜻한 날씨는 산림의 습도를 낮추고, 건조한 공기와 강풍은 작은 불씨도 삽시간에 재앙으로 키운다. 기후위기의 시대, 이제 자연재해는 더 이상 예외적인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반복되고, 예고되며, 때로는 인재(人災)의 얼굴로 다가온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예방 시스템의 허술함, 기후 변화의 속도, 사람들의 무관심, 혹은 어쩔 수 없는 운명. 책임을 묻는 질문은 쉽게 던질 수 있으나, 그 대답은 결코 단순하지 않다. 다만 분명한 것은, 이 불길은 누군가의 삶을, 기억을, 그리고 시간을 삼켜버렸다는 사실이다.
4. 재 위에도 꽃은 피어난다
그럼에도 봄은 멈추지 않는다. 불이 지나간 자리에 다시 새순이 돋고, 언젠가 그곳에도 산수유꽃이 피어날 것이다. 시간은 그런 식으로 아물게 하고, 생명은 또다시 제자리를 찾아온다. 이것이 자연의 위대함이자 잔혹함이며, 동시에 인간이 살아가는 방식이기도 하다.
잿더미 위를 걷는 사람들의 눈빛은 슬프지만 단단하다. 벽돌 하나, 기왓장 하나 다시 쌓으며 그들은 하루를 버티고, 언젠가는 웃을 것이다. 꽃은 지지만 또 피고, 나무는 타지만 또 자란다. 인간은 그 속에서 다시 일어서는 법을 배운다. 희망은 그렇게 작고 느리게 다가온다.
5. 봄은 끝나지 않는다
산불이 스쳐간 산자락에도, 봄은 온다. 재 속에서도 들풀은 싹을 틔우고, 새는 노래를 멈추지 않는다. 상처는 흔적이 되지만, 그 흔적 위에도 시간은 흐르고 계절은 돌아온다. 우리가 할 일은, 그 봄을 더 아프게 기억하는 일이다. 무심히 지나치지 않고, 그 자리에서 누군가가 겪은 아픔을 오래도록 되새기는 일이다.
이 봄, 나는 산수유꽃을 바라보며 기도한다. 불길 속에서도 서로를 끌어안았을 누군가의 손길을, 뜨거운 연기 속에서 생명을 지키려 달려간 소방대원의 숨결을, 잃은 것을 묵묵히 감당하는 사람들의 등불 같은 눈빛을. 그 모두가, 우리가 지켜야 할 봄의 일부이기에.
그리고 생각한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봄이다. 그러니 잊지 말자. 잿더미 위에도 봄은 다시 찾아오고, 생명은 불씨를 품고 있다. 그 생명을 위한 마음만은, 절대로 타오르지 않기를.